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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나/나의 이야기

쓰시마 해전(동해해전 소고)

 

 

포탬킨호

**

*

쓰시마 해전(러일해전)

 

배경

러시아는 전제정치와 대외적인 팽창정책을 통해 강력한 전제군주로 군림했던

이반4세 바실리예비치(차르)가 죽고 후계자 계승 문제로 귀족들간 다툼과 혼란을

겪은 후 1623년 러시아 전국회의에 의해 미하일 로마노비치가 새 황제로 선출되니

로마노프1세다.

미지의 땅인 시베리아 우랄산맥 동쪽으로 펼친 산림과 통토의 주문을 푼 로마노프

왕가(1613년~1917년)의 14번째 군주인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니콜라이2세)는

1860년에 건설된 블라디보스토그 군사 전초기지에서 1891년 5월31일 열린 대

시베리아횡단철도 기공식에 참석한다.

1891년 리홍장-로바놉조약체결로 전시 중국항구 이용과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중국

동부 철도 연결권을 얻었고, 1898년에는 랴오뚱반도 남쪽 끝 지역을 강제차입하고

뤼순항과 하얼빈 연결철도 건설권도 받아내, 군비확장을 통해 중국북부로 진출하려는

일본정책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된다.

 

한편 일본은 1867년 대정봉환에 의해 조정이 왕정복구를 선언하고 서남웅한을 중심

으로 메이지 신정부를 수립하고 에도를 도쿄로 개칭 수도로 삼고 급속한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꾀해 문명개화라고 불린 구미의 기술과 제도를 직수입 산업의 근대화를 추진

제1차, 제2차 산업혁명을 달성하여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다.

대륙진출과 제국주의 국가로 변신을 도모하는 일본은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대대적인

군사개혁을 단행하여 군사강국(특히 해군력)을 만드는 한편 1902년 영국과 동맹관계를

맺어 러시아 동맹인 프랑스를 견제했다.

전쟁쪽이 었던 국제상황도 러시아의 확장을 우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지지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목표로 한 군비확장 계획을 청일전쟁 시부터 시작했던 일본수뇌부

는 제10회 의회 확장계획을 통해 해군도 10년간 세계일류급 전함도 구비하게 된다.

청일전쟁에서 군 현대화 효과를 확인한 일본은 러시아의 속셈을 파악하고 피아의

병력 및 병참 상황을 고려 개전 시기를 앞당겨 1904년 2월4일 개전을 결정하게 된다.

 

개전

국가의 존망을 염두에 두고 총 2억1200만 엔의 예산을 투입하여 해군기지, 조선소,

군수공장을 마련하고 개전 직전까지 전함 7척, 순양함 35척, 어뢰정 90척, 구축함

19척을 갖추고, 탄약 공장을 마련하여 폭발력 높은 ‘시모세’ 폭약을 개발한 일본은

사세보항에 함대 본거지를 두고 해군의 훈련도 완벽에 가깝게 시행했다.

1904년 2월4일 수뇌부 어전회의의 행동결전에 따라 5월18일 러시아와 맺은

일체의 조약과 협정의 파기를 선언했다.

1904년 2월5일 대해령1호를 발령하고 연합함대의 사령관으로 도고 헤이하치로 해군

대장을 임명하여, 제1전함대를 직접 지휘하고, 기함 미카사, 제2전함대장에 가미무라

히코노죠 해군중장을, 기함 이즈모, 제3전함대장에 가타오카 시치로 ,기함 스마호,를

임명하여 제국함대를 3함대및 특무함대로 구성했으며, 진해만을 점령하여 쓰시마해협의

제해권을 접수하라고 명한다.

 

         [기함 미카사]

 

 

 

     [연함함대 사령관 도고 제독]

 

         [장갑순양함 이즈모]

전함 이즈모

 

 

 

1904년 2월8일 밤 여순항 러시아 극동함대를 기습 공격한다.

                [  여순항 ]

 

 

 

(극동함대는 뤼순과 블라디보스토크로 나뉘어져 있었고 여순항에는 조선소도 없음)

2월9일 새벽에는 제물포(인천)항에 피항 중인 카례이츠호 ,바랴크호 2척을 격침시킨다.

4월12일 ~13일 밤 폭풍우 속에도 뤼순항에 기뢰를 부설하여 13일에는 기함인 전함

페트로 파블로프스크호가 피격 당한다.

          [카례이츠호]

 

 

 

당시 뤼순항에는 스테셀 요세사령관이 이끄는 1만명 정도의 육군 병력이 있었으나

노기 마레스케가 지휘하는 일본 제3군에게 뤼순항 203고지를 내주어 항내 군함이

육상포 사격하에 놓이게 되고, 전함 미카사가 봉쇄한 뤼순항은 결국 1905년 1월2일

09:10분에 항복하여 대일본 해전의 전략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사실 일본의 기습공격은 극동함대와 발틱함대가 합류하여 일본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고 본국으로부터 증원병력을 파견하여 일본군을 제합하려는 러시아의 전략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조치였다.

 

대항해

러시아 해군성은 주력함대인 발틱함대를 제2태평양 함대로 개칭하고 3개의 전함

편대로 나누고 각 편대는 4척의 전함 편제로, 순양함을 순양함편대 및 정찰편대로

구성하여 28,800km를 항해하여 최초 뤼순항에서 극동함대와 합류의 명을 내렸으나

항해 도중에 변경되어 ,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잔존 제2 태평양 함대에 합세하여

일본의 대중국 주보급로를 봉쇄하라고 명한다.

 

      [ 발틸함대 이동로]

   

 

 

제1전함대는 함대 총사령관인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해군 중장이 최신형 전함

스보로프호, 보르디노호, 오렐호, 알레산드3세호와 신형 장갑순양함 올레크,

이줌루트호를 지휘한다.

    

     [ 총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

 

     [기함 수보로츠호  장교들]

 

 

      [기함  전함 수보로프 ]

전함 수보로프

 

제2전함대는 사령관 드미트리 구스타보비치 펠케르삼 해군소장이 전함인

오슬랴바호, 시소이벨리키호, 나바린호, 나히모프제독호를 지휘하고

엔크비스트 제독이 지휘하는 3척의 순양함 스베틀라나호, 젬추크호, 알마스호로

순양함부대를 구성하고, 예고리예프 대령이 이끄는 수송선부대를 예하에 둔다.

 

         [ 순양함 스베틀라나]

순양함 스베틀라나

 

 

 

제3전함대는 사령관 니콜라이 네보가토프 해군소장이 전함 니콜라이1세호,

아프락신호, 세냐빈호를 지휘한다.

    

             [ 전함 니콜라이1세]

 

전함 스베틀리나

 

 

    제1전함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리바우항에 있는 크론슈타트 해군기지를

1904년 10월15일 출발하여 --> 1904년 12월29일 마다가스카르 인근 생트마리에

도착했으나 독일이 연료보급 계약연장에 비협조로 2달반 지체 후 1905년 3월16일

본국으로부터 뤼순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목적지 변경 통보를 받고 노지배 섬을

출발 ----> 1905년 4월8일 말라카해협에 도달 --->동년 4월14일에 베트남 캄란항

도착한다.

 

제2전함대는 1904년 11월3일 탕해르를 출발 다음날 독자적인 함대 지휘군을

받고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본대와 합류하라는 명령을 수령 ---> 11월10일

크레타섬 수다 도착 , 수에즈운하 해로 100마일을 대서양에서 인도양으로 들어와

12월28일 마다가스카르 노시베에 도착하고 생트마리섬 북동쪽 해안 집결지에서 1906년

1월9일 본대와 합류한다.

 

               [수에즈운하 통과 ]

 

 

제3전함대는 1905년 2월16일 리바우항을 출발 1905년 3월25일 스에즈운하 도착

---> 동년 5월8일 말라카해협통과 ---> 5월9일 캄란항에서 본대와 조우한다.

 

러일의 동해해전에 앞서 양측의 전투준비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러시아 측

1. 함대 주력부대가 석탄을 주 동력연료로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를

도는 긴항로를 선택함으로 기후와 연료보급 문제로 여러번 항해가 지체되었고

결과적으로 석탄을 만적함으로 해서 보급품 및 탄약 비축량이 적어서 져서 원정

간 만족할만한 기동훈련 및 장비조작 ,사격훈련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2. 12월29일 마다가스카르 인근 생트마리에 도착했으나 연료보급 지체와

함상체류 및 풍토병으로 사기가 저하된 것에 더해서, 1월2일에는 뤼순항 함락

소식에 설상가상 1월16일에는 해군상 아벨란의 긴급명령으로 출항이 금지되어

뤼순항전에서 피격된 일본함정의 대대적인 정비.수리의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3. 함대사령관과 함장들 간 작전 토의에서 일함대와의 함전투에서의 비상한

상황을 고려한 지휘권 이양문제를 포함해, 초계, 위장 및 전대별 특수대형 등

구체적인 작전협의가 없이 블라디보스토크로의 피함에 한정되었던 것 같음

 목적항에 이르는 항로 상 3 해협은 : 대한해협, 쓰가루해협, 라페루즈해협이었다.

    [예상 항로]

 

*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는 것 외에 남중국해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거점을 마련하여,

남중국해와 황해를 통해 압박하는 것과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대만 근처에 거점을 장악

하거나 일본의 한곳을 점령하여 일본과 전쟁을 수행하는 방안이 본부에서는 거론됐다고

하나 정보부재와 병참문제로 실재로는 불가능 했다고 함.

 

4. 정보의 부족과 함정의 수적우세만 믿어 경계 및 위장 부실로 전함 선체도색이 

흑색 임에도 불구하고 함 연돌이 황색 페인트로 도색된 것을 다른색으로 도색

변경하거나 엄페시키지 않아 함포사격의 표적 역할을 하게 됐고,

전함 선체가 상갑판이 흘수선보다 좁은 텀블홈 방식으로 건조되고 얇은 장갑으로

피복되어 파고가 높은 경우 격렬한 포격전으로 피폭되면 침몰 우려가 있었으나

격침된 전함이 이전 전투 시 거이 전무했고 뤼순항 전투에서도 없었던 것을 믿고

맹목적으로 포망을 뚫고 블라디보토크로 피함시키려 했다,

이점이 치명적 맹점으로 작용한다.

 즉 함전투 보다는 강속 운항을 위해 석탄을 많이 실어 복원력이 낮은 상태

, 홀수선 1m 이상 초과 시 과적상태로 본다 , 대량적재로 2m 깊어졌었다,에서

하베이강이 둘러지지않은 선체 수선하부까지 대마도 해협의 높은 파도로 인해

드러나게 되 결과적으로 피폭시 전함들이 침몰로 이어졌다함.

 

    [ 텀블홈 방식의 선체]

 

 

 

일본측

 

   해군은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격파하고 제해권을 획득하기 위해 기습공격을

시행했고, 함포의 지원사격을 받으면서도 하루에 4,30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뤼순 남산(203고지)을 점령함으로 마침내 1905년 1월1일 항복을 받아 낸다.

   발틱함대와의 결전을 앞두고 해군대신 야마모토 곤베는

“ 연합함대의 전 군함 중 절반은 격침당할 각오를 하고 있고 그 대신

적의 함대를 전멸시킬 방책을 연구 중이다.” 라고 말하고 국가의 존망을 건

전투임을 부대원에게 알린다.

   초반기습과 육군의 도움으로 절대적 우위의 제해권을 확보한 해군은

대한해협과 진해기지에 주력 전투편대를 배치하고 러시아 함대의 기동에 관한

정보 수집에 촉각을 세운다.

  일본은 탄피가 얇고 폭발력이 강한 시모세 폭약을 개발해 준비하고 갑판

방화포를 준비했으나 러시아측은 갑판에 장비인원.방화포를 준비하지 않음

 

1887년 프랑스주제 도미오카소좌 프랄스가 실용화에 성공한 신폭약의 시약을 비밀리에 입수

일본 병기 제조소에서 분석 신폭약제조에 성공한다. 시모세 화약으로 명명된 신제폭약은

1903년에는 양산체재가 완성됐다. 특히 신폭약의 효과를 높인 것은 이쥬인 신관으로 포탄이

함정에 직접 명중하지 않고 부근 해면에만 떨어져도 강한 폭발력으로 함상의 병사가 폭풍으로

함상 수병이 날려버릴 정도 였다고.

 

일본측은 작전참모 아키야마 사네유기가 제시한 ‘적 기동함대의 기함을

신속히 제거하여 함대 지휘권을 제거한다‘는 전략을 충실히 시행했으나

반대로 러시아 함대는 해상봉쇄로 돌파가 불가능 시 전투에 대한 비상대책이

없이 상황변화에 따라 임시응변으로 대처 한다는 것이었다.

 

함대함 간 포격전

 

  러태평양함대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는, 건강상 의 이유로 지휘관 교체를

하고 자신을 송환해줄 것을 요청한 서한이 거절당하자, 5월1일 함대를 이끌고

반퐁만을 출발한다.

 3월 초순경 전함수리를 끝낸 도고함대 측은 30일경에는 이미 러함대가

남위 9도 동경 54도 인도양 해역 북쪽으로 항해하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이는 1월 초순경에 출발했으면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동년 5월10일 마지막 석탄을 함대에 선적을 끝내고 샹하이 회항하는

예고리에프 대령 휘하 석탄수송선 부대가 13일 일본 초계선에 포착 됨으로

도고중장은 결정적으로 러함대의 항로를 파악하게 된다.

  사실 도고중장은 일본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한 대한해협 보다는 태평양측

에서 홋가이도와 사할린 사이의 라페루즈(소오야) 해협 루트를 선택할 가능성

을 유력하다고 보고 있었다. 만일 태평양측을 이용하고 보안에 충실했다면

함대 조우도 쉽지않고 전투도 쉽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도고헤이하치 재독

 

전함 미카사

 

이때 일본의 연합함대는 총 8개의 편재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제1.2전투편대

가 주력함대였다. 도고헤이하치 해군중장이 제1전투편대로 전함 후지호, 마카사호

3척(1902년 영국산) 총4척과 장갑순양함 닛신, 가스가(아르헨티니산)호 2척과

4척의 경순양함을 지휘하며 ,

 제2전투편대 기무라 히코노죠 해군소장이 지휘하는 최신형 장갑순양함 아시마

6척과 경순양함 4척과 함께 조선의 남해안을,

 제5,6,7전투편대는 대마도(쓰시마)해안을,

제3전투편대는 쓰시마 인근 오자키섬에서 전투준비와 초계활동을 한다.

 

1905년 5월 14일 밤에 러시아함대는 대한해협에 접근한다.

 

 

 

1905년 5월 14일

02시28분 러병원선 오렐호 불빛을 발견한 일본 초계선 시나노마루호는

‘제203번’ 초계구역에서 적함대 발견소식을 02시45분 진해만 연합함대에

보고한다. 이때 우랄함장의 방해전파 발사 허가요청에 사령관 소극적 대처로,

야간 동안 시나마루호 러함대 이동 관측전파 계속 송신.

 

05시05분 진해만에 대기 중이던 연합함대 출발

 

 

전함 이즈모

 

06시30분 로제스트벤스키는 스보로프호 함교에서 있었고 쓰시마 40마일

지점에 이르렀을 때 6마일 떨어진 해상에서 일 연합함대 신예순양함 발견함

07시00분 러시아함대 일본 순양함 이즈모호를 발견했으나 격퇴시키지 않아,

동 순양함에 계속 추적당하며 러함대 전열및 대열 재편성을 목격 당한다.

08시00분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경의를 표시하기 위한 돛대기를 개양한다.

 

08시00분 러 제1전함대 수보로프대공호 오슬랴바호 니콜라이1세호 순으로

 단종진 대열로 재편성한다.

11시10분 제3전대 데와 시게토 중장이 지휘하는 순양함을 목격하고

11시15분 전함 오렐로호가 전체 포문을 열고 포사격 실시한다.

 

12시05분 러함대 23번 루트인 대마도해협 한복판에 도착한다.

 러제1전투편대 선두로 12척 전함이 종대에서 횡대 진형으로 바꾸려했으나,

이 기동은 신속 정확이 필수인데 전함 알레산드로3세호가 엇방향으로 돌아

버리고, 해상 안개마져 살아져버려 취소하고 2개의 종렬 형태로 항행한다.

우측 종진은 수보로프.알레산드라3세.로르디노.오렐로호 순으로 된다.

 

13시15분 러함대측 우측 전방에서 일본 주력함대 출현을 발견하는데 사실은

도고제독이 사전계획, 적주력함대 항로차단및 선두함대를 포함 기함을 집중적

으로 포격하여 지휘부 제거,과 달리 적함대 전방 7해리에서 지나치는 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13시20분 일주력함대는 적함대 선두를 포위할 목적으로 이전 항로로 순회

하는 회전항행을 실시한다(기록은 10분~15분 소요됨)

결국 러함대는 북동쪽 전방에서 4척의 전함과 8척의 순양함을 발견하게 된다.

 

*러시아 기록에는 적전에서 실시된 T자-진형전법 실시 시 화력을 집중시켜 결정적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신속한 기동을 허용한 것을 찬탄한다.(러항속:11노트, 일항속:14노트)

 

13시49분 러함대 수보로프대공호 우측으로 회전 일본함대와 평행항로를

유지하며 일 마카사호(기함 “z기” 계양됨)에 포탄을 발사함.

 

  위 적색 아래 적색 좌우가 흑색의 제로기(z기)는

  “황국의 흥패, 이 전투에 달려있다 부대원 각자는 한충 더 분발하라는 의미”의 신호기 임.

 

     [ 피격당한 장갑순양함 닛산 ]

 

 

이때 우측으로 회전 포격이 가능한 전함은 3척이었으나 원거리, 포술미숙

으로 15분간 마카사호 19발 맞음.

14시08분 마카사호 우현 40발 좌현 8발 피격됨

 

함대함 전투는 대략 2.8~3.4해리 거리를 두고 이루어졌는데 러측의 기동미숙으로 대열 뒤측에

위치하고 있던 러제2.3전함대는 전방적 포격에 기담할 수 없어 골든타임을 놓침.

 

14시10분 일함대 기함 전함대 사격명렬 하달됨.

 

 

 

도고의 연합함대 주력 제1.2전대함 15척은 적전 T회전을 하고 사거리 6400m 이내에

들어선 전함 시키시마, 후지, 아사히, 하루카, 닛신호부터 러기함에 일제 사격실시

 

러전함 수보루프대공호 일전함 7척으로부터 집중 포격받음,

러전함 오슬랴바호 일전함 5척으로부터 집중 포격당함.

 

14시20분 러기함 오슬랴바호 고장발생 (선수. 선체하부 관통, 전투갑판

파괴됨 )

14시30분 이후로는 로제스트벤스키 부상으로 함대지휘 불가능하게 됨

러함대 지휘부재로 적함대와 전투저항 보다는 돌파 도주 형태로 됨.

15시07분 기함 오슬랴바호 침몰

 

총함대 사령관이 지휘불능 상태가 되면 차석 사령관이 지휘권을 인수해야 하는데

러함대 총사령관은 차석 함대사령관인 제2함대 펠케르잠 소장은 이미 5월11일

지병인 암으로 사망했는데도 함대 사기저하를 우려해 각 사령관에게 조차 비밀로 함.

 

17시30분 러함대 지휘권 제3전함대장 네보가토프에 이양됨.

18시25분경 알렉산그르3세호 미카사호 공격받고 화재로 나중 침몰

19시20분 수보루프대공호 침몰

도고 사령관 각 전대에 포격 중지 명령내리고 북상하여 울릉도 앞바다에

다음날 아침에 집합할 것을 명하는 타전을 함.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 통과해역에 이미 망루를 구축해 두었다.

지금까지가 1905년 5월14일 낮에 벌어진 격렬한 전투로 해전 1단계로 분류하고 있다.

낮 전투에서 러제1전함대 전함 3척과 제2전함대 기함 오슬랴바호가 침몰 핵심전투력 상실

 

5월14일 야간전투는 일본 어뢰정 60척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된다.

공격은 밤 21시경부터 블라디보스토크 방향으로 흩어진 러군함을 쫒아

추적했으나 예상 외로 심야 해상에서 일어뢰정 끼리 충돌하는 사고가 잦은

반면 대부분 찾지못하고 탐조등을 켰던 전함 나바린호가 공격받아 침몰한다.

14.15일밤 야간전투로 러의 제1.2.전함대는 전투함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된다.

제2단계 전투과정으로 분류된다.

 

제3단계로 분류되는 1905년 5월15일 낮 전투는 동해상 도처에서 도주하는

러군함과의 소규모 개별전투로 행해진다.

                   [해전 약도]

  

 

 

  15일 05시00분경 러군함의 퇴로를 끊기 위해 울릉도로 향하던 5전대로부터

적함 발견 무선 일 연합함대 접수.

 

10시:00경 러 사령관 네보가토프 해군소장의 니콜라이1세호와 전함 오렐호

합류.

10시30분경 미카사호 7000m거리에서 포격개시함. 오렐호 응사하려했으나

갑자기 니콜라이1세호가 군함기와 장군기를 내리고 만국기를 올리고 항복한

다는 신호를 계양함.

 

전함 오렐호

 

  낮 전투에서 사령관의 항복 명령을 거절하고 끝까지 영웅적으로 전투를 하고

침몰한 군함은 스베틀라나호, 우샤고프제독호, 그롬키호, 드리트리 돈스코이호

이고 필사의 탈출로 블라디보스토크항에 입항한 군함은 어뢰정 순양함 알마스호,

구축함 브라븨호, 그로즈니호 3척이고 항 해안에 난파된 군함은 순양함 이줌트호

였다.

전투에 참가한 38척의 전함 중 블라디보스토항에 알마스는 16일 그로니즈는 17일 도착한다.

     [  순양함 이줌루트호] 

   

 

 

러일 해전의 피해규모를 보면

 

러시아측

전함 27척 중 21척(전함6척) 격침, 7척 나포, 전사 4,380명 부상 5,917명

일본 측

전함 89척 중 3척(어뢰정) 격침, 전사 117명, 부상 573명

 

이와 같은 결과는 전후 4대 해전사( 레판토해전 : 1571년 10월. 신성동맹

함대 vs 투루크 함대 / 트라팔가르 해전 : 1805년 10월 영국함대 vs 에스파냐

연합함대 / 유틀란트해전 : 1916년 5월 영국 vs 독일 / 미드웨이 해전: 1942년

6월 미국 vs 일본 )에도 볼 수 없는 특이한 전사로 기록 된다.

 

대부분 중고형 전함을 이끌고 3대양을 통해 28,800km 거리를 220일간

고르지 않은 속력으로 항해한 사실은 획기적인 모험여정이었다.

 

 그러나 야망과 경쟁 그리고 허영으로 꽉 찬 로마노프가의 남성들이 주요한

군사직책을 독점하여 1904년도에 기록된 러시아 해군에 제독만도 100명이

넘었고 그중 바다를 구경한 제독이 1/3 도 못 됐다고 한다.

더욱이 러시아 병사의 70%가 문맹이어서 현대식 병기 취급이 어려워 사격능력

이 졸렬함은 정평이 나 있었다.

 

  반면 메이지유신 이래 30년 동안 정부가 가장 힘을 쏟은 의무교육제도의

목표는 충성스러운 천황의 병사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

러일 해전에서 획기적인 것은 4,000 ~5,000m 원거리에서 주포 포격의 응수로

전투력이 결정됐다.

그것도 함대의 화력을 연달아 적함에 집중시켜 전투력을 상실시키는 전법이

처음으로 효과를 거둔 것이다.

 

  러일전쟁은 러일간 전투에서 결정되었다기 보다는 1905년 러시아혁명으로

러시아가 전쟁을 중단함에 있다고 본다.

어쪄튼 동해 러일해전에서 완벽한 승리는 포츠머스 조약에서 일본에게 유리한

조건을 조정할 기회를 주었고 최대 전리품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1903년(광무6) 9월에 경운궁에 환궁한 고종은 이즈해 8월14일 영호를 건양에서 광무로 고치고

오늘의 조선호텔 자리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원구단을 쌓고 10월11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그 이튿날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유보되었던 명성황후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른다.

1904년 4월1일 밤 10시에 일본에 의한 방화로 추정되는 불로 경운궁은 대부분 잿더미로 변한다.

청일전쟁의 승리가 일본으로 돌아가자 1905년 7월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 수상 가쓰라가

비밀협약을 맺어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한국을 지배하는 것을 서로 승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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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7일 한바다.

참고서적

일본군사사 2013년  후지와라 아키라  제엠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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