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이 해적질한 기록(...)
엄연히 말하자면 수사가 관할하는 수군은 아니지만, 분명 경내에 들어온 외국선을 공격했으니 해적질은 해적질이죠. 저 이기빈이란 사람에 대한 실록의 기록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1592년 : 이천부사가 됐습니다.
1593년 : 광주목사(경기도 광주)로 있으면서 왕릉을 침탈당하는 것을 막지 못해 사헌부-사간원으로부터 탄핵당합니다. 그런데 무슨 재주인지 두 달 후에는 다시 진주목사가 되는군요.
1598년 : 안주목사로 있으면서 양원이 "해채(海菜)와 유지(油紙)"를 대달라고 요청하는데 안주다가 곤장 15대를 맞습니다.
1599년 : 강계부사가 됩니다.
1600년 : 평안병사가 됩니다.
1602년 : 무려 수군통제사 후보로 거론됩니다--;;
1603년 : 남한산성의 도면을 그립니다. 동지중추부사-북변 방어사-포도대장-전라병사가 됩니다-;;
1604년 : 공조 참판-함경남병사가 됩니다.
1606년 : 수원부사가 됩니다.
1607년 : 드디어 경상수사 겸 수군절도사가 됩니다. --;;
1609년 : 제주목사가 됩니다.
1611년 : 김응서와 더불어 함경북병사 후보로 천거됩니다. 헌데 이해에 적선(賊船)과 싸우다 상패(패(喪敗)한 죄로 탄핵당합니다.
1612년 : 그 전해에 잡은 배가 왜적이 아니라 유구 선박임이 들통납니다(위의 첫 번째 기록). 이 상태에서도 이괄과 함께 북병사 후보에 오릅니다--;;
광해 050 04/02/10(을해) / 사헌부에서 전 제주 목사 이기빈과 전 판관 문희현의 치죄를 청하여 윤허하다
사헌부가 전일의 일을 연계(連啓)하니 답하기를,
“이미 하유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 제주 목사 이기빈(李箕賓)과 전 판관 문희현(文希賢)이 작년에 왜적을 잡은 일로 공을 논한 장계에 따라 이미 상전(賞典)을 시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며, 모두들 남경(南京) 사람들과 안남(安南)의 장사치들이 물화를 싣고 표류해 온 것으로 그 배의 제도가 매우 높고 커서 배 하나에 으레 10여 개의 돛대를 세운 것이 왜구의 배가 아님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기빈과 문희현 등은 처음에는 예우하면서 여러 날 접대하다가 배에 가득 실은 보화를 보고는 도리어 재물에 욕심이 생겨 꾀어다가 모조리 죽이고는 그 물화를 몰수하였는데, 무고한 수백 명의 인명을 함께 죽이고서 자취를 없애려고 그 배까지 불태우고서는 끝내는 왜구를 잡았다고 말을 꾸며서 군공을 나열하여 거짓으로 조정에 보고했습니다. 그들이 국가의 사대 교린하는 의리는 생각하지 않고 공과 재물에 욕심이 나서 멋대로 속이는 짓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앞으로의 화를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그들이 베껴 보낸 문서는 정본(正本)이 아니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방물(方物)을 사람을 보내 귀국에 기증한다.’는 등의 말로 보건대 안남인이 일본과 통래한 것은 이미 증거가 될 만한 단서가 있습니다. 이기빈과 문희현 등을 모두 잡아다 엄하게 국문하여 율문에 따라 죄를 정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희현은 탐욕스럽고 공을 좋아하나 기빈은 본디 근실한 사람이었는데 희현에게 오도(誤導)되어 그런 것이다.】>
1613년 : 그 죄로 결국 귀양을 갑니다.
광해 062 05/01/28(병술) / 표류하던 상선을 습격한 제주 목사 이기빈과 판관 문희현을 귀양 보내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죄수 이기빈(李箕賓)이 옥중에서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비록 중국인이라 하더라도 왜적과 같은 배에 타고 장사를 한 이상 난민(亂民)임에 의심할 바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논리로 중국인을 죽인다면 실정에 지나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상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하니, 왕이 법대로 하라고 명하였다【이에 기빈을 북청(北靑)으로, 판관 문희현(文希賢)을 북도(北道)로 귀양보냈다. 기빈이 무관으로서 제주 목사가 되었는데 잘 다스린다고 이름이 났다. 판관 문희현이, 상인들이 배를 타고 표류하는 것을 <보았다.> 당(唐)·왜(倭)·유구(琉球) 세 나라 사람들이 모두 굉장한 양의 재화를 싣고 있었다. 희현이 그 물건에 탐이 나 얍삽한 말로 기빈의 마음을 움직여 그 배들을 습격하고 재화를 나누어 가졌다. 기빈은 제법 사졸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희현은 취한 것이 더욱 많아 모두 독차지하였다. 황견사(黃繭絲)가 1백 50석에 이르고 명주(明珠)·마노(瑪瑙)의 종류가 1천여 개나 되었다. 제주(濟州)의 이졸(吏卒)들이 옥사에 나아가 실증을 하였으나 기빈 등은 형신을 받아도 자복하지 않았다. 옥사가 오래도록 판결이 나지 않다가, 모두 뇌물로써 형신을 멈추게 하고 귀양갈 수 있었다.
상선 중에 나이 스무 대여섯되는 유구(琉球)의 사신이 있었는데, 문사(文辭)가 제법 능숙하였다. 기빈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글이 매우 비장하였다. 중국 상인 수십 명도 희현에게 은밀하게 알려 왜구를 죽이고 중국 사람들은 살리도록 원했으나 희현이 답하지 않고 모두 죽여 증언할 여지를 없애버렸다.】
1618년 : 쓸만한 무장이 없으니 이기빈을 복직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광해군이 "국법을 제대로 시행했으면 그놈은 벌써 죽었어"라고 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1619년 : 자리를 비운 이흥립 대신 평안도 순변사가 되고 부호군을 제수받습니다.
1622년 : 표류한 중국선의 선원을 해적이라 해서 죽인 사건이 발생하자 조정에서 "이기빈같은 놈이 또 나왔다"고 해서 조사관을 파견합니다--;;
1623년 : 북병사입니다.
1624년 : 함경북도 절도사입니다.
1625년 : 함경북도 절도사로 재임하다가 사망합니다. 이 사람의 죽음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인조 008 03/01/08(정사) / 함경북도 절도사 이기빈의 졸기
함경 북도 절도사 이기빈(李箕賓)이 죽었다.
이기빈은 탐학(貪虐)을 자행한 무부(武夫)였다. 지난 광해조 때 뇌물을 궁액(宮掖)에 바치고 제주 목사(濟州牧使)에 제수되려 하였으며, 부임한 뒤에는 오로지 자기 한 몸 살찌우기만을 힘썼다. 하루는 유구국(琉球國)의 왕자(王子)가 보물을 가득 싣고 제주 경내에 정박했는데, 이는 대개 바람 때문에 표류하여 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기빈이 판관 문희현(文希賢)과 포위하고 모조리 죽인 뒤 그 재화(財貨)를 몰수해 들였는데, 왕자가 정절(旌節)을 벌여놓고는 안색을 변하지 않고 조용히 해를 당했으므로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애처롭게 여겼다. 사실이 발각되어 이기빈이 옥에 갇혔는데 광해에게 보물을 많이 바쳤기 때문에 형장(刑章)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반정(反正)한 뒤에 와서도 여전히 북관(北關)의 중임을 맡겼으니, 오늘날 사람을 쓰는 것이 구차하다 하겠다.
저렇게 비행을 저지르고도 계속 천거를 받은 걸 보면 재주는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정작 전쟁중에는 아무 기록이 없는 걸 보면 그 재주가 말 그대로 재주였는지 뇌물 바치는 재주였는지 알 도리가 없군요--;;
>조선왕조 영조 41년인 1765년 서른 다섯의 나이에 청나라 황제를 보러가는 사신행렬에 끼어 일생의 꿈이었던 연경(청나라의 수도, 오늘날의 북경, 곧 베이징)여행길에 오른 실학자인 담헌 홍대용은 북경에서 만난 청나라 사람으로부터 조선과 유구국(琉球國, 곧 오키나와)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대해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바로 얼마 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겨 관계가 소원해진 때문이다. 그래서 '전에는 통하더니 근년에는 통치 않습니다'라며 얼버무리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유구국, 오키나와와 관계가 나빠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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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나와는 잘 알다시피 유구국이란 이름으로 우리와 관계가 오래된 나라였다. 오키나와에서 해류를 타면 우리나라 제주나 남해안은 금방 온다고 한다. 고려시대 말기에 이 나라를 다스리던 중산왕 찰도(中山王 察度)가 옥지(玉之)라는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리며 신이라고 칭하고 방물을 바치기에 고려 왕조에서는 요즈음으로 치면 외교통상부 외빈접대처장인 전객령 김윤후(典客領 金允厚)를 답례차 보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볼 때 우리에게는 동생과 같은 나라였으며, 예로부터 사절이 오가고 우리의 문물도 많이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최근에 현장을 답사한 사람들도 그런 흔적을 발견했다고 보고하곤 한다. 그런데, 왜 우리와의 관계가 끊어졌을까? 거기에는 우리들에게 부끄러운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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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는 조선조 중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구국 국왕이 바다에서 표류하여 일본에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그 아들인 세자가 일본에 가서 뇌물로 석방시키고자 진귀한 보물을 배에 가득 싣고 일본으로 가다가 다시 표류하게 돼 이번에는 제주도에 상륙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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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 제주부사는 욕심이 많고 인정이 없는 사람이어서 보물을 가지려는 마음에 세자를 죽이려 하였다. 세자는 제주부사에게 아버지를 구해야하는 사정을 이야기하고 석방시켜 줄 것을 간절히 호소했다. 그러나 제주부사는 끝내 그 호소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세자는 분이 하늘에 치솟았지만 어쩔 수가 없어서, 보물을 바다 속에 다 버리라고 한 뒤에 글을 지어 보낸 뒤 참수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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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오키나와 세자가 지은 글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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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堯語難明傑服身 걸복 입은 몸에 착한 말 밝히지 못하니
>臨刑何暇訴蒼旻 형장에 임하매 푸른 하늘에 호소할 짬도 없네
>三良入穴人難贖 세사람 묻혀죽어도 속죄받은 사람 없고
>二子乘舟賊不仁 우리 두 왕자 배를 탔지만 도적은 어질지 않도다
>骨暴沙場纏有草 이제 뼈는 백사장에서 풀에 덮힐 것이고
>魂歸故國吊無親 혼은 고국에 돌아가도 누가 조문할 것인가
>竹西樓下滔滔水 죽서루앞의 물 도도하듯
>遺恨分明咽萬春 남긴 한은 만년을 울어도 모자르리
>
>얼마나 가슴에 맺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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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침내 왕자가 제주 땅에서 고혼이 되매, 이 소식을 들은 오키나와에서는 우리나라에 사신을 끊고 오히려 제주사람이 표류되면 잡아서 죽여 그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이러므로 제주백성들은 배를 타다 표류해서 오키나와로 가면 영락없이 죽는 고로 일부러 전라도 강진이나 해남의 호패를 차고 다니다 잡히면 전라도 사람이라고 우겼다고 한다.
>
> 담원 홍대용이나, 그보다 여섯 살이 아래인 연암 박지원이 모두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 적어도 조선조 중기임에 틀림이 없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우리의 선조중에 이처럼 재물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 있어 중요한 외교관계를 완전히 망쳐 놓은 사람이 있다니 말이다. 그런 사이에 오키나와는 일본의 침략을 받아 결국에는 일본 땅이 돼버린 것이다.
>
> 이제 우리나라의 국력이 커지고 우리의 해외진출이 늘어나는 만큼 과거의 이같은 아픈 역사가 있었다면 국민들이 이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위정자들은 그 아픔과 원한을 푸는 일을 그냥 넘겨서는 안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키나와에 관광을 가는데 우리가 예전에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푸른 바다가 좋다며 해수욕이나 하고 해산물이나 잔뜩 사먹고 돌아와서는 안될 일이다. 우리가 허구한 날 남이 우리에게 저지른 원한만을 갖고 남을 욕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된다. 늦기 전에 우리가 남에게 끼친 원한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반성하고 그 원한을 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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