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을 다시 본다.
김동욱 (경기대학교 교수)
세계가 격찬한 수원 화성의 치밀함
오늘 주제는 수원 화성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문화재는 다섯 개입니다. 종묘,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창덕궁도 있지만 특히 수원 화성은 다른 유적에 비해 그 규모가 크고, 덜 소개된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유로는 이렇습니다. 종묘는 제사지내는 대표적인 유적이기 때문이고, 불국사는 신라때 대표적인 불교문화이기 때문입니다. 또 해인사 장경판전도 세계에 자랑할만한 불교 인쇄물이라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궁으로는 중국과 다른 양식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창덕궁을 선정하게 된 것입니다.
한편 수원 화성은 우리나라가 성곽이 많은 나라로 알려져있어서 대표적인 성으로 선정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서울 성곽과 수원 화성이 비슷하지만 서울 성곽은 도로정비 등으로 성곽을 다 헐어내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 수원 화성을 선정한 첫 번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수원 화성은 성벽자체로 보면 거의 90%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돌을 어디서 가져오고 누가 어떻게 쌓고 하는 등의 성곽건립에 대한 시시콜콜한 기록들까지 잘 보존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곽으로서는 손색이 없다고 생각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선정위원회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유네스코 이사회에서 스리랑카 건축교수가 우리나라 현지조사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수원화성이 이 백년전 그대로냐?"고 물었습니다. "수원 화성이 있던 자리는 6.25때 치열한 격전장이었기 때문에 많이 부서졌고, 박정희 대통령때 국방유적 복원사업을 하면서 수원 화성 복원사업을 하였다고 했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런데 외국인들의 생각으로는 '문화유적은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옛날 건물을 지금에 와서 다시 만든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문화 유산을 파손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던 것이죠.
유럽으로 여행을 가보면 그리스의 유명한 신전들이 무너지고 부서진 상태 그대로 놓여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베니스 헌장'에 의해 '문화유적은 후대에 자꾸 복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두자'라고 유럽인들 끼리 정해놓은 것입니다.
때문에 유럽에서 생활을 했던 스리랑카 조사단원에게는 당연히 유럽에서 본 문화유적에 관한 가치기준이 들어 있기 때문에 다시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동양은 서양의 석조건물과는 달리 그냥 두면 않되는 목조 건물이 대부분이며, 1백년만 지나도 기둥, 석가래 등이 썩어가나 그대로 둘 수 없다." 그래서 "다시 손보고 만드는데 필요에 따라 복원도 하는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수원 화성은 2백년 전 공사를 하면서 정확한 기록을 남겨놨기 때문에 원래 모습대로 복원할 수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당시 공사기록을 상세히 남겨둔 '화성성역의궤'를 토대로 그대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림으로부터 모든 것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이 책을 보더니 "원더풀!, 원더풀!"하면서 "성곽 하나를 쌓으면서 이렇게 충실한 책은 처음 봤다."하더군요. 동양에서 성곽을 쌓으면서 이렇게 정교하게 옮긴 책자가 있다는 것에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유네스코 본부에 좋게 평가서를 제출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약간의 문제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유네스코 본부로 돌아가서 "보전상태가 아직 완벽하지 않은 부분도 있기 때문에 수원 화성은 문화유산보존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수원시장께서 스위스로 가서 "책임지고 미비한 것을 복원하겠다."고 다짐을 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수원 화성은 당시 손 볼 것도 많고 성안의 도심에 사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문화재 보존으로 인해 시민들이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불이익을 받더라도 지키자는 시민의식이 많이 확산되어 다행히 잘 보존될 수있었습니다.
철저히 계획된 조선시대의 신도시 '수원'
그럼 수원 화성이 어떤 점이 중요한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수원은 원래 정조대왕이 수도를 수원으로 옮기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그에 따른 풍수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런데 효성의 이야기, 천도설, 풍수설 조금씩 다 문제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옛날의 어떤 책에 의하면 수원의 성곽을 부친에 대한 효심으로 정조대왕이 지었다는 얘기를 써놓은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효심이 작용을 했겠지만 원래 수원은 지금의 오산 수원대학이 있는 용주사 자리가 수원고을이 있던 자리입니다. 그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지금의 자리로 강제로 이주시키고 그 옆에 성을 쌓았지만, 멀쩡하던 고을을 효심 하나 때문에 이주시키고 성을 쌓았다는 것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천도설 역시 근거가 전혀 희박한 말인 듯 합니다. 수원은 성각안의 규모가 서울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고 서울의 인구가 모두 이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뭔가 와전되어 전해지고 있는 듯 합니다. 풍수 지리설은 더 근거가 없습니다. 수원은 풍수 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서울은 무학대사가 풍수에 의해 좌청룡 우백호의 위치로 자리잡은 도시이지만 수원은 풍수가 아니고 다른 목적과 의도로 지은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분당이나 일산 처럼 계획된 신도시였던 것입니다. 수원은 지금 용주사가 있고 융릉, 건릉이 있었던 곳이 원래의 수원 고을 자리였습니다.
현재의 융, 건릉 매표소에서 조금가다 보면 재실이 보입니다. 그 재실이 옛날 수원의 관아 자리였습니다. 관아건물을 고쳐 재실로 썼는데 바로 그곳이 원래 수원 고을이었던 것이죠. 2백 여년 전 어느날 나라에서 명령이 떨어졌고, 그때 수원 고을에 2천 명 정도가 살고 있었는데 이주명령에 의해 북쪽으로 한 5Km정도 올라가 팔달산이라는 곳 주변으로 집단이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대신 이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상비를 주었다고 합니다.
사도세자의 무덤은 현 시립대학 옆 배봉산에 무덤을 쓰고 그 후 정조가 왕이 되어 사도세자의 묘를 다시 쓰는데 수원 고을의 뒷산이 알아주는 명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로 옮기고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은 지금의 팔달산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두 달후에 무덤을 옮기는 일을 하고 정조가 직접 내려와 절을 하고 올라가는데 왕이 오기 전에 신도시 수원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조대왕의 왕권강화와 수원 화성
최근까지 정조가 수원을 옮긴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효심은 하나의 구실이며 수원 화성은 왕권 강화를 위해 계획도시로 지어진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18세기 당시 서울 유기전의 경제력과 대응할 수 있는 상권을 형성하기 위해 서울 종로와 같이 수원에도 종로 사거리를 만들어 놓고 그 곳에 서울과 같은 거대상권을 형성하여 경제력이 막강한 도시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중에 왕이 이곳의 상권을 장악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획은 정조가 한 것이 아니라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이미 필요성이 주장된 바 있었습니다.
물자가 서울로 집중되는데 수원이 충청도, 전라도에서 물자가 올라가는 곳이으므로 여기서 상권을 형성해 장악하면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상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아울러 수원은 당시 너무 작고 밑에 있기 때문에 산과 넓은 들판이 있는 북쪽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도 함께 반계수록에 적어 놓았는데 정조대왕이 그 책을 보고 결정한 것입니다. 그에 따라 13년 동안 준비를 하고 신도시를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상권을 장악하고 왕권강화를 통한 개혁의 발판으로 수원을 계획했던 것입니다. 왕이 물러나 있더라도 군사가 있어야 하므로 맨 먼저 한 일이 왕의 호위군인 장용영의 절반을 수원으로 보낸 것입니다.
수원 화성을 쌓기로 결정을 한 뒤 그 설계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다 당시 31살 된 다산 정약용에게 성곽 설계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물론 정약용은 설계를 해본 적이 없는 학자이기 때문에 왕이 왜 설계를 맡겼는지에 대해 의문입니다. 수원 화성은 조선에 있는 일반적인 성곽과는 다른 성곽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실학적 사고가 깃든 화성의 건축적 특성
수원 화성은 담이 낮은 읍성이나 산성의 개념보다 읍성을 높고 튼튼하게 쌓아 여기서 버티도록 하자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외적의 침입으로 인해 산성으로 도망갈 힘이 있으면 읍성을 튼튼하게 만들어서 여기서 지키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원의 성곽을 쌓을 때 산성 등의 축성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신진 학자에게 이것을 맡겨서 외국의 선진적인 성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하면 튼튼하고 영구적인 성곽을 쌓을 수 있는지 연구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성곽을 쌓게 했던 것입니다. 왕실에 있는 여러 가지 책들을 보고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성곽의 장점을 많이 참고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앞뒤로 성벽을 높이 쌓는 중국의 축성법도 참고했습니다.
거기에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서 밖에서는 높고 안에서는 흙을 조금 돋우면 밖이 내다보이는 우리 성의 특징과 장점을 살리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 대신에 서울의 성곽들처럼 성문을 하나만 짓고 그냥 성벽을 둘러친 것이 아니라 성벽에 올라오거나 접근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곳도 만들고 유사시 공격 시설도 만들게 되었습니다. 워낙 취약한 곳이 성문이기 때문에 성문을 이중으로 쌓기도 했습니다.
또한 화재발생시 불을 끌 수 있도록 방화수도 준비하는 준비태세도 갖추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중국에서 가져온 다양한 서적을 통해 새롭게 디자인 해서 만들게 되었습니다. 벽돌 이용한 것도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당시 실학자들은 벽돌집을 짓자고 줄기차게 주장을 했습니다. 18세기 당시에는 나라의 큰 목재들은 벌목으로 인해 많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큰 재목을 주로 쓰는 관리들이나 양반들은 걱정이 없지만 백성들은 집 짓는 것부터가 걱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벽돌집은 흙으로 지으면 되기 때문에 실학자들은 '나라에서 벽돌을 굽기 위한 가마를 지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관리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수원 화성을 쌓을 때 실학자들이 그 공사에 대거 참여하게되었습니다.
실학자들은 '이번 기회에 벽돌을 적극적으로 축성에 이용하면 벽돌 굽는 가마도 많이 생기고 차츰 벽돌이 보급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벽돌을 여러 곳에 활용하였습니다. 벽돌을 구울 때에 송진을 넣어서 표면이 까맣게 된 것을 '전돌'이라고 하는데, 그 전돌을 가지고 새로운 구조물도 만들었는데 건물의 기둥은 목조로 하고 벽은 전돌로 쌓아 만들기도 했던 것입니다. 처음 하는 시도였지만 굉장히 성공적이었습니다. 벽돌로 된 구조물도 2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버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원 화성 축성에서 꼭 기억 해야하는 것이 '거중기'입니다. 중국에서 들여온 책 중에서 서양 선교사가 쓴 과학서적에 보면 '도르레'가 있습니다. 힘의 원리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힘이 적게 들고 일의 능률은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지금의 기중기와 같은 장비를 고안했던 것입니다. 거중기는 도르레가 위에 4개, 아래에 4개가 있어서 그 곳에 돌을 달고 양쪽에 서 물레에 끈을 달 수 있게 하였습니다.
실제로는 성벽 위까지 돌을 올릴 수 있는 실용적인 기계였던 셈입니다. 또한 돌 싣는 수레도 만들었는데 백성들이 돌을 지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고생을 덜어 주는 목적도 있었지만 또 하나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18세기쯤되면 도저히 장비를 쓰지않으면 안될 상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초기에 백성들에게 강제 부역을 많이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8세기쯤에는 백성들의 의식이 점차 사회의 변화에 따라 강제부역의 논리가 먹히지 않았고 부역도 많이 사라져갔습니다. 수원 화성 축성 때에는 인건비도 많이 들고 일의 속도나 능률이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정약용선생이 거중기를 이용해 2년 반만에 길이 5.5Km되는 성벽과 이제까지의 성벽과는 다른 튼튼한 방어력을 가진 새로운 성곽을 쌓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성곽으로 둘러쌓인 도시 안에 상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격식있게 지어진 성곽의 특징
그림을 보시면 팔달산이 있고 나머지는 평평한 들판이 있고 북쪽의 문과 남쪽의 문이있습니다. 북쪽의 문으로 나가면 서울이 나오고 남쪽으로 가면 충청도, 전라도로 가는 교통의 요지로서 그 곳에 도시를 만든 것입니다. 열십자로 모이는 곳에 종로가 있고 큰길따라 개천이 흐르고 여기에 정조 대왕이 나중에 내려와 머물고자 했던 '행궁'이 있습니다.
또한 서울의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대포를 장전했다가 다가오는 적들을 퇴치하도록 한 부분도 있습니다. 성곽이 약간 들어가 있는데 이것 역시 서울의 반듯한 성벽과는 다릅니다. 배가 부르지 않도록 만들고 성벽 군데 군데 불룩한데 이것은 근처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서쪽에 팔달산이 있어서 산에서 부터 내려가서 감시할 수 있는 시설 등이 다른 성곽에서 볼수 없는 형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성문마다 한겹 더 울타리를 쳐서 문에 직접들어 오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했습니다. 북쪽에 서울로 향하는 정문인 북문이 있고, 북문 역시 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 한번 더 겹을 쌓았습니다.
화성을 축성할 당시 서울 못지않게 중요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서울 남대문 지붕을 보면 '추녀마루'라고 부르는데 용마루라고 그냥 쭉 내려와 있습니다. 수원의 문도 쭉 내려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긴 문이 서울의 남대문, 동대문하고 수원의 장안문, 팔달문 밖에 없습니다.
다른 보통 문들은 '박공'이라고 해서 판대기나 돌로 막고 있지만, 수원의 북문과 남대문만이 긴 추녀마루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긴 추녀는 북경의 천안문이나 자금성 같은 권위있는 곳에만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원 화성이 얼마나 권위있고 소중하게 지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수원의 총책임자는 수원부 유수인데 그 벼슬이 정2품으로 오늘날의 장관과 같았습니다. 조선시대의 지역책임을 맡은 정2품은 한성판윤과 수원유수, 그리고 서울을 지켜야 하는 강화 유수가 있었으며 광주, 개성 등지가 종2품이었습니다. 지방으로가면 4품, 5품 등으로 내려갔습니다. 화성이 그만큼 격식을 높이고 계획적인 도시로 꾸며져서 천도설이 나온 것도 같습니다.
한편 성문 옆에 있는 방어시설을 살펴보겠습니다. 좀 특이한 모양으로 '돈대'라고 불리는데 일종의 망루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돈대의 안은 비어 있고 빌'공'(空) 마음 '심'(心)을 써서 '공심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속은 온돌방도 있고 군사 숙직실도 있습니다.
또한 나선형 계단을 만들어 중간 중간에 돌출되어있는 곳은 감시를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다른 곳과 연락하기 위해서 다섯 군데에 연기를 피우기도 했습니다. 군데 군데 비밀통로가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성벽 높이는 돌로 만들고 위는 전돌로 쌓았다는 것입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치수와 계단위치 등이 상세히 나와있습니다.
새로운 시설들은 전돌로 쌓았습니다. 우리나라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포루가 있는데 대포와 총구 그밖에 여러 가지 군사시설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한쪽에 물이 지나가는 곳에는 아치를 만들어 물이 지나가는 길을 만들고 한적한 경치를 꾸미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경치좋은 곳에 가면 언제나 정자와 누각이 있듯이 이 곳에도 정자와 누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각은 형태가 특이합니다. 'ㄱ자'로 꺽이면서 안에 다시 돌출 부분이 생겨서 지붕부분이 다시 복잡한 형태를 가지는 것이 이 누각의 큰 특징입니다.평면도 불규칙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조건물에서 벽돌건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특징들도 보입니다. 목조로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벽돌을 가지고 메꾼 모습들이 그러합니다. 그 중간 모양을 재미있게 만들어 놓기도했습니다.
동그란 아치문을 내고 목조기둥 사이에 벽돌을 채우고 벽돌부분은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십자형의 모자이크 모양을 살려두었던 것입니다. 검게 보이는 부분이 벽돌이고 하얗게 보이는 부분은 회와 모래, 진흙을 섞어 모자이크 부분을 만든 것입니다. 벽돌을 많이 쓰지 않은 모습에서는 모던한 면도 보입니다.
화성은 18세기 문화예술의 정수, 아끼고 보존해야
수원은 성곽으로서 만들어진 것도 큰 의미가 있지만 성곽이 완성된 이후에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당대 최고의 회갑연을 개최한 부분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당시 서울서부터 엄청난 행렬이 장관을 이루며 수원으로 내려왔습니다. 지금은 여덟 폭의 병풍에서 그 모습이 남아있습니다.
사진으로 보시는 것은 한강을 넘을 때 모습입니다. 옛날에는 다리가 없고 배를 임시로 연결 해서 배위에 널빤지를 깔아 행차를 갈 수 있었습니다.그리고 당시 수원에서는 노인들을 위해 수원에 사는 노인들을 모셔다가 경로잔치를 베풀기도 했습니다. 산꼭대기에서 군대사열을 하고 밑에 행궁에서는 또 다른 행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사열식을 했던 건물이 서장대 라고 하는 건물입니다. 서쪽 산꼭대기에는 군사지휘소 건물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김홍도가 그린 그림으로 서장대와 행궁이 있고 중간에 성벽과 방어시설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수원화성은 그 당시 18세기로서는 회화라든지 환갑잔치에 대한 문화적인 행사 또 축성기술 이런 것이 하나로 모인 종합예술장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제시대에 와서 많은 화성의 건물들이 훼손되기 시작했습니다. 6.25때 폭격으로 장안문의 문루가 떨어져 날라가기도 했습니다. 그 후에 이 건물들을 다 철거하고 여기를 도립병원이 쓰였는데, 지금은 이 곳을 행궁으로 복원을 하고 병원을 짓느라고 완전히 없앴던 것을 하나 하나 찾아서 옛날 사진이나 기록을 토대로 새롭게 꾸미고 있습니다.
다행히 화성의궤에 그 기록이 잘 남아 있었던 덕분이지요. 현재 수원 화성은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많이 관심 속에서 계속 복원되고 있습니다. 역사가 깃든 아름다운 문화재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켜내려는 노력들이 절실한 때라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 1999년 3월 11일 월례강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