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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나/미술관련

조선의 5대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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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궁궐 이야기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이궁과 별궁인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을

  합하여 흔히 五大宮이라 한다.

  곤륜산에서 간룡이 뻣어 나와 고비사막을 지나 산동. 무산. 여산을 만들고

  요동벌을 잠용하여 문득 고개를 치켜들어 솟아 대악을 이루니 우리 민족의

  조종산인 백두산이다.

  조선 영조 때 지리학자 여암 신경준의 '산경표'에 반도의 척주인 백두에서

  지리산까지 대간의 길이가 1,625km라 했다.

  백두대간은 1개의 장백 정간과 13개의 정맥으로 갈비뼈처럼 형성 한반도의

  산맥을 이루고 있다.

  이 대간의 한북정맥이 원산 넘어 분수령 서남으로 출각하여 층층 절절이

  전환굴곡하면서 주맥인 불곡산에서 낙맥과 기봉으로 도봉산에 이른다.

  주봉인 자운봉과 남쪽 만장봉이 서울의 길지(양기)를 맺어주기 위해 크게 힘을

  뭉쳐 주는 곳이다 이곳에서 과협하여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의 인수봉과 백운대

  만경대를 이루니 이 삼봉이 일명 삼각산으로 , 삼각산 맥하에서는 큰 양터가

  형성되는 곳이다.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궁궐터를 잡는 과정에서 여기에 올랐다

  는 기록이 있는 곳이다.

 

A. 건립

 

1. 경복궁 1395년(태조4년)9월 조선왕조 최초 으뜸 궁궐

   고종5년(1868년) * 아관파천(1986년)

   법전으로 지속 기간 197+28 =225년

   북악산 아래 견복궁 터를 닦고 와의 권위와 전통성을 보이기 위해 궁 앞에는 육조

   거리를 만들고 도로 좌우에 관청을 지었다. 왕과 왕실가족이 생활하는 궁궐인 

   경복궁을 처움에는 380여 컨으로 근정전과 강녕전, 연생전 등 주요 건물들만 있었으나

   경희루도 다시 짓고 점차 건물의 수를 늘였으나 임진란(1593년)으로 전소되고

   오랜시간 방치되었으나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중건하여 궁궐로 사용했다.

 

1-1. 경과

    1392년 7월 17일 태조 개경 즉위

    1393년 3월 공식 조선 명칭 사용

    1494년 12월3. 기공 ~ 1395년 9월 완공 390 여칸 규모

       종묘. 새 궁궐 모양새 갖춤

    1592년 임진년 왜란 시 소실 1868년 중건

 

2. 창덕궁 1405년(태종5년)10월 ~ 1910년 정궁 이궁 이용

       조선왕조 궁궐 중 최장 사용 505년

2-1.경과

     1405년 한양 재천도 후 창건 10월 이궁. 창덕궁 창건 10월 이어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 전소

     1609년(광해군 1년) 중건 이후 230년간 정궁 역활

     1610년(광해군 2년) 중건 3년 이어

     1623년 인조반정 대화재 피해

     1647년(인조25년) 복구

     1868년(고종 5년) 경복궁으로 이어

     1919년 복구(1833뇬,1907년 대화재) 일재의거 뢔곡됨

 

3. 창경궁 1484년(성종15년)9월 ~ 1910년 이궁 사용

      왕궁으로 426년 간 사용

3-1.경과

     1418년 세종 원년 상왕(태종)을 위해 수강궁 영건

     1483년 (성종14년)수강궁터에 창경궁 건축(익년 9월 완공)

     1592년 임진왜란 궁궐 화재받음

     1616년 광해군6년 창경궁 재건

     1909년 (순종2년) 동식물원지어 1911년 공원지정

     1983년 동식물원 옮기고 창경궁으로 바로잡음

 

 

4. 경희궁 1622년(광해군14년) *경덕궁

       ~ 1920년     246년간 사용

 

4-1.경과

       1618(광해군10년) 시공 ~ 광군 15년(1623년) 완공

       1910년 조일 합병과 동시 전각 거의 훼손

       1980년 발굴 조사를 통해 흔적 찾음(숭전정, 자정전)

       1985년 건설부 공원지정 1988년부터 복원 시작

       2002년부터 일반 공개

 

5. 경운궁 1897년(고종34년)2월 *덕수궁

       순종 즉위년(1907년) 4월 고종 강제퇴위

                              10월 창덕궁으로 이어

5-1.경과

      터는 원래 신덕왕후 강씨 무덤인 정릉이 있던 자리

      1593년(선조 26년) 정릉동에 행궁(월산대군)

      1611년(광해군3년) 10월 창덕궁 이어 경운궁 칭호

      1773년3월 영조 정조 기일 추모하기 위해 방문

      1895년1월 즉조당(태국전)에서 국호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고종 황제 즉위

      1897년(고종34년) 2월 중건

      1910년 8월.22일. 합병 1912년 총독부 소유권 탈취

 

B. 배경

   1.2.3.4.5.

   우리나라에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은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조선은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였으므로 궁궐이 도성이 있는 한양,

   즉 서울에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이궁과 별궁인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을 흔히 5대궁이라 한다.

   각 궁궐에 조영된 형상은 저마다 특색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도 같은

   것은 없다.

   이는 기능을 존중하되 주변의 산세와 지형이 지닌 특성을 고려 조화가

   되도록 창건하였음을 의미한다.

   각 궁궐을 이룩할 때는 궁궐조성도감을 열어 모든 공정을 총 지휘하게

   하였다.  공역이 끝난 뒤에는 공사와 관계된 공문서, 담당관원, 재용,

   도면, 소용된 물목과 그 조달, 기물의 사용과 그 수량, 상량문 등의 기록

   종사한 인원과 공사일지 등의 기록을 보관했다.

   북궐 = 경복궁     동궐 = 창덕궁  창경궁   서궐 = 경희궁  남궐 X 덕수궁  

 

 

C. 궁궐별 비교

 

1-1. 경복궁

    광화문(정문)

    영제교(금천교)

    근정문(조정문)

    근정전(법전)

    사정전(법전)

    강녕전(침전)

    교태전(중궁전)

1-2 주요 답사경로

     홍인문 * 양제교* 근정문* 근정전* 사정전* 수정전*(휴식)*

     경회루 * 강녕전 * 교태전 * 자경전 +- (향원지-건청궁) ->

 

2-1. 창덕궁

     돈의문(정문)

     금천교(금천)

     인정문(조정문)

     인정전(법전)

     선정전(편전)

     희정당(침전)

     대조전(중궁전)

2-2 주요 답사경로

      돈화문 * 궐내각사( 내각-규장각-검서청-선원전-약방-옥당)*

      금천교 중궁전선문 * 외조구간( 정청-호의청-상서원-내병조)*

      인정전 * 선정전 * 빈청 (휴식) * 희정당 * 대조전 * 홍복헌 * 경훈각*

      수락간 * 성정각 (내의원-보춘정/희우루)* 관물헌 * 낙선재 * 석복헌*

      수강재

 

3-1. 창경궁

       홍화문(정문)

       옥천교(금천)

       명정문(조정문)

       명정전(법전)

       문정전(편전)

       환경전(침전)

       양화당(왕의 침전)

       통명전(중궁전)

3-2. 주요 탑사 경로

       황화문 * 옥천교 * 명정전 * 양의문 * 문정전 * 숭문당 * 함인정 *

       환경전 * 경춘전 * 통명전 * 양화당 * 영춘헌 * 집복헌

       자경전 * 풍기대 * 태실 * 춘당지

 

4-1. 경희궁

       흥화문(정문)

       금천교(금천)

       숭정문(조정문)

       숭정전(법전)

       자경전(편전)

       태녕전(침전)

       융복전,회상전( 침전;둘다 현존 않함)

4-2 주요 답사 경로

         흥화문터 * 금천교 * 흥화문 * 숭정전 * 자경전 * 서암 * 태녕전

 

5-1 덕수궁

       대한문(정문)

       금천교(금천)

       중화문(조정문)

       중화전(법전)

       덕홍전(편전)

       함녕전(침전)

       석조전(침전)

5-2 주요답사 경로

        대한문 * 금천교 * 중화전 * 덕흥전 * 함녕전 * 정관헌 (휴식)

        유현문 * 석어당 * 즉조전 * 준명당 * 석조전 * 광명문

 

D. 건축물 비교

 

1. 정문

 

1-1.광화문   

   

 

 

* 경복궁-남문. 궁성- 정문. 3문3조 중 외조의 시작

* 으뜸 궁궐의 정문 ,좌묘우사 - 왕조의 정통성과 권위를 보여줌

* 궁문: 원래 사정문(일명 午門)으로 불리웠으나 세종8년에 광화문으로 명명

  1426년에 光天化日에서 광화 차용 통치자 염원 : 태평성대

* 1969년- 철근콘크리트 성축 - 좌향 3.5도 벗어남. 14.5m 뒤로 물러남

* 2006년 허물고 복원공사 하여 2010년 8.15. 개방

* 천장 : (현무) - 주작 - (천마)  남방수호 신령 7성수

*수난 : 1592년 임진왜란 소실. 1916년 조선총독부 청사로 철거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석축  궐문형식(홍예삼문) 갖춤

홍예종석은 용의 모습 조각. 석루조와 육축 위에 돌짐승 조각상

임금님이 내린 신표 = 암호(군호) 없이 문짝 안 열림  수문장 감시 

성곽이 외침으로부터 인명과 재산보호. 행정적 목으로 축조한다면

궁궐은 왕과 왕족이 기거하며 치조하는 공간으로 궁의 정문과 그

좌우에 망루를 설치한 내궁을 말한다. 이점 외국의 궁전과 다른 점이다.

1867년( 고종4년) 5.17.공사시작, 기둥(9.18.) , 상량(10.11.)

돌로 육축을 쌓고 홍예 고설3문형식 취함

가운데 문은 어칸으로 임금.왕비 출입( 천정 주작도 )했고

동문 문관이 출입( 천마도) , 서문 무관이 출입(현무도)함

아치문 가운데 용의 몸에 뿔달린 짐승얼굴한 벽상을 각각 양각하고

그 위에 6개씩 짐승머리 모습 석루조처럼 조각해 안팎에 담.

육축 바깥의 좌우 꼭대기에는 각각 사자처럼 생긴 돌짐승 앉힘

육축 위에는 네면 둘레를 따라 전돌을 쌓아 여장을 돌리고, 그 동서

쪽으로 문을 달아 계단을 오르내리게 했다.

문루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우진각 지붕을 올린 중층 건물로,

겹처마 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하고 취두, 용두, 잡상을 배열 장식함.

광화문과 이어지는 궁장의 양끝에는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있어서

다섯 궁궐의 문 중 유일하게 독립된 망루의 형식을 갖추고 있던 문.

그리고 문밖으로는 정치와 경제의 중심축인 육조거리가 있었고, 그

육조거리는 다시 경제의 중심인 운종가와 맏닿아 있었다.

즉, 광화문은 한양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축을 있는 곳에 위치함으로서

당시의 왕조사회에 궁궐의 위엄의 상징으로 큰 의미가 있다.

 

2-1. 돈화문     

 

 

* 태종5년 1405년 10월 창덕궁 이궁으로완성 :

                                       규모 외전 74칸. 내전 118칸 였음

* 실록 : 1411년 3월 석교 . 누문(돈화문) 건축 명명

* 지금 돈화문 1609년(광해군 원년 재건)

* 돈화 : 중용의 대덕돈화에서 발췌 - 큰덕으로 백성을 배풀어 감화

* 규모 5칸 2층 문루 종과 북 타시함.

 

태종12년(1412년)에 창건 중층 우진각 지붕을 한 궁궐 정문으로

홍화문과 함께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다.

1592년 소실 후 선조40년(1607년)에 가장 먼저 복구되었는 데 점차

개축되면서 현재의 규모로 커졌음.

태종13년에는 정문에 무게 15,000근의 동종을 걸고 조석으로 인경을

쳤다는 기록이 있는 데 우라나라 궁궐대문 가운데 정면 5칸 규모로는

돈화문이 유일하다.

동궐도에 묘사된 지붕이 팔작지붕이나 대한제국 시대의 사진에는 지금과

같이 우진각 지붕이다.

1890년 왕실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문지방을 빼고 끼울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지형조건에 맞추어 전각을 배치하였으며 돈화문은 장대석 3벌대로 기단을

쌓고 기단 위로 둥근 초석, 두리기둥을 세워 겹처마 다포계 양식의 정문으

로 건물 앞 뒤로 각각 6개씩 평주를 세우고 그 가운데 4개의 네모난 고주

를 배열하여 그 사이에 커다란 판문을 2짝씩 걸었다. 

 

3-1. 홍화문(보물 384호)

     

 

 

      * 창경궁의 정문(대문) 정면 3칸 측면2칸 중층 겹처마 우진각 지붕

* 1484년(성종15년) 2월 의정부 좌찬성 서거정 명명

* 1616년(광해군8년) 2월 재건

* 백성과 만남의 장소 :

   영조-26년 5월 한양, 균역에 대한 백성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직접 양반과

 평민을 만나고나서, 대신들이 반대했으나 백성의 의견데로 균역법 실시했다고 함

 정조- 사미행사 개최 - 혜경궁 홍씨 회갑연에 홍화문 밖에서 가난한 백성에게

 쌀을 나눠 줌으로 백성에게 회자되었고 '홍화문 사미도'에 그장면이 나옴.

 홍화문 밖은 민기가 없이 넓은 마당이 이어져 이곳에 활터를 세우고

 무과시험을 실시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자주 나오는데 백성과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었음은 자연스러운 점이 보인다.

* 경운궁 대한문 함께 동향으로 주례 고공기 궁궐배치에 어긋나나 창경궁이

 옛수강궁 터이고 지형을 고려 정전인 명정전 일곽과 함께 정동향으로 배치 함

 동궐도에 따르면 문의 좌우로 남북 십자각까지 행각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궁장으로 만 이어져 있다.

 기록에는 남북 행각에 수문장청과 주자소가 위치했다고 함

 이 건물은 장대석 기단(현재 기단부분 땅에 묻힘) 위에 둥근 초석으로 놓고 12개의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아래층 길이는 14척(1척=30.3cm), 위층 기둥은 8척이라

 기록되어있다. 

 다포계 공포로 외2출목 내3출목( 주심에서 건물 안쪽으로 들여진 것)

 이다 고색창연한 처마와 공포의 날카로운 양서가 조산시대 초.중기의

 건축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홍화문 밖은 민가가 없고 넓은 마당이 이어져 이곳에 활터를 세우고

무과시험을 치루웠다는 기록이 실록에 자주 나타난다.

1609년 광해군 원년에 복구된 돈화문 보다는 중건 시기사 늦지만 돈화문이

그후 여러번 중건되었음을 감안다하면 이 정문의 건립 연대가 오래된 편에 속함.

 

4-1. 흥화문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워진 경희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우진각 지붕의 건물이다.

단층인 이유로 “광해군 일기”에 ‘경덕궁은 다만 피우처(별궁)이므로

단문으로 찰조하라.‘라고 적혀 있다.

원형 초석에 두리기둥으로 앞면과 뒷면에 각 4개씩 배열하였고

가운데는 다소 가는 기둥 4개를 배열하여 판문을 2짝씩 달았다.

천장은 연등천장 , 좌우 협간의 천정은 우물천장으로 마감했다.

양성한 지붕 마루에는 취두, 용두, 잡상을 얹혔다.

1915년에는 도로공사한다고 남쪽으로 얾겼고, 1932년에는 박문사로

이건되어 그 정문으로 사용되었고, 후에 신라호텔 정문 노릇을 하다

1988년 현 위치인 옛 서울고등학교 정문터에 복원했으나, 원래 자라는

구세군회관 코너 표지석 있는 곳임.

 

5-1. 대한문

    

 

 

 

덕수궁의 정문은 대한문인데 원래의 정문은 인화문으로 1906년 즈음에

인화문(남문)이 건극문으로 바뀌어 부르다가 멸실되었다는 데 그 시기는

불분명하다,

대한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으로 1896년 아관파천 중 수리하게 한 후

1897년 경운궁에 환어하여 정문인 대안문 , 중문인 조원문, 법전문인

중화문을 건립하여 3문형식을 갖추었으나 1904년 함년전에서 의문의

대화재가 발생 후, 1906년 대안문을 수리 후 중건하여 대한문으로 바뀌

게 되었다.

1912년 태평로 확장으로 덕수궁 궁역이 축소되고, 1968년 다시 한번

더 확장되면서 궁장이 안쪽으로 물러나 대한문만 도로 한 가운데 남게

된다. 1970년 대한문을 옮기는 공사를 하면서 안쪽으로 33m 밀려나게

되어 궁내 금천교와 가깝게 위치하게 됩니다.

단층이지만 정문은 돌짐승을 배치한 계단을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춤. 둥근 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웠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각 칸에는

2짝씩의 판장문을 달았다.

가운데 칸 청전은 서까래를 들어 낸 연등천장이고, 양 옆칸은 우물천장

으로 마감했다.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 지붕은 우진각으로 각 마루는 양성을 하여

취두와 용두 그리고 잡상을 배열하였다.

 

 

2. 금천교

 

2-1. 영제교(경복궁) 

   

 

 

조선의 궁궐은 정전의 문 앞에 명당수가 흐르도록 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흐르는 명당수(금천) 건너편 땅이 내명당으로 풍수지리상 배산임수를 만드

는 일종의 장치입니다.

이 명당수를 건너기 위해 만든 다리를 금천교라고 했는데 경복궁의 경우

세종8년에 영제교라 명명했다고 합니다.

금천교는 엄숙하고 신성하여 범접을 금하는 공간 구분으로 그 기능을 보면

실용적인 면에서는 금천을 목조전각이 대부분이어서 화재시 방화수로 이용

하는 한편 다리는 임금과 백성을 연결하는 소통의 장으로 쓴다는 것인데

영제교는 정치적으로 치조행위가 이루어지는 사실상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영제교 다리 위부터는 삼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중앙에 위치한 도로가 어도이고, 그 어도 진행방향 좌우쪽에 무관과 문관이

통행하는 길이 별도로 있습니다.

그리고 신성한 다리인 만큼 다리 위 장대석으로 된 주 난간 기둥 4군데에

서수, 그리고 다리의 양측 기슭에는 천록이라는 벽사의 힘을 가진 동물의

조각상을 두어 주야로 감시케하여 부정한 기운의 침입을 막도록 했습니다.

다리의 양식은 2개의 홍예를 가진 석교입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조회 시 2품 이상은 다리 안쪽에 3품 이하는 바깥쪽에

서 대기하게 했다는 것이 나옵니다.

 

* 홍례문

홍례문은 경복궁의 두번째 문으로 영제교를 건너기전 통과하는 문으로

세종 8년(1426)에 홍례문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고종때 경복궁이 증건하면서 이름이 홍례문으로 바뀌었다.

당시 청나라 건륭제의 이름이 홍려이므로 홍을 피해 흥례문으로 바뀌었다.

흥례문 일곽은 1916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위해 권역을 전부 철거하였다.

      복원은 1997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2001년 10월 26일에 완공하였다.

 

2-2. 금천교(창덕궁)      

 

 

  태종11년(1411년) 축조 * 배산임수 형식

  홍예교 하단 남쪽 서수(해태?), 북쪽 거북     중앙 귀면조각-벽사

* 하마비와 금천교

  하마비는 궁궐, 종묘, 거원 등의 입수에 세워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을 비롯한 탈 것에서

  모두 네리라'는 뜻을 담고 있는 석물입니다.

  하마비는 태종12년(1412년) 11월 종묘와 궐문을 지내는 자는 존경심의 표시로 탈것에서

  내리도록 법으로 정하였습니다.

  덕수궁의 하마비는 궁궐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하마비이다.

  덕수궁은 다른 궁궐과 달리 정문과 금천교가 바로 붙어 있습니다.

  창덕궁의 금천교 처음 만들어질 때 경복궁과는 달리 조선의 법궁이 아니었기 때문에

  궁궐의 배치가 유교의 규범에서 약간 벗어나서 눈에 거슬리지 않을 만큼의 한도에서

   어느 정도는 자유럽게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자연에 순응하는 우리 전통의 멋이 배어있다.

 

2-3. 옥천교(창경궁) 

       

 

 

배산임수 형식. *옥천교_옥류천 자연수 * 홍예다리사이-귀면조각

길이 9.9m, 폭 6.6m 규모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반원아치형의 홍예 두개를 이어 붙이고 그 위에 장대석으로 귀틀을 짜고

장대석과 판석을 끼워넣어 바닥을 만들었으며 좌우로는 돌난간을

세웠는데 하엽동자 기둥 4개씩을 설치하고 그 사이에는 혈판을 2개씩

뚫어 놓았다. 주난간 기둥- 돌짐승 상

귀면(나티, 천정무사)- 벽사와 궁궐 수호 역활

 

2-4. 금천교(경희궁) 

       

 

 

배산임수 형식

*광해군 11년(1619년년) 축조 일제 매몰- 서울시 2001년 발굴 통해 옛 석조물

 포함 복원

 

 * 홍예 중앙 귀면 조각

홍화문터 비석을 지나면 경희궁에서도 여느 궁궐처럼 금천교를 볼 수 있습니다.

금천교 난간의 돌짐승들과 홍예 사이에 새겨진 귀면은 궁궐 바캍의 나쁜 기운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싱징성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2-5. 금천교(덕수궁)

        

 

 

* 궁궐 유일 하마비 - 태종12년(1412년) -법으로 정함 종묘>궐문

* 대한문 뒤로 옮기며 밀착됨 주난간 기둥-4곳 서수 대신 연꽃조각

* 최초 금천 현 중화문 과 중화전 사이 정4품 주변 위치

  옥인동- 황토현 언덕으로 흐르던것  정릉 동천-궁 안으로 끌여 들여 

  금천으로 만들고 -청계천 흐르게 함.

  석교 홍예도 밋밋하고 돌다리 상판의 중앙부가 도둠하게 솟아있지 않음. 

 

3. 조정문

 

3-1. 근정문(보물 812호)

 

    

 

 

근정전의 정문 , 흥례문을 지나 답도를 따라 실질적인 치조의 시작점인

영제교를 지나면 좌측 행각에 궐내각사로 연결되는 유화문과, 기별청,

우측 행각 끝 쪽에 에 덕양문이 보인다.

근정문 세칸 폭에 맞추어 길게 놓인 돌계단 가운데 부분에 봉황 2마리와

구름을 새긴 판석을 배치했다.

근정문은 조정의 출입구일 뿐만 아니라 앞 마당은 근정전 행사에 앞서 진행

된 정치적 활동이 시작되는 곳이다.

즉, 국상 중 세자 국새 인수. 왕비와 세자 책봉. 문과 전시. 군사훈련 행사 등

삼문형식의 근정문 좌우에는 일화문( 문관 출입)과 월화문(무관 출입)을 냈다.

 

* 일화문과 월화문

근정전 편문으로 일화문과 월화문이 있다.

동쪽의 일화문은 문관, 서쪽의 월화문은 무관이 드나든다. 관리들은 근정문과 잇닿는

어도를 피해 편문에 연결된 행랑을 통해서만 주정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3-2. 인정문

      

 

 

       다른 궁궐의 그 것과 성격, 형태가 비슷하다.

       다만 공포가 내3출목 외2출목인데 으로 바깥쪽 하나를 생략했고,

       합각 머리 아래 쪽천장의 짜임새가 특이 하다.

 

       천장은인정전의 정문으로 태종 5년(1405년) 창덕궁 건립 당시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시 소실되어 광해군 원년에 재건, 또한 영조 20년(1744년)에

소실되 이듬해에 복구되었다. 그리고 순조 때 또 소실된 것을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겹처마 에 팔작지붕을 한 다포계양식으로

삼문이다. 근정문, 중화문, 숭정문과 달리 답도를 설치하지 않았다.

용마루의 양성 부분에는 오얏꽃 무늬 셋을 장식하였다.

 

3-3. 명정문(보물 385호) 

       

 

       

  명정이란 밝은 정치로 ‘밝은 정치 여는 문’이란 의미

        창경궁의 중문 겸 명정전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

  지붕으로  다른 궁궐의 그 것과 성격, 형태가 비슷하다.

 

  다만 공포가 내3충목 외2출목인데 안으로 비깥쪽 하나를 생략했고

  합각 머리 아래쪽 천장의 짜임세가 특이하다.

  천정은 연등천장, 겹처마로 각 지붕마루는 취두,용두, 잡상을 배열했다. 

 4벌대 장대석으로 높게 기단을 쌓아 둥근 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3-4. 숭정문

     

 

 

숭정문은 숭정전의 정문으로 정면3칸 측면2칸으로 단층 팔작지붕의

건물로 높은 기단을 쌓아 월대를 만들어 왕궁으로서 위엄을 갖추었다.

숭정문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봉황을 새긴 판석을 답도 계단에 배치하고

돌계단 양쪽에는 왕궁을 지키는 서수를 만들어 두었다.

경종. 정조. 헌종이 숭정문을 지나 승정전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3-5. 중화문

   

 

 

대한문 안 금천교를 지나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오른쪽으로 꺽어져

중화전의 정문인 중화문이 남향으로 건립되어있다.

특이한 점은 황궁인 데도 중화문에 이르는 길에 어도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것. 원래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에 들어가는 정문에는 원래는

좌우로 행각이 늘어져 있었으나 1904년 함녕년에 시작된 원인모를 대화재

로 전각들과 소실 된 후 현재는 중화문 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중화문 기단 앞에는 건물 세칸에 맞추어 돌계단을 4단으로 놓고

그 가운데 칸 부분에 서수 두 마리로 어계를 형성 했고

그 가운데는 답도를 설치 했는데 다른 궁궐과 달리 판석에는 쌍룡이 새겨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인 중화문은 둥근 초석에 두리기둥으로 세웠

는데 단층의 약점을 보안함인지 기둥이 유난히 높다.

각 칸마다 가운데 기둥 영에 두 짝씩의 판 장문을 달았는데, 어칸의 문짝이

좌우 칸보다 키가 크고 폭도 넓다.

공포는 다포계이며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며 팔작지붕이다.

 

 

4. 법전

 

   

 

4-1. 근정전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왕의 즉위, 문무백관의 조하(朝賀),

진하(陳賀) 등 하례(賀禮)를 비롯한 국가적인 의식을 거행하고,

법령(法令)을 반포하는 곳으로, 때로는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공식적인

중대한 의식을 행하던 궁궐의 가장 중심이 되는 법전인 전각이다.

*전각명: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진다 이것은 필연의 이치라 하여

‘근정이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이라는 뜻으로 정도전이 서경의 예를 들어

명명함. 치조의 중심이 되는 전각. 장대석 2중 기단 위에 1단을 더 쌓고

정면5칸 측면5칸 통층구조로 된 높은 천장에 다포계양식의 팔작지붕을

가진 아파트 8층 높이다.

*근정문(국보 223호):

 근정전의 3문형식 치조의 정문으로 중앙은 어도, 좌우 편문인

 일화문은 문관이, 월화문은 무관이 드나들었다.

 이 문은 출입구 역할 외에 왕비나 세자의 책봉. 옥새의 인수, 문과 전시,

 군사훈련의 지휘 등 이 행해졌고, 상당한 세자도 이 문앞에서

 즉위식 거행 후 법전의 옥좌에 앉았다.

*조회:

  근정전에서 정기적으로 치르는 행사로 임금에게 문안을 드리는 엄숙한 의식

  으로 의례는 근정문 중앙에 암향한 어좌의 좌우에 향안을 설치하고 흥례문 안에

  악대를 설치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박석:

  조정의 바닥에 깔아 놓은 얇은 돌을 박석이라한다.

  표면이 거칠게 다듬어진 자연 형태의 화강암의 박석은 발걸음을 조신스럽게 내딛게

  하고 얇은 가죽신을 신은 대신들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위한 배려, 또한 거친 표면은

  빛의 난반사를 막아 주었다.

*품계석 -

  어도 좌우 문.무관의 신분에 따라 자리하는 9쌍의 표석(총24개)

*차일고리 -

  조정에서의 행사 때 햇볕을 막아주게 차일을 칠 때 끈을 매기 위한 장치.

*드므:

 드므는 물을 담아두는 큰 통으로, 원례는 상하 월대에 구 개씩 내 개가 있었으나

 지금은 두개만 남아 있다. 이 드므의 물이 화재 초기에 불씨를 제압하기 위해서다.

 불에 대한 긴장감을 늦추디 말라는 상징적 성격의 물건이다.

*정:

 정은 왕권이 상징이다. 원래 정은 고대 중국에서 쓰덩 세 개의 발을 가진 솥인데

 주로 제사 그릇으로 이용되었다.

 솥은 9개의 주에서 모와온 청동으로 만든 정이라하여 구정이라고 했고 이것이

 중국 고대 완권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부시-

  철망 그물로 비들기 등 날짐승이 깃들지 못하게 함이다.

  이 들의 똥은 목제에 치명적인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새들이 드나드는 것 막는다. 

*월대

 근정전은 두 층늬 동기단과 그 위에 외벌대 댓돌에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습니다.

 이 돌 기단이 월대이다. 임금이 이곳에서 일식과 월식을 관찰했다 해서 월대라고도 합니다.

 상월대에는 왕족이나 측근들이 , 하월대에는 악공들이 자리하거나. 잔치 때 무희들이 춤을

 펼치기도 합니다. 옆 월대는 시종이나 별시위(궁궐 방비를 위한 비정식 특별호위대)들이

 도열하는 공간입니다.

*십이지신

 십이지신상은 신라시대 왕릉 호석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데 하늘로 떠나간 임금을 수호하는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이 신상들은 죽음의 셰게와 관련된 것으로  산 사람의 공간인 궁궐에

 신상이배치된 곳은 근정전 뿐입니다. 이신상들은 거룩한 인금의 세계에 사악한 기운을 막고

 근정전을 신성한 천상의 세계로 드높여 떠받드는 장치입니다.

*사방신 * 서수. 서수가족:

 월대에는 사방신과 십이지신상이 한 쌍씩 마주 보도록 앉아 있다.

 사방산은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받쳐주는 상징적 짐승이다.

 사령 사수라고도 한다.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부현무가 그것이다.

 월대의 동남, 서남 돌출부분에는 서수 가족이 자리를 잡고있다.

 새끼를 품에 안고 엎드린 자세로 땅에 붙어있는 서수 부부는 매서운 눈망을로

 길게 시선을 던지고 있는 모습이다.

천상의 세계구성 : 사방신-공간 . 인의예지. 청룡.백호.주작.현무7숙

십이지신- 시간. 승천한 임금의 수호 상징물

*답도:

 답도는 임금의 가마가 위로 떠가는 관석이다. 답도에는 봉황을 새겼다.

 봉은 숫컷, 황은 암컷이다. 봉황은 태평성대를 이루면 나타나는 길조이다.

*이월오봉병 . 이월오악도.일월곤륜도

 어좌 보개 뒤로 좌우 대칭 구조 병풍 음양사상. 길상관념

 천계(해.달), 지상계(산.폭포), 생물계(소나무)의 보호로 왕조의 무궁한

 발전과 태평성대를 바라는 염원 담겨있다.

*칠조룡

황룡 중 칠조룡의 품격이 가장 높다 (황제)

천정에 한 쌍이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 조각되 있음

음양+오행, 천지인+사계절, 북두칠성 - 우주만물의 중심인 왕의 권위

제후국 자처한 조선이 청의 영향력 벗어나려는 대원군의 염원

    

인정전

 

 4-2. 인정전

인정전은 창더궁의 정전입니다. 조선시대 궁궐은 3개의 문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다. 인정전은 조회와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던 전각으로

즉, 왕의 즉위식, 와국 사신 접견, 책봉식 등이 있습니다.

인정전의 넓은 마당을 조정이라하고, 가운데 3개로 난 길은 어도, 오른쪽 문관,

왼쪽 무관의 길입니다, 양쪽으로 품계석이 늘어서 있는데

문무백관 이 자신의 위치에 따라 설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여기서 조선의 관직에 대해서 일 수 있습니다.

품계는 전1품부터 종9품까 지 문무양반제로 18품계입니다. 

품계석을 보면 정1품-종-정-종2품 나오다가 4품부터는 정만 있는데

종4품부터는 어디에 섯을까요? 그냥 정4품 옆에 서면됩니다.

참고로 과거에 장원하면 종6품 관직이 부여됩니다.

 

정3품 이상을 당상관, 이하를 당하관이라 했고 당상관 이상이 어전회의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인정전 용마루에 다른 궁궐의 정전 용마루와 다르게 오얏꽃 문양이

붙어있는데 순종 때 그려졌을 것이라는 추정, 동궐도에는 오얏꽃 문양이

없다, 이문양이 일제강점기에 생긴 것으로 보아 2가지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조선왕조를 그냥 이씨가 세운 하나의 가문

정도로 여기도록 조선왕조를 비하하기 위해 이씨를 뜻하는 오얏꽃을

붙였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오얏꽃 문양을  ‘순종 때 국새의 인장으로도 쓴

것을 보아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문양이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정전 내부를 보면 임금님의 자리인 용상과 임금을 상징하는 이월오악도

가 있습니다. 일월오악도는 언제나 임금님 뒤에 따라다니는 그림인데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 폭포,파도, 소나무가 그려진 그림으로 해와

달은 왕과 왕비를 5개의 산봉우리는 조선의 국토를 폭포, 파도,소나무는

영원히 변치않는 생명을 의미하고 임금의 권위를 나타냄과 동시에 동시에

조선왕조가 영원토록 지속되기를 바라는 의미의 그림입니다.

천정에는 봉환이 날고 있는데 봉황은 태평성대에만 나타난다는 상상의

새로서 덕이 있는 임금이 다스리면서 태평성대가 오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실내장식도 당시 개화기 때의 영향으로 1908년 전등을 설치했고, 문도

황실을 상징하는 노란색입니다.

인정전을 보시면 2층이지만 안을 보시면 하나로 뚫인 구조입니다.

이런 양식를 중층구조라 합니다.

일반적인 궁궐의 배치는 정전뒤에 편전과 내전이 존재해야하는데 창덕궁은

지형상 인정전 뒤편이 동산으로 되어있어 화계와 담장을 꾸몄습니다.

우리조상들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을 집의 한 부분으로 생각해서

그냥 놔두었기 때문입니다.

 

명전전

 

4-3. 명정전(보물 226호)

* 창경궁의 법전.정전

* 이궁으로서 문무백관의 조회(조참.상참)받음.  등 국가적인 의식 거행 

   외국사신 접견  등 공식적인 중대한 의식 거행.

* 월대와 층계석 . 박석. 품계석

* 왕비 맞이 의식 거행 : 왕-구장복  왕비 - 적의(꿩 수놓은)

* 전각 양쪽행각 -영조: 재실   정조: 친위부대  장용병 설치

* 전각내 우물천장 장식과 보개장식 : 중천 나르는 두마리 금빛 봉황과 구름

조선의 법궁은 유교경전 주례 고공기 궁궐배치 원리에 따라 3문3조의

배치로 궁궐 정문과 법궁 사이에 경복궁의 흥례문 창덕궁의 진선문 처럼

문 하나를 더 두지못하고 2문3조의 형식을 취하여 옥천교를 지나 명정문을

통과 하면 바로 창경궁의 정전이며 법전인 조정에 들어서게 됩니다.

조정 바닥은 장방형의 박석이 깔려 있고 다른 법전처럼 어로 좌우에 품계석

( 문.무반 12개씩) 배열됐습니다. 1907~1909년 사이 일제의 음흉한 공원화

사업으로 박물원화 될 때 박석을 들어내고 꽃을 심었는데 복구 시 박석이

많이 없어지고 산지의 돌이 부족해 제대로 복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로 끝에 각각 장대석을 3벌로 깔아 상하월대를 만들었는데 난간을 두르지

않고 단순한 간결구조로( 경복궁과 비교시)했고, 이중 계단 중앙에는 판석에

봉황을 새긴 답도를 놓았다.

본전 전각은 단층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위엄.체면 보다는 단아함이 돗보임

이는 성종15년(1484년)에 대비(정희.소혜.안순왕후)들이 거주할 이궁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건물 좌향이 동향(유자묘향)인 이유도 같다.

창경궁 창건 당시 성종은“ 임금은 반드시 남향을 면하고 다스리는 법인데

창경궁은 동향인지라 임금이 정차하는 곳이 아니다“라고 하셨다고 했다.

정각 정면 좌우에 세짝씩 창호를 둔 것과 정면 양 끝에 전돌로 머름을 한

것이 특이하고 툇간 처마밑에 지붕을 얹어 빈양문까지 복도각을 만든 것이나

전각 내 어탑 뒤 일월오악병으로 장식하고 보개 한 복판에 두 마리 봉황과

구름을 새기고 그 위 천장에는 용대신 봉황과 구름을 따로 조각해 매단 것도

특이 하다.

명정전은 국운의 쇠약으로 박물관 전시시설로 치욕의 질곡을 겪었으나,

그래도 현존하는 궁궐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17세기 목조건물을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로도 평가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인종이 이곳에서 즉위했고 인조는 즉조당에서 즉위 후 이곳에

서 하례를 받았다.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 민씨가 장호원으로 피신하였던바 대원군이 서둘러

황후의 승하를 선포 이곳 전각을 망곡처로 삼았다 한다.

   

 

 

 

4-5. 숭정전

승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연회,

사신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지는 곳이다.

숭정전은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10년)경에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로 이전

하였고 현재는 동국대학교 안의 정각원이라는 법당으로 쓰이고 있으나

건물이 낡아서 이전이 어렵게되었다.

숭정전은 그 후 1980년에 경희궁터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1985년부터

다섯 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이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승정전

2중 기단을 근거로 1980년부터 6년에 걸쳐 경희궁의 본래 숭정전

자리에 복원하게 되었다.   

 

4-5. 중화전

    

중화전

 

원래 중층으로 건립되었으나 1904년 대화재로 단층으로 1905년 재건

되었다. 당시의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사실상 법전으로서 제 역할(왕의

즉위식)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1907년 7월 20일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면서, 이곳 중화전에서 양위식을 개최하였으나

고종과 순종 모두 불참하였다.

조정의 행각이 모두 잘려나가고 일부만 동남쪽에 남아 있다.

*박석

*품계석

*정   : 왕권 상징

*드므 : 방화수  벽사

 남동쪽 드므에는 태(泰)․평(平)․만(萬)․년(年)․국(國)이,

 남서쪽 드므에는 수(壽)․만(萬)․세(歲)․희(囍)․성(聖)자가

 시계방향으로 각각 새겨져 있다.

*일월오봉병

 

 5. 편전      

 

 

 5-1. 사정전

경복궁의 편전으로 , 창덕궁의 선정전 창경궁의 문정전과 같은 기능과 용도

사정전 편액의 '사정'의 의미는 “천하의 이치란 생각함으로 얻을 수 있다.”

하여 치자의 본분을 깨우치려함에 두고있다고 한다.

    근정전 뒷기단을 내려가 사정문 을 들어서면 장대석 4벌로 기단을 쌓고

둥굴게 다둠은 초석위에 두리기둥으로 세운 이 전각은 당초 보평청으로

불리웠었다. 임금이 재위기간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정무를 보는

사정전의 동쪽에는 소편전으로 만춘전, 서쪽에는 천추전이 자리를 잡아

편전의 일곽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사정전과 달리 이 소편전들은 중앙에 머루방과 양쪽에 온돌방을

갖추웠다. 지금은 독립적인 잔각이지만 원래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건넌방

을 가던 이동했습니다. 훼손되기 이전에는 궐내각사인 수정전으로 통하는

복도각도 달려있었습니다.

사정전에서 보는 정무는 공식성이 강조되는 반면 이 소편전은 임금이

편하게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는데 이용했다고 합니다.

남향인 사정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 단층 겹치마 다포계 팔작지붕

으로 연결된 계단 오르면 내부 마루바닥 .용상. 일월오악병풍. 우물반자

채색 천정. 운룡도가 보입니다.

4조 쌍용 채색그림 운룡도는 용이 기운을 토해 구름을 타지 않으면

신령스러워질 수 없드시 용과 구름은 불가분의 관계 즉 어진 임금과

현명한 신하들은 용과 구름과의 관계로 신하를 현명하게 만드는 것은

임금님의 능력, 현명한 산하가 있어야 임금은 더욱 현명해진다는

뜻이며, 또한 임금은 유능한 신하를 만나야 백성을 잘 살게 할 수 있다는 것.

편전은 공식적인 일과 즉 조회, 국정 현안 보고 받고, 회의주재, 신료접견,

경연을 통한 학문과 소양 축적. 소편전은 만춘전은 편전의 명칭에서 보여

주드시 , 봄의 소생, 시작, 희망, 부활. 풍요의 의미가 짙어 왕실과 조정에

봄 기운이 만년토록 지속되기를 기원하는 소망을 담은 전각으로 주로 봄철

이용했고 , 천주전의 천추란 천년세월을 뜻하듯 불망천추 왕권과 왕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소망이 담긴 전각이다. 가을 .겨울철에 사용됐으며

임진왜란 이전에는 문화의 요람으로 세종 때에는 서행각으로 수정전과 연결

되어 있어 세종의 자문기관인 수정전의 집현전 학사들과 자주 만났다고

     합니다.

    * 경연과 서연 그리고 고강

      임금이 공부하는 것을 경연이라 하고 왕세자가 공부하는 것을 서연이라 했다.

      임금님은 하루에 3번을 공부해야 하는데 아침에 하는 공부를 조강, 낮에 하는

      공부릉 주강, 저녁 공부를 석강이라했다.

      왕세자는 어릴 때부터 교육을 철저히 받았는데 이는 좋은 교육을 받은

      왕세자가 현명한 임금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왕세자의 공부한 내용을 평가하는 공식적인 시험을 고강이라고 합니다.

      세자를 교육하는 기관인 세자시강원에서 5일에 한번 고강을 실시하였는데

      시험결과는 곧 바로 왕에게 보고 되었으나 어릴적부터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다고 볼 수 있겠읍니다.

      영조처럼 임금이 장수하게되면 왕세자는 대리청정이란 과정을 받는데

      그 또한 길어지면 불신이 서로 쌓일 수 밖에 없으니 화변이 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상감은 정말로 힘든 자리입니다. 현명해질 수 밖에 없고(?)

 

     * (만춘전)

       사정전의 보조 전각이다.

       세종 때에 나타난 만춘전은 주로 봄철에 이용한 것으로 알려짐.

만춘전

 

  * (천추전)

    불망천추, 천추만세라는 왕권, 왕족이 무궁한 발전을 기웡하는 마음을 맘은 전각.

천추전

 

 

5-2. 선정전 

 

 

  창덕궁 편전. 신하와 국사 논의. 조선후기 임금은 희정당을 선호함. 

  조선 초기에 창건되어 오랫동안 편전(便殿)으로 이용되다가 조선 후기에

  내전의 희정당을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별로 활용되지 못하였다.

  당초에는 조계청(朝啓廳)이라는 건물이었는데 1461년(세조 7)에 선정전으로 개명하였다.

  이 건물에서는 왕과 왕비가 크고작은 행사를 벌였는데,

  성종 때 왕비는 이곳에서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고 친히 누에를 치는 일을

  모범으로 보였으며,   왕이 주연을 열기도 하였다.

  인조반정 때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적에 소실된 것으로 추측되며,

  1647년(인조 25) 창덕궁 중건 때 다시 중건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 1674년(현종 15)에 수리한바 있고, 1803년(순조 3) 12월에 선정전 서행각이

  소실된 것을 이듬해 12월에 복건한 것으로 추측. 장대석 3벌로 월대를 쌓고

  상부를 모난 박석을 깔아 마무리하고, 양끝에 드무(넓적하게 생긴 독)를 놓았다.

  월대 위에는 장대석 한벌대의 기단을 쌓고 원형의 다듬은 돌초석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내부 앞쪽에만 고주(高柱)를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면·후면과 측면 어간에는 띠살창호의 4분합을 달고,

  측면 전후 툇간에는 2분합을, 동·서 전툇간과 후면 동측칸에는 2분합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문정전

 

5-3. 문정전

창경궁의 편전. 정전과 달리 자좌오향. 복도각으로 명정전과 연결되었음.

경복궁의 사정전처럼 왕이 경연이나 집무를 보는 공간이었음

문정의 뜻은 ‘정사를 밝힌다’는 뜻으로 인재를 얻는 것이 근본이라는 것

정면3 측면3칸 규모의 단층 다포계 팔작지붕.

장대석 3벌로 기단 쌓고 한 벌 더 깔아 2중 기단 위 네모초석.기둥

일제의해 철거된 것 1986년 재건. 그러나 회랑 복원 못함

특히 왕대비의 혼전으로 활용이 특히 많았다(왕후 8위).

왕과 왕비의 장사를 마치고 난 뒤 종묘에 입향할 때까지 신위를 모시는

공간이 필요했는데 이 공간을 혼전이라 함.

영조의 첫비 정성왕후 위폐를 모신 혼전으로 (휘령전이 불림) 사용함.

영조38년 임오화변.

경덕궁에 머물고 있던 영조는 첫째 왕비의 위페를 모신 휘령전에 자주

들림(장수로 비를 먼저 종묘에 못 모심) 사도세자와 함께 참배하곤했는데

노론측의 비방과 모친 이씨의 고변으로 세자를 불신하던 영조가 불참을

이유로 칼를 내려 자결토록 명했음 결국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에 가두라 명함

사도세자 뒤주 갇혀 사망.( 큰 뒤주 홍씨 부친 홍봉한 아이디어).

포도대장 이종성으로 하여금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감시. 더위와 갈증으로

득세한 노론측이  세자(소론 측)에 결정타. *정성왕후 서오릉 홍릉. *한중록

사도세자(28세)는 조선왕국의 최장수 왕 영조의 정적제거 대상 됨.

 

 

5-4. 덕홍전

 

 

경운궁 편전. 고종 외국사신 고위관료 접견. 온돌x 마루. 내부 붉은색

양탄자. 전등설치. 전통한옥 건물에 내부의 구조와  장식을 서양식으로 꾸밈

최초 전기 건청궁 경운궁 1901년 설치.

 

5-5. 자정전

 

 

 

경희궁의 편전 국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보며 ,회의나 경연을 여는 공무수행를

수행하던 곳이다. '자정'- 정사를 돕는다.는 의이다

광해군9년 시공~ 3년 후 1620년 완공. 숙종 승하 후 빈전 사용. 선왕들

어진 위폐 임시 보관. 정문 자정문. 정면3 측면3칸 정방형 팔작지붕

마지막 정무처리 철종. 1908-1010년 일제 경희궁 전각 뜯어낼 때 뜯김.

서울시 발굴 행랑바닥 사용 전돌 발견. 동문-여춘문 .서문- 의추문

 

 

6. 침전

    내전으로 왕과 왕비가 일상 거처하던 곳으로 경복궁의 경우 왕의 침소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이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도 내전에 있는데 대왕대비의 거처이다. 이외 후궁의 거처도 마련되어 있다.

       

강녕전

 

6-1. 강녕전

* 임금의 정침 내전 으뜸 정각 . 경복궁의 정중앙

* 월대 -월대까지 어로 연결. 원래 천랑. 왕실의 연회시설

* 홍범구주-치세원칙 5번째: 황극 -강녕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 황국을 세우는데- 일없이 편안히 쉬는 것

* 침소: 온돌로 앞.옆 3칸씩 9칸(위자모양)의 정중앙 방

* 5침소 연생전.경선전 , 연길당. 응지당- 오제성 대원군

* 고종2년(1865년) 중건. 정면11칸 측면 5칸 단층 무량각 팔작지붕

  1917년 불탄 창덕궁 복구 자재 이용 -희정당 1996년 복원공사됨.

 

여기부터 내전이 시작된다.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구역,

왕의 침전으로 연조의 으뜸가는 전각이다. 정면 11간, 측면 5간의 큰

건물로, 정도전에 의해 이름 지어진 강녕전은<書經 洪範>에 나오는

壽, 富, 康寧, 攸好德, 考終命의 인간의 오복 가운데 세 번째로 그 전

체를 대표하며, `임금이 바른 자세로 마음을 닦으면 오복을 누리고

임금이 오복을 누리면 혜택이 백성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동소침과 서소침이라 부르는 연생전과 경성전이 있어 봄에 싹트고

가을에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

임금이 백성에게 어짐으로 싹트고 올바름으로 거두어야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연길당과 응지당을 합하여 강녕전은 다섯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넓고 높은 월대는 임금이 가족이나 종친들을 위하여 생일잔치를 열어줄

때 악공이나 무희들의 무대가 되었다.

월대의 소맷돌에는 삼태극(天地人)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좌우에 있는 넓은 온돌방은 내부가 우물 井자 모양으로 나뉘어져 있어

중앙의 가장 큰 방을 왕의 침소로 썼는데 왕이 자는 방에는 가구를

아무 것도 두지 않았다.

지붕의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設이 있으나 어느 것도 정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교태전과 함께 헐리어 창덕궁의

희정당과 대조전을 짓는데 쓰였고 지금 건물은 1995년 복원된 것이다.

※ 근정전: 북극성/ 사정전 건물 세 채: 해 달 별/ 강녕전의 다섯 채: 오제좌

   교태전: 음양/ 강녕전 : 오행(木金火水土)

즉 무극-  음양- 오행- 삼태성(생명)-오좌제성(정부) - 북극성

  : 신성의 이미지 부여

 

6-1.-1. 건청궁과 곤녕합     

 

  건청궁은 단청하지 않아 일명 백골집이라고 부른다.

  건물에 단청을 하게 되면 나무의 표면에 얇은 막을 입히게되고 이것이 습도아 벌레들로부터

  나무를 지켜주는 역활을 한다. 그러나 요즘과 달리 옛날에는 단청의 색을 만들기 위해서는

  천연의 염료를 많이 구해야 했는데 천연 염료는 구하기도 어렵고 값도 비쌋기 때문에 나라

  에서는 궁궐이나 관청 이외의 민가에서는 단청을 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제하였다.

  이 건천궁은 다른 궁궐 건물과는 달리 일반 사대부의 집처럼 지었다.

 

  건청궁은 사랑채, 안채, 행랑채를 갖춘 구조로 되어있다.

  건청궁의 고종은 숨가쁘게 변천을 거듭하는 국제정세를 온몸으로 감당하면서 고통스로운

  생활을 했던 곳이다.

  건청궁은 역대 임금들이 초상화를 봉안하다는 명분을 내세운 흥선대원군의 지시로 고종10년

  (1873년)에 지어졌다.

 

 

     건천궁은 1873년 조선조 역대 임금의 어진을 보관힝 목적으로 지어졌으나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간인 을미사변이 있기 전까지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고종은 건청궁을 내탕금으로 건립했다.  고종의 흥선 대원군의 대리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선언한 1873년에 지어졌다.

     곤녕합은 명성황후의 침전이다.  곤영은 '땅이 편안하다'는 뜻으로 왕비의

     덕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금성의 곤영궁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추정

 

6-2. 희정당

     

 

 

원래 왕의 연구실인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 때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비좁은 선정전이 종종 국장에 사용되면서 희정당이 또 다른

편전으로 활용되었고, 왕의 침실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의 희정당은

연산군 2년(1496년)6월에 불타서 없어진 것을 8월에 중건하여 12월에 이름을

고쳐 불렀다. 이 때부터 편전으로 이용했다고 본다.

순조30년 왕권회복을 위해 안동김씨 세도세력과 싸우며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가

이곳에서 아깝게도 급사한 곳으로 동궐도에서 희정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전면에 자동차 승하차를 위한 현관이 마련되고, 내부는 유리창과 전등,

근대적 화장실을 설치하였고 바로크풍의 가구를 갖추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희정’의 의미는 ‘ 정사를 밝혀 백성을 접하니 백성이 충정을 다하고 혜택을

입지 않은 이가 없다‘ 뜻으로 실내의 두 채색화는 영친왕때 해강 김규진이

그린 ‘금강산 만물 초승경도’와 ,‘총석정 절경도’가 입니다.

     

환경전

 

 

6-3. 환경전

*환경전은 성종15년(1484년) 창경궁이 창건되었다

 임금과 왕비의가 거처하는 침전으로 건립되었으나 주로 왕과 세자가 거처함 

통명전, 경춘전, 양화당과 함께 창경궁의 내전을 구성하는 전각임.

1544년 중종이 환경전에서 승하하신 것으로 기록되는 데 의녀 대장금의 이곳에서 

중종의 중풍을 치료와 계비의 출산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1592년 임진란시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때인 1616년에 다시 건립되었다.

인조반정의 주역이었던 이괄이 1624년에 난을 일으켜 또 다시 전소되고

말았으며 1633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1830년 순조 즉위 30년에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3년에 다시 복원한 것이 지금에 이른다.

인조의 소현세자가 이곳에서 승하했음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이후 인질로 청에 잡혀가 서양문물을 배우고 돌아왔

으나 인조와 고관들의 반목으로 현실에 적용해보지 못하고 세자는 독살 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배구고두례의 한과 부자간 권력다툼?).

또한 순조 시 대리청정으로 능력을 보였던 효명세자가 승하한 곳으로

빈전으로 사용 시 큰 화재로 이 전각에서 불이 났고 당시 재궁만을 가까스로 구해냈다고 함.

영조시절 임금이 잠시 이곳에서 정무를 봤으나 환경전은 특히 왕후의

빈전으로 사용된 적이 많았다.

내전의 침전으로 완비와 대비가 주로 사용했던 경춘전과 환경전을 구획

하는 서행각에는 집의문이 있었다.

영조는 이곳을 편전으로 사용하였으며 영조 5년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고 정무보고를 받았습니다.

동궐도에 의하면 함인정과 환경전 사이에 사조세자기 대리청청했던

공묵각이 서행각을 거느린 담장과 함께 표현되어 있습니다.

*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앞 가운데 1칸 방은 개방했고 ,

편액은 문양이 8가지로 다양합니다. 처마는 부연을 달아 겹처마로 구성했고

팔작 지붕에 각 마루는 양성하였으나 잡상을 배열하지 않고 용두와 취두

를 얹힘. 평면은 대청 온돌방 및 툇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현재는 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6-4. 함녕전

    

 

경운궁 고종황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침전 사용. 전화기 설치

1904년4월 대화재 덕수중 일대 잿더미 만듬. 온돌과열 . 잉측 전시화보.

온돌구조상 과열 불가 방화의심. 전소후 중명전 거주, 12월 재건

함녕전 두 개 침실. 동쪽 서쪽(후궁). 명성와후 시해 이후 왕비 안둠.

일제 주야 감시.위협. 헤이그밀사 특파 강제퇴위. 1818년 승하 독살 의심.

함녕전은 두 개의 침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동쪽은 고종이, 서쪽은 후궁이 사용했습니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왕비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덕수궁에는 중궁전이 없습니다. 고종은 이곳에서 일본인들의 감시를 받았고, 또

그들의 위협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위협 속에서 일본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로 퇴위당한 뒤 1919년 승하하게됩니다.

 

 

6-5. 태령전    

 

 

태령이란 형통하고 편하다는 뜻이다. 영조의 어진 보관하던 왕실의 사당.

본래 특별한 용도를 지정하지 않았던 전각이었다 함..

영조20년(1744년) 증수 어진 봉안. 영조 승하 후 혼전 사용. 고종 어진보관

서울시 서궐도안의거 정면5 측면2칸 건물 복원. 정문 삼문인 태령문

 

침전(중궁전)

     교태전일곽으로 경북궁에서 가장 깊숙한 공에 위치해있다.

     교태전은 왕비의 공간으로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잉태되는 산실이다.

     그리고 교태전 일곽은 새종 이후에 마련된 전각이다.    

 

 

7-1. 교태전

양의문 솟을 삼문을 들어서면 왕비의 시어소(편전.침전), 즉 내명부의 일을

살피는 한편 일상생활을 하는 중궁전인 교태전 일곽에 들어서게된다.

* 규모.연역

장대석 4벌로 기단을 쌓고 네모초석,네모 기둥으로 세운 정면9칸 측면

5칸 무량각 팔작 지붕의 건물이다.

세종 31년 기록에 ‘함원전. 교태전..은 내가 세운 자그마한 집’라는 말이

나오 듯 세종 이후에 건립된 것 같다.

원래의 전각은 1917년 창덕궁 대화재 후 헐려 대조전 복구 때 사용됐고

지금의 전각은 1990년 중건된 복재품(터무늬 없어)이다.

* 구조

본채의 외부는 강녕전과 비슷하나 내부는 단출하여 가운데 3칸 마루를

깔아 대청을 놓고 그 좌우로 각각 2칸에는 온돌방을 배치했다.

좌우 온돌방에는 위자 모양의 칸막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방은 정사각형

나머지 방은 좁고 긴 형태였다고 한다. 툇간은 앞뒤만 있습니다.

* 교태의 의미. 기능

주역 64괘 중 11번째 태괘(만물의 생성.번영 의미)는 곤 위 건 하로

하늘과 땅이 뒤바뀐 형태로 자연스럽게 뒤섞임(남녀의 교합)이 일어남을

뜻한다. 이는 이곳이 왕조사회의 근본(왕자 잉태)이 시작되는 곳임을 의미.

* 특이점

음양의 조화를 뜻하는 교태전의 정문 양의문은 여닫이 대문이 아니라

경첩이 있어 안에서 한법 접고 열 개된 걸쇠문입니다.

그리고 왕비가 구중궁궐 속에 있음을 고려하여 교태전 뒤뜰에 아미산을

조성하고 계단식 화계를 만들어 꽃밭. 괴석과 석련지를 배치하여 월궁을

실현시키려했습니다.

*아미산 *화계  * 괴석 * 석련지 * 아미산 굴뚝

교태전의 정문은 양의문으로 음양의 뜻이 강녕전 일곽이의 오행(다섯 정각)

등의 우주원리로 표현되고 그것이 치조구간 즉 정치공간으로 이어지도록하는

의미(세상 이치에 맞는)가 있습니다.

* 양의문:

 양의란 양과음, 하늘과 땅이다.

 임금이 양이고 왕비가 음이다.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양의문 밖의 강녕전은

 남성이 공간이다.

 이 문을 들어서면 교태전, 곧 여성의 공간으로 바뀝니다.

 무극에서 진화한 태극에서 음양이 생성되는 순간이다.

 이 문의 걸쇠는 당연히 문 안, 곧 교태전 쪽에 있다. 합궁하기 위해 방문하는

 임금도 중궁에서 걸쇠를 풀어줘야 들어강 수 있습니다.

 

 

7-2. 대조전    

 

 

창덕궁의 왕비의 침전으로 이곳은 왕 이외에는 어떤 남자도 드나들 수 없는

전각이다. 대조전의 ‘대조’라는 말은 공 또는 큰 것을 만들어 냄 이라는 뜻을

가짐.

이말의 뜻은 지혜롭고 현명한 왕자를 생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조전은 대궐의 중앙에 있어 중전 혹은 중궁전이라고도 한다.

희정당의 바로 북쪽에 있어 임금이 정사를 본 후 침전으로 들어 갈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침전이므로 온돌방이 여러개 있다.

대조전은 침전이므로 많은 임금들이 이곳에서 타계했다( 성종, 인조, 효종 등).

 

 

"동궐도"서 보면 , 대조전 북쪽에 동서로 집상전과 경훈각이 나란히 있다.

집상전은 대조전과 거의 유사해 고루삼문의 무량각이다. 용마루가 없다는 것은

왕비와 비슷한 여인의 침소란 말이다. 마당에는 세개의 괴석이 놓여 있다. 

집상전은 왕비의 처소로 효종의 왕비이자 현종의 모후인 인선왕후 장씨가

경덕궁 집희전을 헐어다가 옮겨 지었다 한다.

숙종 때에는 왕대비 명성왕후 김씨가 이곳에 거쳐했다.

 

 

지금의 대조전 전각은 일제강범기인 1917년 화재가 나서 전소한 것을 재건.

그런데 당시가 일제하라 기본적인 구조는 이전과 같지만 복구 공사를 맡은

일제의 주도로 인해, 실내 장식, 채광, 통풍, 배수방법 등이 맘대로 서양식으로

바뀌었으며 또 공사 중 부족한 목재를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서 사용했다.

원래의 대조전과 현재의 대조전이 다른 점은 우선 위치가 원래 보다 북쪽에 있다.

왜냐면 집상전을 헐고 그 자리에 대조전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조전의 정문인 선평문도 한칸에서 세칸으로 확대되어 훨씬 북쪽으로

옮겨졌다.

원래는 지붕 중앙이 양옆보다 높은 솟을 지붕으로 고루삼문 형식인데 지금 것은 직선이다.

 

* 자경전 일곽

 자미당터 : 교태전의 연휘문과 건순문 앞은 확 트인 잔디밭이다.

 예종이 20세 젊은 나이로 눈을 감은 38칸 규모의 자미당터이다.

-자경전(보물 809호)

 자경전은 대비전이다. 승성대원군이 정성을 다해 지어서 신정대비에게 헌정한 전걱이다.

 자경은 '어머니께서 복을 누린다.'는 뚯이다. 흥성대원군에게 신정대비는승통의 권력과는

 거리가 먼 자신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삼아 옥새를 넘겨준 은인입니다.

 나이 많은 대비의 취향에 맞춰 검불을 털어냈다. 둘레는 행각보다 담장의 비중을 늘렸다.

 궁녀로 북적대는 것보다 조용하게 여생을 지내라는 마음 씀씀이다.

 뒤뜰은 화계 대신 올곧은 담장을 두르고 십장생도를 부조하여 맘수무강과 왕실의 번영을

 바라는 웃전의 기대를 담았습니다.

 본채의 서쪽에는 ㄴ자 형태의 복안당을 덧대 겨울철에 대비하는 세심한 배려를 했습니다.

 복안당은 앞면 6칸, 옆면 2칸을 덧댄 부속시설입니다.

 목안당은 원래 넉넉한 필치의 편액을 달았으나 지금은 왠일인지 그 편액이 없습니다.

 복안당은 청연루와 대응해 대비가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신정왕후는 자경전 보다 아담한 복안당에서 주로 거처했다고 전합니다.

 

7-3. 통명전(보물 818호)      

 

 

창경궁은 대비들이 거주공간을 목적으로 창건되었기에 내전 전각 경춘전,

통명전 그리고 후궁 처소 영춘헌.집복헌 등의 명확한 성격구분이 모호하나

대체로 창덕궁의 대조전과 같이 내전의 으뜸 건물로  통명전은 중궁전

왕비의 시오소(편전 겸 침전)로 구분된다.

성종15년(1484년)에 지어졌고 서거정이 명명했다. 1592년 임진왜란시에

전소되었다가 복구 후 다시 1616년 광해군 8년 이괄의 난에 또 전소되었고

또 전소되는 이이 있은 후 순조33년에 중건된다.

중종과 인형왕후 민씨의 빈전으로도 쓰였고 숙종 다음 경종은 편전으로도

시용했다는 기록이 있음.

마당에 박석을 깔고 장대석을 3벌로 쌓아 규모있게 월대를 구성하고 장대석

1단을 더 쌓아 기단을 놓고 네모 초석 네모 기둥인 정면7 측면4칸 규모

단층 무량각 팔작지붕 건물이다.

인경궁의 청와전을 옮겨와 지었다고 한다. 창경궁 내전 건물 중 유일하게

깊이 20척(6m)의 월대, 그 영측 모서리에 드므를 놓았고

건물 서쪽에 연당을 조성했다. * 통명전 주위 지대가 낮아 습하고 비기 오면

물이 넘치므로 연당을 조성하고 화강석으로 물길을 내고 돌난간을 두루고 그위로

돌다리를 놓았다. 샘에서 나온 물은 화강석 물길을 따라 흘러 연못으로 떨어진다.

사람을 배려한 공간구성 배치로 전각 주변에 굴뚝, 화계, 장독대를 거치했던

숙종시 숙빈 최씨가 아꼈던 어천인 열천이 있다.

‘통명이란 통하여 밝다.’는 의미로  음과 양이 두루 통하고 하늘의 밝음이

깃든다하여 왕과 왕비가 함궁시 사용했던 내전의 으뜸 건물이었다. 

나라가 반석위에 얹혀 백성에게는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것으로

“옥황상제의 중전”이란 의미도 있다고 한다.

숙종 때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민씨 사이에 폐비 및 사사

사건이 있었는데 인현왕후가 사후 , 왕비를 저주하는 흉물을 통명전 주변에

묻은 것이 발견되었고, 또 숙종이 총애하던 숙빈최씨 독살사건이 고변되어서다.

또 다른 사건은 갑신정변 시 김옥균과 내통한 무수리가 통명전에 폭약을

터트린 사건이 있었는데 이무수리는 명성황후의 시녀로 37세의 늦은 나이로

들어왔음에도 불구 궁안의 비밀을 외부 누설한 것도 밝혀져 공개 처형당함.

역사의 질곡을 겪은 전각으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1907년부터

통감부의 창경궁 공원화 계획에 의거 전각의 아궁이를 막고 온돌을 들어내어 우물

마루를 깔아 박물관으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지금의 통명전 내부는 텅비고 방도 없다. 마루도 우물마루로 조잡스럽다.

1900년도의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고주가 남아있는 그 동편이 동온돌이고 고주 서편이 서온돌이었다.

대조전 등의 왕비 침전과 같은 구도였음을 알 수 있다.

 

7-3. 양화당

    

 

 

통명전의 동쪽으로 나란히 위치한 양화당은 왕이 주로 사용하였던 곳으로

정면6칸 측면 4칸 규모로 초익공 양식의 팔작지붕 전각입니다.

팔작지붕의 마루는 취두와 용두를 장식했다.

특이하게도 양화당 추녀마루에는 잡상을 하나만 올려놓았습니다.

기단을 이중으로 쌓았고 양화당 뒤 언덕은 통명전 건물 뒤 화계와 이어져 있고

여가를 이중으로 얹은 굴뚝 2기가 서있습니다.

명종이 독서당 문신을 불러 시험을 보기도 했으며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

몽진했던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한 후 환도 하여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또한 철종의 비 철인왕후 김씨가 고종 15년에 이곳에서 승하하였습니다.

수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유독 양화당만 꿋꿋이 살아남아 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7-4. 융복전

     

 

     순조대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서궐도안」을 보면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

     동쪽에 두 개의 침전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배치되었다. 융복전은 회상전 동쪽에 있다.

     융복전 앞쪽에는 일영문(日永門), 뒤쪽에는 개경문(開景門)과 회화문(會化門)이 있다. 

     경희궁의 내전 영역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융복전과 회상전 주변으로는

     덕유당(德遊堂), 집경당(集慶堂), 흥정당(興政堂), 영선당(永善堂), 사현합(思賢閤),

     정시합(正始閤) 등이 배치되어 있다.
     정조가 지은 「경희궁지」에는 융복전이 경희궁의 정침(正寢)이고

     회상전은 임금이 거처하는 내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궁궐지』에는 회상전이 궁궐의 정전(正殿)이고

     융복전은 회상전의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7-5. 석조전    

 

 

석조전은 1900년(광무 4년)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을 맡았던

영국인 브라운이 주도하여 건축을 시작하였다.

애초에는 경희궁에 지울 예정이었으나 브라운의 주장에 따라 현재의 위치에 짓게됨.

이유는 영국 공사관이 이웃했기 때문으로 생각됨. 석조전 건축을 주도하면서

영국인의 설계와 기술자들이 영국의 물품을 들여다 지었다.

그러나 1905년 노일전쟁   이후 일본인 메가다가 재정고문으로 오면서

석조전 건축의 주도권은 그에게 넘어가 1909년 완성됨.

석조전은 19세기 초 유럽에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양식 을 보입니다.

석조전은 대한제국 시절 외국 사신들의 접견실로 사용되었으나

고종의 사후 경운궁이 황페해지는 과정에서 석조전도 일본 미술품 진열 전시장으로

일반에 게 공개되었고 1937년 그 옆에 석조전 서관이라는 양식건물이 더 들어서

이왕직 박물관으로 쓰이기 됨

이후 1946년 일제로부터 해방된한반도의 장래를 논의하기 위해 이곳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모스코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등을 논의하기위해 설립되었는데

이곳 석조전에서 첫 예비회담이 열렸습니다.

 

** << 추가 >>

8. 궁궐의 공간 배치

   모든 궁궐은 정치공간, 왕실의 생활공간, 궁중 관청의 행정공간으로 나뉜다.

   정치공간을 치조라한다.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조회를하는데 이를 정전, 또는 법전이라 한다.

   정치공간에는 임금과 신하가 직접 만나 정사를 논의하고 집행하는 집이 있느데

   이를 편전이라 부른다. 경복궁의 사정전, 창덕궁의 선정전과 희정당, 창경궁의

   문정전 등이다. 편전에는 마루와 방이 있어, 앉아서 정사를 논의했다.

 생활공간은 연조, 침전, 내전이라 부른다.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 대비, 후궁 등이 이곳에서 살았다.

 대체로 침전은 정치공간 뒤에 배치했는데, 경복궁의 강녕전, 교태전이 그런 경우다.

 그러나 창덕궁의 생활공간은 정치공간의 동북쪽에 있다.

 대조전이 그러한데 이는 창덕궁의 지리적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대비나 세자의 거처는 임금의 편전에서 더 동쪽에 자리했다.

 한편 궁중 관청의 행정공간은 외조 또는 궐내각사라 했다.

 외조에 속하는 관청은 비서기관인 승정원, 대신들의 회의를 같는 빈청, 임금의 사명과

 고문을 맡은 예문관과 홍문관, 내시가 거쳐하는 내반원, 의약을 맡는 내의원(약방),

 국새 등을 담당하는 상서원, 궁중음식을 맡는 사옹원, 왕실의 의복과 장신구를 공급하는

 상의원, 궁중의 수비와 군사 명령을 전달하는 내병조와 선전관청, 말을 담당 관리하는

 태복시 등이다. 외조는 대체로 정치공간의 서쪽과 남쪽에 배치되었다.

 

* 

 

      참고서적

       1. 신 궁궐기행 2004. 이덕수 (주) 대원사

       2. 궁궐에 담긴 표정들 2004 장세우 (주)대원사

       3. 창덕궁과 창경궁 2003 한영우 효형출판

       4. 덕수궁 2009 안창모 도시출판 동녘

       5. 궁궐의 장식 2013 허균 돌배개

       6. 문화유산 해설 2015 황금희 궁궐문화원

       7. 서울의 궁궐 건축 2002 김동현 (주)시공사

       8. 한국의 고궁 2005 신영훈  도서출판 한옥문화

 

     * 2016. 5. 21.  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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