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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나/미술관련

조선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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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회화 감상

   


 

 

1. 안견<몽유도원도>


화운 안견(호 현동자)이 1447년 4월20일 안평대군의 꿈을 듣고 3일 만에 완성한

그림이다.

이그림에 부착된 두루마리로 꾸며진 찬 가운데 안평대군의 서시에서 천년 동안

보전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일본에 유출되어 현재 덴리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있다.

제목 그리고 그림에 붙인 22명의 23편에 이르는 찬문으로 명실공이 시서화를

두루 갖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7미터, 11미터를 웃도는 두 두루마리로 되어있다.


복사꽃 만발한 안평대군의 꿈속으로 여행


“ 정유년 4월20일 밤에 자리에 누우니, 정신이 아득하여 깊은 잠에 빠지고 꿈도

꾸었다. 박팽년과 더불어 어니 숲에 당도하자 층층의 산봉우리가 솟아있고 깊은

골짜기가 아름다우며,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서 있었다.


오솔길이 숲에 다다르자 여러갈래로 갈라졌고, 나와 박팽년은 어디로 갈지 몰라

서성대었다. 그러다 산관야복을 입은 노인을 만났는데 ‘ 이길을 따라 북쪽으로

휘어져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이외다‘ 라고 알려주었다.


박팽년과 함께 말을 타고 찾아가니, 산벼랑이 울뚝불뚝하고 나무숲이 빽빽하며,

골짜기는 돌고 돌아서 거의 백굽이를 휘어져 사람을 홀리게 하였다.


그 골짜기를 돌아 가니 넓게 트인 마을이 나타나는데 사방의 벽이 바람벽처럼

치솟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엮으며, 복사꽃 만발한 복숭아나무 숲이 얼비치어

마치 붉으스름한 노을 같았다. 또 대나무 숲과 초가집이 있는데, 싸리문은 반쯤

닫히고 흙담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소나 말은 없고 앞 시내에 오직 조각배 한

척만이 물결을 따라 오락가락하니 정경이 소슬하여 마치 신선의 마을 같았다.“


- 도연명의 ‘도화원기’는 무릉도원을 파라다이스로 묘사한 글로 무릉이란 지금의

양쯔강이 이룬 큰 호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이후 문인들은 복숭아꽃을 별천지 속의 꽃으로 읊도렸으며, 무릉도원은 별천지

또는 이상향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백 또한 ‘산중문답’에서 복사꽃 실린 물이 아득히 흘러사니 별천지로구나 라고

읊었다.

중국 동진(317~419)의 천재 시인 도연명의 붓끝에서 무릉도원은 동양의 연원한

꿈의 나라가 되었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보았다던 무릉도원은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두원과 흡사하다.


무릉도원에는 고요만이 짙게 까려 있는 듯 적막감이 들지만, 쓸쓸함이나 절망스런

분위기는 아니고, 소리없이 보이지 않는 궤도를 따라 운행하는 대자연의 질서가

보여주는 평온함이다.

동양이 이룩한 최고의 미적 가치인 '고요의 미학'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이그림은 통상적인 예와달리 왼편 하단부로부터 오른쪽 상단부로 대각선을 따라 전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왼편의 자연스러운 현실세계와 오른편에 배치된 환상적인 도원의 세계가 뚜렷한 대조를 보이느 것도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이다.

현실세계는 부드러운 토산으로 이루어져 있고, 도원의 세계는 기이한 형태의 암산으로 형성되어 그 차이가 현져하다.

무엇보다 큰 특색은 전체 경관이 몇개로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景群들로 짜여 있다는 점이다.

즉, 여러개의 산 무더기들이 합쳐져 하나의 통일된 전경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는 두 가지 두드러진 시각의 차이가 엿보인다.

즉 왼편의 현실세계는 정면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려져있다. 그러나 오른편의 도원은 위에서 내려다 본 부감법을

적용하여 표현되었다.

이처럼 부감법을 사용함으로써 언견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이쓰면서도 공간이 넓은 도원의 경치를 성공적으로 표현했다. 


** ( 추가 )


"복숭아꽃 향기에 취해 정신없이 걷고 있는데 어느 순간 옆을 보니 최항과 신숙주도 와 있더군. 우리 모두 말이 없었지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신선이 사는 곳처럼 아름다운 곳에 왜 사람의 모습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는지 말이야.

더구나 나는 대궐 안에 있는 사람인데 어찌 꿈이 산림에 이르렀을꼬...날마다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던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없었는 지 몰라...”


비해당은 멀지않아 다가올 비참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듯 증얼거렸다고 합니다.

1453년(단종1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란(1453년)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죽이고 지지기반을 잃은 안평대군을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쉬어 강화도로 귀양을 보냈다. 그 뒤 교동도로 유배되고 나서 사사되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 3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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