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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나/미술관련

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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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후 추존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네는곳이다

민가의 사당을 家廟라하고 왕가의 사당을 종묘라 한다.

종묘는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총면적 5만 6503평. 서울 종로구 훈정동1번지에서 와룡동 2번지에 걸쳐있다.

원래는 정전(正殿)을 가리키며,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중국의 우(虞)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종묘제도는 상(商)·주(周) 시대에는

7대조까지 묘(廟)에 봉안하는 7묘제가 시행되다가

명(明)나라 때에는 9묘제로 바뀌었다.

한국의 경우

종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392년(고구려 고국양왕 9)에 보이며,

신라에서는 5묘제, 고려에서는 7묘제로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5묘제도를 따르다가 중기 이후부터는 치적이 많은 왕은

5대가 지나도 정전에 그대로 모셨으며, 그 밖의 신주는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는데, 이를 조천(祧遷)이라고 하였다.

종묘의 정전에는 19실(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 신주를 모셨으며,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및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의 신주를 모셨다.

신주의 봉안 순서는 정전의 경우 서쪽을 상(上)으로 하고 제1실에 태조가

봉안되어 있고,

영녕전에는 추존조(追尊祖)인 목조(穆祖)ㆍ익조(翼祖)ㆍ도조(度祖)ㆍ환조(桓祖)를

정중(正中)에 모시고 정전과 마찬가지로 서쪽을 상으로 하여 차례대로 모셨다.

이를 소목제도(昭穆制度)라고 한다.

또한 종묘의 허한 지세를 보완하기 위해 가산을 쌓고 담장을 들렀습니다.

 

종묘의 조영(造營)은 1394년(태조3년) 12월 태조가 한양(漢陽)으로 천도할 때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동쪽에 영건(營建)을 시작하여

다음해 9월에 1차 완공하였다.

1419년 제 2대 정종이 승하하고 정종의 신주를 부묘하는 문제가 생기자

1421년 정전 서쪽에 별묘를 세우고 영녕전이라 하였다.

1546년 신실이 부족하여 정전에 4실을 중축하여 11실로 확대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1726년(영조1)년 정전 동쪽으로 4칸을 중축하여 15칸으로 늘리고,

또 1836년(헌종2) 정전 동쪽으로 다시 4칸을 중축하여 현제와 같은 19칸이 되었다

영년전은 동서 협실 각 2칸을 늘려 현재 규모와 같은 중앙 4칸 , 동서 협실 6칸이

되었다.

 

정전의 남문을 들어서면 문의 동쪽으로 공신당(功臣堂),

서쪽으로 칠사당(七祀堂)이 있고, 곧바로 정전에 이른다.

정전의 서문을 나서면 영녕전의 동문과 이어지고, 영녕전에도 정전과 같이

서문·남문·동문이 있으며, 영녕전의 북동쪽에 제기고(祭器庫)가 있다.

정전의 북동쪽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있고, 그 주위에 제정(祭井)·판위대(版位臺)·

수복방(守僕房)이 있으며, 정전 남동쪽에 재실(齋室)이 있다.


종묘 전각 약도

 

하마비

 

大小 人員 下馬碑

“여기서 부터는 지위의 높낮이 없이 모두 말에서 내려야 한다.”

현재의 하마비는 헌종 때 세워진 것이라 하며 덕수궁 대한문을 지나

금천을 건너기 전 좌측에 보이는 하마비가 현존하는 전부입니다.

 

금천교

   

명당수이며 속된 마음을 경계하고 정결케하여 조상을 만나는 정화수이다.

 

어정

 

하마비 왼쪽 편 안쪽에 위치한 우물로

임금이 종묘제례를 지내기 위해오면 마셨던 어정입니다.

가뭄에고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재정과 마찬가지로 지하철 공사로 인해 현재는 수맥이 끈긴 상태입니다.

 

외대문

               ( 종묘 전면 입구 측)

 

              ( 홍살문 안쪽 신도 측)

 

종묘의 출입문으로 외삼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창엽문으로 불렸는데 창엽이 27획이어서 조선왕조가 27대에 막을

내렸다는 풍설이 있다. 신성한 곳을 상징하는 홍살문으로 하였으며 당청도

화려하지 않게 석간주 칠만 하였습니다.

   

 지당

 

  지당의 조성 원리는 천원지방으로 ‘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는

의미를 담아 지당은 네모나게 만들고 지당 안에 둥그런 섬을 만들었다.

또한 이 섬에는 제사공간을 의미하는 향나무를 심었습니다.

종묘에는 재실의 남서쪽, 망묘루 서쪽, 종묘의 정문안 동서쪽에

연못이 있습니다.

 망묘루 서쪽과 정문 서쪽의 방당(方塘)에는 중앙에 각각 원으로 된

조산이 있읍니다.

이방당과 원산(圓山)은 천원지방 사상으로 우주를 의미합니다.

 

망묘루


망묘루는

신주를 모신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이 이룬 업적과 나라를 생각하는

곳이다.

최근에는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도서관으로 활용 중이다.

 

향대청

 

신을 모시기 위해 불사르는 향과, 제사의 뜻을 고하는 축,

신에게 예물을 올린 폐를 보관하며, 종묘 제사에 사용하는

예물과 제관들의 제복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또한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여기서 대기하였다.

 

 

재궁 일곽


임금이 목욕재계를 하며 의복을 정제하여 제사준비를 하던 곳이다.

임금은 7일전부터 몸과 마음을 닦아 준비하고 이곳에 옵니다.

어숙실 또는 재궁이라고도 하며 북쪽엔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재실이 있다.

제사는 새벽 1시에 시작합니다.

정전 제향 때 제궁의 서협문으로 나와서 어로를 따라 정전 동문 앞에

이르게 됩니다.


 

         (어재실  드므가 있다)

         ( 어재실 모란 병풍 )

          ( 위-어목욕청 , 아래- 소여)  

          ( 세자 재실 )

 

 

전사청 일곽

 

     ( 전사청 )


전사청은 종묘제례에 사용할 음식을 장만하는 곳입니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로 건물을 사각형으로 배치하였습니다.

마당에는 제상의 올릴 음식을 차려놓고 검사하는 곳인 찬막단과,

제사에 바칠 소, 양, 돼지를 놓고 제수에 적합한지 검사하는 곳인 성생위가 있다.

소, 양, 돼지의 일곱 부위를 각각 한 근씩 베어 날로 올렸다고 합니다.

소는 검은 소를 쓰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인조 16년 4월16일 이후부터는

황우를 썼는데 흑우가 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제정

  

제정은 전사청 동쪽에 있다.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명수와 전사청에서

음식을 만들 때 제정의 물을 사용하였습니다.

현재는 지하철 1,5호선 공사 때 수맥차단으로 물이 메말라 있습니다.

 

수복방

  

정전 동쪽문의 담장에 잇대어 수복방이 있습니다.

이는 종묘신전을 24시간 지키는 사람이 거처하는 곳입니다.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하급관리들과 노비들의 처소입니다.

 

정전

 


정전은 처음에는 태조의 4대조 신주를 모셨으나 후에

당시 재위 왕의 5대조와 역대왕중에서 특히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종묘 정전에는 현재 19실 49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으며,

정전의 양쪽 길이가 70m, 좌우 협실과 월랑까지 전체건물의 길이가 101m로

우리나라 단일 건물로 는 가장 길다고 합니다.

 

정전출입문

  

     ( 위- 동편 출입문, 밑 - 서쪽 출입문

 

동문 - 왕, 세자, 왕실 가족 , 제관들이 드나드는 문

서문 - 노래와 연주, 춤을 맡았던 악공들이 드나드는 문

남문 - 신이 드나드는 문 , 신문이다.

 

 

동당이실(정전 신실내부)

 

외부는 벽체로 전체를 하나의 공간으로 하였고, 각 실 사이에는

발로 감실을 만들었다.

삼면에 황색 휘장을 들렀다. 신실 한 칸에는 왕과 그 왕비의 신주를

모셨다.

 

공신당

   

종묘 정전의 신문에 들어서면 오른편 동쪽에 위치합니다.

공신당은 국가나 왕실을 위하여 공을 세운 사람의 위폐를 모시고 있는 곳으로

위폐를 정묘에 배향하는 것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문에 큰 영광이었습니다.

역대 27대 왕중 복위왕 단종과 폐왕 연사군, 광해군은 배향공신이 없고

태조에서 순종에 이르기까지 83위의 공신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칠사당

 

일곱 신을 모셨으며,

계절마다 각기 다른 칠사위 신에게 제사를 올렸습니다.

봄에는 사명(생명), 사호(집안 출입), 여름에는 사조(음식), 중류(살 곳)

가을에는 국문(사라의 출입 주관), 공려(형벌 주관), 겨울에는 국행(도로 주관)

에게 제사하는 사당으로 토속신앙과 유교사상이 합쳐진 것입니다.

 

영녕전

   ( 정전을 나와서 영녕전으로 가는 길 )

 

    ( 중앙 태실에는목조.익조.도조.환조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 영녕전 남문 )


영녕전은 정전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전에서 모셔온 신위를 모셨다고

하여 별묘 또는 조묘라고도 합니다.

공덕이 있는 왕은 불천위라고 하여 세실로 지정되어 영원히 정전에 남게되지만,

그 외에 공덕이 없는 왕은 정전에서 조천하여 신위를 영녕전에 모시는 것입니다.

세종 때 정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에 태실이 부족하므로

정전에 대한 별도의 사당을 세워 태조의 4대조인 목조.익조.도조.환조를

함께 모시고 그 후 정전에 계속 모시지 못하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모두 16실에 34위의 신주가 모셔져있음.

 

약공청



종묘 제례시 악공과 무희들이 대기하던 장소입니다.

정전의 악공청은 12칸, 영녕전의 악공청은 3칸 건물입니다.


 

악공청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남문으로 들어가는 신도와,

동문으로 가는 왕부자의 갈림길 지나쳤읍니다.


Y자 모양의 가운데가 신도로 좌측으로 외길로 연결됩니다.


 


2016.5.02. 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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