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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498년 백제 동성왕이 탐라국을 정벌하여 속국으로 삼으니
그때 기록에 탐라는 5개 부족으로 인구는 5000여명 이었다 한다.
AD662년 탐라의 신진세력자인 국주 도동음율이 2월에 신라에 투항하였고
1년전 8월에 탐라왕자 유리도라는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당과의
연대관계를 강화한다.
AD679년 신라 문무대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탐라를 경략한 후에도
일본국에서 탐라는
AD669년에는 오곡종지를 수입하여 농업생산에도 힘을 썻다.
고려 AD1105년(숙종10년)에 탐라국호를 폐지하고 탐라군으로 편입했으나
무신정부 100년간 제대로 문물을 전수하지 않았고
AD1273년(원종14년)에 원의 탐라 초토사를 설치하고 원나라가
탐라를 지배한 100여년 동안 공물이나 받아들일 뿐 거이 버려두었다.
AD1394년 조선이 건국되었으나 탐라(AD1295년 제주로 변경)도에
제주목 ,대정현 , 정의현을 설치하여 위민한 것이
AD1416년(태종16년)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제주도를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기 보다는
유배지로 생각하여 AD1629년 8월.13일.( 인조7년 )에는 가혹하게도
제주인의 본토 출국 금지령( 인적교역 금지)을 내리고 이것이
순종23년(1823.2.24.)까지 약 200년간 지속되었다고 한다.
고려치하 200년 ,조선치하 200년 육지문명이 제대로 전파되지 못한
탐라도는 말 그대로 문맹천지였을 것이다.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은‘ 왕조 개창 이래 400년 동안 수많은
벼슬아치 중 청백리로 뽑힌 이는 110명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드시, 탐라인들은 지방관의 수탈, 가혹한 세금과 공물,
특권층의 착취의 손길을 피해가지 못했다.
신화란 ‘ 기원을 설명하는 것으로 믿어지는 이야기다 ’라고
나경수교수는 그의 저서 ‘ 한국의 신화’에서 정의하고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신화란 역사다. 그것은 기원과 관계된 역사로
본풀이란 신화적 시간관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신의 근본과 내력에 대한 언어적 사설이다.
신화는 무가( 굿놀이 + 굿풀이)의 형태 중 노래중심의 굿풀이로
신성의 기원에 대해 풀어내며 설명하고 있다.
신화는 세속적인 면에서는 신뢰이나, 성스로운 측면에서는 신앙이다.
신화의 특성인 신성성, 신비성, 상징성 등은 종교의 특성과 상이하지 않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종교인 것이다.
신화는 상상력이 풍한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문학작품이다.
신화는 전해지는 방식이 서사문학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신화는 단지 말해지거나 읽혀지는 경우가 아닌 노래되어지고,
또 제의로 수행되어지는 종합예술이다.
구전문학으로 간주되는 전설, 설화, 우화와 신화의 다른 점은
신화는 매우 광범위하고 창조의 역사와 멸망까지
긴 기간 하나의 역사적 사료를 담고 있는 반면,
전설이나 설화에서 다루는 주제는 강한 도덕성이나
신들의 일에 관한 부분적 또는 이상한 현실과의 접촉에 관한 일 들이다.
특히 신화는 집단적인 것이며 사회적인 산물인 것이다.
비록 비합리적으로 보이고 형식적인 면에서 다양성을 보이고 있지만
신화는 개인이 아니고 구술집단에 의해 만들어지고 전승되어지며,
그 사상과 관념은 그 사회의 전체적인 의례행위에 참여되어진다는 것이다.
본인이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 1950년 말만 해도
서귀포에서 영화극장은 유일하게 한곳이 있었고
수송 및 교통은 트럭 한 두 대로 운영되어지는 것이 고작이였다.
그 때 우리는 솔동산 초입 지금의 터미널에 해당되는 곳에서
고무신 장사( 4.3사건 후 서귀포로 이주)를 한 것으로 생각이 난다.
병원이라 해야 친척벌인 강의원이 운영하는 병원이 전부였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천지연 뱀장어 이야기,
고래공장 이야기, 설문대할망 이야기, 제주목사 이형상 이야기 등이다
제주도 민속이 위계적인 공동체가 아니고 평등성을 기초로 하는
공동체란 점은 주거형태에서도 나온다.
안거래와 박거래라는 것으로 올래길을 돌아 집으로 들어오면
박거래에 계셨던 할머니를 뵙고 나서 어머니가 있던 안거래로 온다.
할머니가 박거래 별채에서 별도로 혼자서 생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궨당(모계 쪽 친척)이 보편화 되었었다.
부계중심 보다는 양변적 친척관계를 중시했는데 모계쪽 궨당의 힘이
강하게 행사되어 육지와는 사뭇 다르다.
그때 영화를 본다는 것은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를 누리는 것이 였다.
영화가 끝나고 누나의 손을 잡고 나오면서 본 것은 손님 중 대부분이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2/3 이상이 여자손님 이였다고 생각이 난다.
남자들은 뱃일 나가서 죽고 , 왜놈한테 잡혀가 행불되고 ,
4.3사건으로 죽고 이유는 가자가지이다.
지리적 자연조건과 지나간 역사를 더둠어 보면 재난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는 삶의 유일한 출구는 불가피한 선택인지는 몰라도 무교에
있었다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
무슨 일이 있거나 예상될 때에는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집으로
신방을 모시거나 당을 찾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무교란 무( 신방, 무당 )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신앙, 자연을 인격화,
신성화하는 믿음체계인 민간신앙의 한 형태이다.
전통적인 탐라인의 신앙인 당신앙의 중심에는 여성신이 있다는 것이다.
탐라에서 3대 여신하면 자청비 , 영등할망 , 설문대할망으로 꼽는데,
이 중 창조여신은 설문대할망( 설만두고 , 세명주할망) 뿐이다.
마고麻姑인 할망은 고대에서는 ‘하늘위에 계신 위대한 여신’을
의미했다. 할망이란 탐라에서는 아방(아버지) , 어멍(어머니)과 같이
할머니를 부르는 말이다.
할망이란 할미로 할은 한(접두어)으로 ‘크다’ , ‘하나 , ’하늘‘ 등을 의미
하며 미는 ‘엄마’, ‘어미’를 의미한다.
즉, ‘큰 어머니’ , ‘하늘 어머니’ 여신(대모신)을 이르는 말이다.
나중에 줄거리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 설만두고인 설문대 할망은
할머니 여신이 아니라 과년한 처녀 여신, 사랑과 평화의 여신이다.
자비와 눈물의 여신 ‘타라’ , 연꽃과 행운의 여신 ‘쉬리 락수미’ ,
성장과 풍요의 여신 ‘산치’ , 결혼생활과 행복지속의 여신 ‘시바’를
보면 최근에 조각된 설문대할머니 여신상 만든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시정되어야 함이 옳다고 개인적인 생각이다.
[타라]
[쉬리 락수미]
[ 시바 ]
[ 설문대 ]
** 줄거리 하나 **
**
설문대 할망은 옥황상제의 말잣 딸( 셋째 딸)이었다.
거대한 몸집으로 하릴없이 상제의 시중이나 받으며 하루하루를 무료하고
갑갑하게 보내던 할망(여신)은 바깥 세상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하였다.
하늘과 땅이 들어붙어 답답하기 짝이 없는 바깥세상을
몰래 내려다보고는 그 세계를 열어 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뒤탈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두근거리며 신이 나서는 하늘과 땅을
두 개로 쪼개어 놓고, 한 손으로는 하늘을 떠받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땅을 짓누르며 힘차게 일어섰다.
그러자 맞붙었던 하늘과 땅 덩어리가 넓게 벌어졌다.
이 사실을 알게된 옥황상제의 진노는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땅이 하늘에서 떨어져 나가버려 옥황상제의 권역 밖이 돼 버렸던 것이다.
그 모든 일이 말잣 딸의 소행임을 알고 그녀를 당장 땅으로 쫓아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어찌나 불같이 화를 내었는지
설문대할망은 속곳(속옷) 챙겨 입을 겨를도 없이 인간세상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서 오랫동안 헤매다
노인성이 비치는 아늑한 곳을 찾아내었으니 인간들이 살기에
가장 좋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제주도이다.
그러나 그 모양새가 밋밋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옷은 못 챙겨 입었어도 다행히 치마는 걸치고 나왔던지,
이 여신은 치마폭에다 흙을 가득 담고 지금의 한라산이 있는 자리로 운반해 갔다.
두 손으로 흙을 일곱 번 쌓아올려 지금의 한라산을 만들고
헤어진 치마 사이로 흙이 새어 나와 만들어진 오름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주무르며 활기찬 나날을 보내었다.
*
탐라 백성들은 할머니의 부드러운 살 위에 밭을 갈았다.
할머니의 털은 풀과 나무라 하며,
할머니의 고래굴 같은 거대한 음문이 열리며
할머니가 싸는 힘찬 오줌 줄기는
온갖 해초와 문어, 전복, 소라, 물고기들이
거기서 나와 바다를 풍성하게 하였으니
**
“ 바당은 자라자락 물게꿉 지치는디 할락간에 아장 설문대 할망 서답하는
서늉 좃좃이 봅서( 철석 철석 파도치는데 빨래하는 모습 자세히 보라 )“
“ 어떵헌 일인지 설문대 할망은 세상 만든 그날부터 매날 세상을 빨아부난
이 땅은 맑고 맑은 땅이 되었우게 “
[ 한라산 가파도에서 ]
화산으로 더럽혀진 탐라도를 아름답게 꾸몄다는 이야기 아닌가
**
** 이야기 둘 **
**
할망은 키가 큰 것을 늘 자랑하였다.
그녀는 키가 어찌나 크던지, 머리로는 한라산을 베고 누우면
발가락으로는 서귀포 앞바다에서 물장난을 쳤다.
[고군산 산굼부리]
그녀는 심심할 때면 한라산 정상부근에 머리를 배고 고군산
굼부리(암메)에 궁둥이를 얹어 앞바다 범섬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서 물장구를 쳤다.
[ 범섬 ]
이때 정상부근이 뾰족해서 쳐서 버린 돌덩이가 현재 안덕면 사계리에 위치한
산방산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와 폭이 백록담 그것과 같다고 한다.
그리고 서귀포 법환리 앞바다 ‘범섬’에는 설문대핳망이 누울 때 발을 잘못
뻗는 바람에 두엄지 발가락이 이곳에 닿아 생긴 구멍이
지금도 바위에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콧구멍 바위라 한다.
[산방산] [백록담]
그녀는 빨래를 할 때에도 백록담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한발은 관탈섬에 딪고, 다른 한발은 서귀포 서남쪽
지귀도를 딪고서는 우도를 빨래판으로 삼아 빨래를 했다.
[관탈섬- 제주 북쪽 ]
[지귀도 - 제주 남쪽]
그녀는 힘도 여간 세지 않았다.
하루는 그녀가 한쪽 발을 성산읍 오조리 식산봉에 딪고 , 다른 한쪽발은
성산리 일출봉을 딪고 앉아서 오줌을 누니 그 오줌줄기 힘에 산이 깊이
패이고 무너져 내려간 산들 중에 하나가 소섬(우도)가 되었다.
[제주도]
지리산 칠산계곡 설악산 천불계곡과 함께 삼대계곡 중이 하나인
탐라계곡은 이렇게 생겼다고 한다.
하루는 그녀가 한라산을 등지고 다리를 벌려서 쉬고 있는데 사냥꾼에 쫒긴
사슴 한 마리가 동굴인 줄 알고 몸을 숨긴 장소가 하필이면 커다란 하문이었다
안그래도 소피를 참고 있었는데 사슴이 자꾸 하문을 건드려 간지럼 때문에
갑자기 소변이 터져나와 이렇게 크고 긴 계곡이 생겼다 .
[ 탐라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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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으로 섬과 계곡이 생겨나고 누어서 물장구를 치고 빨래를 했다.
상당한 의미를 내포하는 상징성이다.
오줌발이 강해서 홍수를 이룰 정도면 음기가 매우 강한 여인이다.
설문대는 풍요와 다산의 기운이 넘쳐나는 여신이다.
옷을 빨았다는 것은 짐승의 가죽옷을 벗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서는
문명사회로의 진일보 즉 수렵에서 농경사화로 전환을 뜻한다.
빨래와 목욕의 의미는 청결과 정화된 생활문화를 말한다.
학자들은 물장구 즉 수영의 기본동작은 해양문화의 시초가 준비된 것으로
‘물질’이란 탐라 특유의 해양문화가 형성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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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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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먹은 것도 여간 많이 먹는 게 아니였다.
나중에 먹을 것이 별로 없어지게 되자 , 배가 고픈 나머지 남은 수수쌀로
몽땅 수수(대죽)범벅을 만들어 맘껏 먹었다.
소화가 않되 방귀와 함께 설사를 계속하니 그 설사똥이 360개의 오름이 되었다.
본풀이에서는 방귀를 뀌니 천지가 진동하였고 그 굉음이 너무 요란하여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았고 바다를 뒤집어 용암을 분출시켜 산을 만들었다.
[ 오름 모임 ] ]
제주도 표선면 해안의 아름다운 백사장도 그녀가 만든 것이다.
이곳은 본래 물이 깊어 파도가 일면 바닷물이 마을에 까지 들어와,
어린이들이 그 바닷가에 놀다가 해마다 한 두명씩은 물에 빠져 죽었다
이를 본 그녀가 하룻밤 사이에 산에 있는 나무들을 베어다가
바다 밑에 깔고 그 위를 모래로 덮어 씌어 그 바다를 얕게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아름다운 백사장에서 조수가 빠져나간 다음 백사장
모래를 파헤쳐보면 굵다란 썩은 마무토막들이 나오는데
이것이 그때 그녀가 깔아놓은 나무들이라 한다.
[ 표선 백모래 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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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도 똥의 상징성과 폭발하는 탄생의 힘을 보여준다.
똥을 누는 행위는 유아기에는 창조의 행위에 해당된다.
자신의 몸 밖으로 생산해낸 결과물에 비상한 관심과 집착을 보인다.
옛 탐라에서는 특히 똥은 풍요를 기약하는 황금이였다.
지금은 새마을 운동 덕(?)에 비료를 쓰게 되어 비용은 비용대로 들면서
땅은 황폐화되어 간다. 거름의 의미를 되새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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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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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에는 높이 솟은 기암이 있는데,
이 바위는 높이 솟은 바위 위에 다시 큰 바위를 얹어 놓은 듯한 기암으로
할망이 등잔이 얕으므로 바위 하나를 더 올려 놓은 것이라 한다.
일출봉에는 ‘바농상지돌 ( 바느질 고리돌 )’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그녀가
이곳에 앉아 바느질을 했다고도 전한다.
이 바위는 설문대 할망이 길쌈을 할때 접시불을 켰던 등잔이라 하여
지금도 ‘등경돌(燈擎石)’이라 부르고 있다.
[ 일출봉 과 등경석]
이야기는 이렇다.
설문대 할망이 아무리 거인 여성이라도 육지에서 흙을 떠나르는 것은
고된 작업이었다. 더구나 하나 밖에 없는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나르다보니
하루 일과를 마치고 보면 늘 치마폭이 헤어져 구멍이 나버렸다.
그래서 밤이 되면 헤진 치마를 바느질하였는데 어두운 밤에 밝혀둔
등경불이 너무 낮아서 그녀는 등경돌 위에 작은 바위 하나를
더 얹어 등경을 만들었다
이것이 현재 성산 일출봉에 보이는 등경돌이 되었다.
외로운 설문대에게도 배필이 생겼다. 역시 허우대가 큰 ‘설문대 하르방’이었다.
설문대 할망과 하르방은 작은 섬에 먹을 것이 없어 항상 걱정이었다.
원체 거인이었던 이들에게 생계를 이어 가는 일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 때 둘은 바닷고기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어느 날 둘이 합심하여 섭지코지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기로 하였다.
설문대 할망은 치마를 벗고 성산읍 신양리 ‘섭지코지’ 앞바다에 들어앉고
하르방은 우도쪽에서 부터 물고기 몰이를 했다.
“ 하르방, 난 여기 들어앉앙 이시커메,
저 우도나 일출봉에 강 물고기덜 좀 몰아옵써”
“ 경허주, 심심허주만 조금만 기다렴서”
하르방이 거대한 물건을 꺼내 바다를 휘휘 저으니
놀란 고기떼들이 섭지코지 쪽으로 도망가다가 다리를 벌리고 앉은
그녀의 하문(下門)속으로 들어가 잡혀 그날의 요기거리가 됐다.
이런 연유로 섭지코지는 『설문대코지』라고 불리게 됐다.
[ 상산포 앞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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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싯날이 볽아오난 사롬들이 모여들언
옷 맹글 벱 고르칩센 조추아간다 조추어온다
마침 생각하던 일이라 얼씬 대답하고
대국더래 또시 건넝 대마를 비어다가
마 삶앙 쪄내고 탁탁 털언 실을 뽑고
누애를 잡아당은 산더래 풀어놓고
고치를 솖아내엉 실뽑는 벱 고르치고
영호라 정호라 일일이 고르치멍
실뽑는 벱 고르치니 또 호루가 쑴뿍”
(탐라민이 아침부터 모여들어서 설문대 할미한테 실 만드는 법
가르쳐 달라고 하도 졸라데니 안그래도 가르쳐 줄라고 했던
참이라 육지를 오가며 대마도 비어오고 누애도 갖고와서
실뽑는 법을 가르쳐 주다보니 하루가 꼽박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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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봉에 등경불까지 밝혀가며 탐라민들에게 길쌈하는 일을
가르쳐주며 함께했다는 것은 문명 창조의 이야기이다.
길쌈이나 바느질을 한다는 것은 문화를 만드는 삶의 지혜를 여는
한차운 높은 삶의 경지로 몸을 추위와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 인간 품격과 미의식의 싹틈을 상징한다.
진화된 두뇌와 속련성을 요구하는 물레질( 실뽑기), 길쌈(천만들기)은
고대에는 신들의 영역으로 새로운 왕국의 건립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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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다섯 ***
설문대 여신은 가끔은 제 모습을 들여다보고 서글펐다.
그녀는 키가 너무 커서 옷을 제대로 만들어 입을 수가 없었다.
터지고 헌 치마를 입고는 있었지만
고래굴 같은 자신의 음문을 가릴 수 없었기에,
부끄러움을 아는 여인으로서, 가끔은 자신이 슬펐다.
짐승이 아닌 바에야
인간에게는 제 몸을 가릴 수 있는 지혜를 길러주어야 하며,
신으로서도 몸소 그 아름다움을 가꾸어야만 했다.
아름답고 넉넉하고 풍요로운 모습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제 몸을 가릴 수 없었다.
터진 옷은 소박함이 아니었다.
착한 그녀도 가끔씩은 심술을 부릴 때가 있었다.
하루는 제주도 사람들이 그녀의 옷을 한 벌 만들어 주면 , 그 대가로
제주도에서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말을 들은 탐라사람들은 명주 100동을 모아
그녀의 속옷 한 벌을 만들어주기로 하였다.
그래도 섬사람들은 섬에 있는 명주를 모을 수 있는 데까지 모았으나
99동 밖에 되지 않아 1동이 모자라는 바람에 ,
그만 그녀의 속옷 바짓가랑이 한쪽이 조금 짧게 만들어 졌다.
이것을 받은 그녀는 속옷의 바짓가랑이가 짝짝인 것에 그만 화가나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 주기로 한 다리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즉 설문대 여신은 낙담하여 연육의 다리 놓던 일을 포기하고 말았다.
**
1동은 50필 , 1필은 4장 ( 성인 남자의 키를 1장 이라함) 이고 14마이다
1마(한마)는 폭 43cm에 길이 약 90cm의 천을 의미한다고 한다.
1동이 모자랐으니 마 칠백이 모자랐다는 것인데
사랑의 여신이 몰랐다고 볼 수 없다. 왜냐면 첨부터 탐라섬은 척박하여
참마나 뽕나무 재배가 어려워서 물레질 재료를 육지에서 갖고 왔다.
일전에 제주도와 육지를 도바해협 같이 지하터널을 파서 도로를 연결하자는
의견이 많아 시의회에서 고려 중인데 예산이 문제라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참으로 잘못되고 어리석은 생각(단견)이라 염려가 됐었다.
제주도와 육지가 지하도로로 연결되면 제주도 관광은 고작해야 1박2일 연계코스
나 하루코스가 되어 기본적으로 교통체중 및 쓰레기문제가 예상되고 관광 서비스
부문에 부가가치가 높은 숙박, 운송, 요식산업에 수익성이 떨어질 것이다.
설문대가 다리를 놓던 흔적이 조천읍 신촌리 영장매 코치 , 조천리 대섬, 신흥리 바닷가
의 바위섬들 로 남아 있다고 지명화 되고 있으나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제주도 항구치고 바다쪽으로 뻣어나간 코치나 여로된 바위가 없는 곳이 없다.
*
여신이 약속했던 다리의 상징성은 무었일까
위험 , 절망, 단절이라는 원초적인 감정이나 성급함 아니라 돌아가는 여백과 여유,
화합과 연결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
** 이야기 여섯 마므리 **
큰 키가 자랑이었던 설문대는
제주바다 여기저기 몸을 던져 보았지만, 무릎 아래에서 바닷물이 찰랑거릴 뿐이었다.
이 설문대할망은 바다를 걸어다닐 때에도
바다 제일 깊은 곳이 할마의 무릎 밖에 차지 않았다.
북쪽에 깊다는 용담에 들어가니 용담은 할마의 발등 밖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남쪽에 있는 서귀포 서흥리 홍리물에 들어가 보아도 물은 겨우 그녀의 무릎까지
밖에 안찼다.
섬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간 곳이 한라산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물장오리라는 오름(암매)이었다.
물장오리 오름 꼭대기에는‘ 창터진 물 ’이라 불리우는 호수같이 둥글고 깊은 못이 있었다.
어떠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던 이 못은 바다와 연결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설문대 할미가 이 분화구에 들어서자 거대한 몸이 점점 빠져들어 가더니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
설문대할망이 죽은 이유는 생계의 어려움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즉 거대한 몸을 유지하기 위한 끼니를 때우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져 가고,
탐라 사람들의 설문대할망의 속옷 만들어주는 일이 실패로 끝나버리자,
그 여신은 차라리 괴로운 속세에서의 삶을 포기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신이 인간과 다른 점은 죽지 않는 것 외에 인간과 같이 육체의 틀 속에
같히지 않고 변형할 수 있으며 어떠한 형태로든 말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문대 여신은 탐라도를 버리고 떠나가지 않고 탐라도와
한 몸이 되는 , 그것도 물 ,탐라의 생명수로 변신했을까 심고해 볼 일이다.
설문대여신의 사랑의 깊이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일이다
생명의 물 , 지하 용천수가 마르지 않고 영원히 흘러 넘치는 약속의 땅
이 평화의 섬을 온전하게 후세에 전할 자 우리들 외에 그 누가 있으랴 .
인류. 민속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보면 이러하다.
신화란 신에 관한 인간의 언어적 형태로 소유하게 된 사서적인 이야기지만
그 속에 사실을 사실대로 담아 놓은 것이 아니라서 시간적인 제한에서 벗어
나고, 사실을 사실대로 그려놓지 않았기 때문에 항구적인 가치를 그 내부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적 공간적 제한을 초월한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문화유산이라는 것이다.
신화는 그것이 전승되고 의례되는 집단에게는 믿음이요 신앙이 된다
그러나 그 것을 믿지 않는 순간부터 신도 함께 죽는 다는 것이다.
즉 과거에는 사실로 믿었으나 , 시대적 추이나 과거에는 사실로 믿는 관념이
합리적 관념 같은 것으로 대체됨으로서 오늘에 와서는 허구라고 믿게 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믿음의 시대가 지나가 버렸다는 것.
그 한 예로, 조선조 영조14년(1771년) 탐라의 有志子弟 장한철(1744~?)의
현재 오키나와제도 류쿠국(AD1429~1879) 표류사건을 든다.
1770년12월 겨울에 장한철선비는 동료 29명과 함께 한양으로 과거시험에
응시하려고 제주목 항을 떠난다. 그런데 겨울의 탐라섬 주변 바다는 풍랑이
심하다, 3일간 표류하다가 류쿠국에 표착하고 이듬에 1월초에 상선에 구조
되어 흑산도로 앞바다에 이르렀으나 또 풍랑으로 청산도로 표류되었다.
겨우 강진에 도착하여 한양에 가서 과거시험을 봤으나 , 낙방하여 귀향하여
보니 산자가 겨우 2명이라 표류의 감회를 적은 것이 표해록(1771년)라 한다.
내용에 보면 설문대 할미에게 살려달려고 빈 기록이 있다.
“ 白鹿仙子 活我活我 백록선자 활아활아 ( 백록선자여 우리를 구하소소 )
詵麻姑여 活我活我 선마고여 활아활아 ( 쉐멩듸여신 우리를 구하소소) ”
[쉬멩듸 여신은 설문대 여신의 다른 표기로 세명주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신을 어떻게 부활시킬 수 있을까
신화는 또한 상징으로도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화를 지탱하는 기저에 반드시 믿음 뿐인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선을
새로운 출발점(선)으로 삼자는 것이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1889~1975)는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 옥스퍼드
학술회의에서 20세기에 일어난 기념비적 사건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망서림없이 “ 동양의 불교가 서양으로 건너와 기독교를 대체하는
일이지요.“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저서 ‘ 역사의 연구 ’ , 도전과 응전의 순환론적 사관, 또한
그 기초는 신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오늘날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난 영역은 어디에 있을까
인터넷 공간(Zone)이다.
전자회로 속의 가상공간이 홀로그램을 통해 현실공간과도 접속한다.
정보과학시대의 인터넷 가상세계는 다양한 전산망과 장치에 의해서
현실과 관련되어지며 , 그로인해 현대인은 이 가상의 공간에 밀접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
이제 우리는 라이프웹(life web) 시대에 있음을 자각할 때가 왔다
이 시대의 특징은
첫째 증강현실 이다.
즉, 실제환경에 가상의 사물이나 정보를 합성하여 현실의
세계를 가상세계로 보완해 줌으로 부가정보의 편의성을 동시에 제공한다.
둘째 현실,가상세계의 경계의 모호성이다.
즉, sns에서 작동하는 소셜화폐의 등장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스마트폰과 클라우드라는 새로운 IT와 접목으로 웹상에서의 올리는 활동이
일종의 화폐와같은 효용가치를 가진 것으로 인정받을수 있는 일이되었다.
끝으로 하나만 더 소개한다.
위제너레이션( we generation)의 진화이다.
즉, 사용자의 TPO( time, place, occasion)에 기반하여 실시간으로 다양한
쌍방향 정보의 교환 및 공유하는 하는 사회에서는 함께 힘을 모아
더협력적이고 살기좋은 사회로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
피안의 탐라부족 아니 설문대할미(여신)이 우리에게 준 이 사랑과 화합의
문화적 DNA,
역사와 꿈 , 이상과 비젼이 부단히 생성되는 신화소를 !
***
20013. 8.2. 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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