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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무너진 경강상인의 꿈
1. 도입부 ( 성저십리 앞 1분) 인사말과 테마소개
안녕하십니까 !
저는 오늘 “무너진 경강상인의 꿈”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조선시대인 18세기
후반에 부상대고로 성장하여 19세기 초에 조선 최고의 거상으로 변모했다가
조선왕조 함께 사라져버렸다고 평가되는 한양상인 경상에 대해 약 15분 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2. 전개1 (경강 무대 앞 3분) 여객주인권 매매와 쟁송
# 유인물을 제시하며
“여러분에게 보여드리는 이사진은 삼개나루입니다. 마포는 조선 8도의
배가 정박했던 조선 최대의 물류 중심지로 한강의 오른쪽 마포, 서강, 잠두,양화진 포구 지역
입니다.” 이후 상황을 보면서 이야기 내용을 가감한다.
- 때는 정조13년(1789년), 객주인 황복징을 비롯하여 마포서강 포구민과 거간,
그리고 중도아(도매상인)들이 모여서 대책회를 여는 중이었다
문제는 항시 경쟁관계에 있던 망원·합정지역의 객주 정수이란 자가 빙어선 정박 주인권을
타 포구 객주에게 금300량에 팔아놓고는 막상 빙어선이 마포포구로 이동하여 정박하자, 그곳
주민들의 영업에 큰 타격을 받게되어 관(한성부)에 상언과 임금행차 시 격쟁을 여러번 반복하며 무리
한 주장을 강행 강민 사이 불안요소가 되었기 때문었다 . 최종 관의 판결은 이러했다.
‘선박의 정박은 이익의 소재를 좇아 주인권에 따라 분산 정박할 수 있다 ’라고
“ 어선이 정박하는 곳은 물품을 팔고 사는 것에 있어 이익이 있는 곳이면 아무 곳이나
상관이 없다. 어선은 그 이익의 소재를 좇아 목적에 맞는 포구로 오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어선을 한 곳에만 정박 시키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한성부 처분 . 기유1789 규장각고문서86928 ]
배경은 한성부가 주관하는 경강포구{광나루에서 양화진에 이르는20.5km 구간)가
경강 상업이 번성함에 따라 각 포구마다 상선유치 경쟁이 치열해졌고, 더하여 각
포구 특정영업을 독점적으로 하는 권리인 여객 주인권이 법의 보호 하에 매매, 상속,
양도가 가능한 재산권이 되어 여객주인이 객상에 대해 갖는 경제적 권리는 경강에서
해운을 통한 상품유통에 필요한 상거래 관습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 18세기 화폐의 가치를 알아보자.
-상평통보의 가치( 1량 = 10전 = 100푼)
김용만교수의 ‘조선 사노비 연구’에 따르면 당시 노비의 몸값은 5~20냥( 평균5냥)
정도라 했습니다. 1965년의 1원=2000년의 850원으로 보니 5냥=\4,250민원 ?
영·정조시대 조선 총 통화량이 약 300만 냥이었다 하며 정조실록에 정조를 2차례에
걸쳐 살해하려 하다 붙잡힌 자객 ‘정흥문’의 자백에 의하면 정조1년(1777년) 8월 암살
수고비로 15냥을 받았다고 했으니 주인권은 상당한 고액임이 확실하다 하겠다.
* 준비물2 전명문 ( 4도 포구영업권)
3,500냥 - 한국 금융사 박물관 소장) 광무3년 1899년 정축월초2일 발행
3. 전개2 ( 경강 무대 앞 4분)
경강상인 조선의 최고 거상이 되다.
- 한양, 조선수도의 위상
역사는 도시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도시는 시장을 통해 발전한다고 한다.
도시건설의 3대 주요사업은 궁궐, 관아, 시전이었다.
삼봉은 명을 받고 한양을 조선의 수도로 백악산 밑에 궁궐을 조성하면서 주례 고공기
따라 법궁인 경복궁을 건설했으며 궁 좌우에 종묘, 사직단 , 정문 앞 주작 대로변에
좌우에 주요 관아, 그리고 종로 쪽에
시전인 운종가를 만들었다.
국토의 중심에 위치 해수로(한강물길 330 km, 북한강, 남한강, 서해안)로 사통팔달
조건을 갖춘 한양은 조선의 명실공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매김한다.
* 준비물3 -운종가
- 경강상인 부상대고로 성장하다.
조선은 국내외 상업을 통해 산업기반을
구축한 고려와 달리 국가재정의 근간을농업에 두었고 사농공상이라 하여 상업을 국가적
으로 억제하는 제도를 두는 모순에 갖게된다.
상업은 단지 왕실과 관아 그리고 고위 사대부의 요구를 충족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종루시전의 육의전상인에게는 금난전권을 주어 시전증가를 억제했으며, 초기 도성
100리 안쪽에서는 장시를 금지했고 상인은 법으로 관직에의 진출도 막았다.
그러나 임란과 호란이란 2대 사건은 중세 조선 중농억상 정책의 재편을 요구하게 된다
전란은 피폐된 농촌인구를 수도 한양 외곽과 한강변으로 대량 유입하게 만든다.
도시 빈민들이 생필품 구입을 위해 호구지책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장사였다.
그래서 시전에 대비되는 난전이라 하는 자유시장이 급속히 생겨나고 성장하게 됐다.
10만명을 예상해서 건설한 도시에 인구의 집중은 도시공간이 도성 밖으로 확대시켰고, 인구유입 증가( 18세기 후반 한양은 30만이 넘음)는 상품 유통량의 증가로 이어집니다.
전쟁은 육상 및 해상교통로를 급격하게 발전시켜 상품의 유통망이 확충으로 이어져
이제 경강포구는 전국적 시장권과 연계된 해상교통(대포구)의 중심포구로 자리잡는다.
양화진은 군사. 경제 요충지인 관문으로, 광나루는 충주를 통해 동래로 , 원주를 통해
동해안에 연결하는 운송기지로 , 강변과 외곽인 송파진( 객주집만도 270개)과 누원점
의정부) 등이 새로운 유통기지로 상업중심 도시로 성장 발전하게된다.
* 준비물 4. 송파나루
세종21년(1439년)에 신설된 송파나루는 수어청 소속 관선이 9척이나 상주했던 곳으로
조선 10대 상설 시장 중 하나로 도가상업의 중심지.
새로운 유통체계를 장악한 세력은 권문세가와 연결된 사상대가로 송파 등 신흥상업도시의 부상대가였는
데 그들 중 대부분이 경강상 인 출신으로 독자적으로 자본력과 유통망을구축한 조선 최고 상단으로 부상
한다.
즉 한강은 한양 수도의 수요를 공급하는 중심 운송로
로 한강변 자체가 하나의 경제권으로 형성되어 경상인
은 한양의 도시화에 따른 대규모 수요와 공급량을 조절할 수 있는 정보망을 통해 매점
(도고)상업을 수행했으나 초기 경강상인 자본집적의 바탕은 선박을 이용하여 정부의 세곡
과 양반의 소작료 운송과정에서 투곡, 화수, 고패 등 부정을 통한 착복과 밀무역을 통한
고이윤 장사였다.
영조1년(1725)에 삼남지방 세곡운반 전반을 위탁받는 조운선 운반권 을 획득했으며
영조15년에는 주교사에 소속되어 조선업으로 확장 (밤섬을 중심으로 선박을 건조)한다.
경상은 선물거래, 창고업, 중개업, 금융업, 조선업 등 실물경제를 담당하는 물류 종합
상인(삼성, 한진 같은)으로 탈바꿈히게 된다.
(즉 물산객주, 여상객주, 보상객주, 환전객주, 무시객주 등 특허에 의한 독점기업 형태)
4. 관제구조의 변화. 한말 경상의 부침(4분)
- 신해통공( 정조 1791)
17세기 후반기에는 2전란과 장기적인 자연재해가 남긴 상처에서 서서히 회복되고
농업 생산력도 신기술로 급격히 늘어나 이를 바탕으로 금속화폐 유통도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린다. 즉 1608년(광해군)부터 1708년(효종)에 걸쳐 단계적으로 실시된
대동법은 각종 토목공사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제도를 정착시켜 노동의 상품화도 진전
시켰고 이를 계기로 조선은 상품 화폐경제로 진입이 가능하게 됐다.
영조31년(1764년)에는 보민사를 설치하여 육의전을 비롯한 17개 시전에만 금난전권을
인정하였으나, 시전의 반대에 부딪쳐 전면적인 실시를 미루다 정조15년(1791에 )에는
육의전을 제외하고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신해통공)한다.
이는 탕평군주의 동시오민의 이념에 따라 취해진 조치로 기본적으로는 사상세력을 인정
한 것이고 이미 효용성을 상실한 금난전권 폐지 난전 소상인의 영업을 현실화하고
자본력에 의해 주도되는 상품유통경제의 방향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급격히 증가된 상인으로부터 장세를 징수하여 관아재정 일부에 충당하기 위한 조치라고
보는 이도 있다.
- 외획제도
전국적으로 금융을 소통시키는 금융기구가 마련되지 못한 전근대적 사회에서 외획은
중앙관청과 지방관청, 그리고 지방관청간에 금융을 소통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에 상평통보가 법화로 널리 유통되면서, 원거리간 무거운 화폐의 운송에 따른
위험부담을 피하고 화폐를 대용하는 거래의 유통과 지급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외획이 나오는 경우는 1. 국고에 일시적인 차입금이 필요한 경우, 2.어떤 지방관아에서
경비지출이 시급하게 필요한 경우, 3. 중앙관리가 지방출장을 할 경우 ,4. 상인이 지방
에 송금할 필요가 있을 때 이를 국고에 의뢰할 경우가 있다.
기본은 원거리 운송 조세액을 중앙에 있는 상인(객주)으로 하여금 그 소요금액을 국고
에 납부하게 하고 일정한 증서를 소지한 상인에게 군수가 징수한 세금을 지급하는 방식
으로 이때 탁지부대신이 군수에게 국고에 납입할 세금을 상인에게 지급하라는 증서가
외획이다.
내장원은 정부의 전통적 권위로 상인에게 배타적 특권을 유지시켜주며 각종 영업세 등
잡세 수취권 장악과 외획금 유용으로 얻은 수익금 황실재정을 유지하려 했다
* 준비물 5 외획증서 탁지부
30년간 세도정치로 인한 삼정의 문란은 정부에 심각한 만성적인 재정난을 물려 주었다.
고종3년에 대원군에의해 금위영에서 제조한 당백전 (6개월)과 고종20년 민태호에
의해 전환국에서 발행한 당오전(1년간)은 비록 만성적 재정적자 속에서 경복궁을 짖고
개항에 따른 비용, 신식군대를 위한 설비, 해외사절단 파견에 따른 비용충당이었으나
화폐가치의 폭락으로 물가폭등으로 이어졌다.
개항 이후 1890년도 부터는 거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민족자본은 개화의 물결에
발맞추어 기업형태로 성장해 갔는데 고종31년에 조선의 금융시스템을 뿌리채 흔든
사건은 ‘신정화폐장정’ 과 함께 발행한 백동화 남발 이었다. 한말에 일본세력이 침투하
면서 사주전을 유통시켰는데 일인이 일부 조선인과 결탁하여 다량의 위조화를 밀수입
까지 하면서 한 금액이 300만환에 달했다고 한다.
백동전(니켈화)에 의한 금융공항은 특히 조선의 거장과 소상인에게 파산을 몰고와
수많은 토착 자본의 몰락과 일본자본에의 예속이라는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게 한다.
일재정고문 메카다 타네타로는 전환국을 폐쇄하고 화폐계획을 실시하게 하고 일본계
제일은행권 지폐를 통화로 사용케한다.
* 준비물 6(제일은행 지폐)
- 경제적 외세침탈과 금융 근대화의 좌절
1894년 갑오개혁 정부가 파악한 조선왕실이 안고 있는
미지불금액은 백관록, 급료 , 제반 경비지출과 왕실의
채무정리 청구금액 240만원 포함하여 총 금액으로 400 여만원이었다고 한다.
정부세입 가운데 조세수입은 1/3 정도이고 나머지는
차입금이나 외채에 의해 지탱되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에 대한 친일정부의 경제의존도는 자타의적으로 심화됐고, 일본의 차관제공의
대가는 광상채굴권, 철도부성권, 전선가설권, 해관운영권, 농어업 채집권 등 각 종
기간산업의 이권의 침탈과 그 환수방법으로 국가 재정운영의 자주성을 잃게 된다.
( 청국, 영국, 미국, 노국과 맺은 통상조약의 결과도 위와 유사했다)
여기서 우리는 큰 의문을 갖게된다.
대원군 집권한 10년을 빼고도 33이란 긴 세월 집권한 고종은 그 세월 무었을 했으며
그를 둘러싼 조선의 개화 인재들은 무었을 했을까 ?
그들은 무슨 꿈을 꾸었을 까? 국익이나 공익의 개념은 과연 있었을 까?
임오군란 , 갑신정변, 을미사변과 같은 절대 절명의 순간을 3차례나 겪으면서 고종은
군주로서 신하들을 믿지 못했다고 한다. 대강 10년 단위로 친일파, 때론 친청파, 때론
친러파 대신들과 함께 행보를 하며 개화, 보수적 군주로 변신하며 시류에 따라 자신의
권력 유지에 편한 세력에 성급하게 편을 들어 줌으로 개혁의 원동력인 인재들을 많이
희생(김옥균, 김홍집, 홍영식 등)시켜, 그 결과로 나라의 근대화를 추진할 기반인력을
잃게 된다.
준비물7. 장사의 신 - 19세기 말, 일본 자본으로
철도사업에 손대려는 정태우 vs 천가객주 장혁 간의 갈등
관상이든 사상이든 출현배경과 상업활동은 다르지만 조선의 객주는 조선후기 경제를
이끌어가던 주채 세력이었다.
현제까지 연구결과 사상도고에 의해 축적된 자본의 일부는 생산을 지배하는 산업자본 단계에
들어갔다고 보며 , 특히 경상객주의 일부 민족자본은 해운조선업에 투자되었다 본다.
역사 및 사회학자의 평가는 대체적으로 두기지로 요약된다.
한일합방 이전에 이미 경제적으로 일본에 포섭된 상태(대일본 국가 순채무액 4천5백
만엔)로 개항 초기에 내제적인 산업화의 동력도 개항이 진행되면서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즉, 어느정도 축적되었던 상업자본은 문호개방 후 일시적으로는 양적증대를
가져왔지만 정부의 외세의존 정책으로 산업개발에 필요한 각종 개발이권의 찬탈과
통감 및 총독부의 치밀한 식민지 정책에 의해 황실이 무너지자 , 황실과 유착관게
유지로 특허적 객주권(항만 지정 25인 객주제, 여각주인 25인제 등)을 향유하던 경상
의 부상대고들도 외세압력으로 관허제폐지, 관에의 과중한 납세, 외국자본과 경쟁력
부족으로 식민권력과 손잡아 일본자본에 종속되어 버렸다는 설과
일부는 송상과 같이 발빠른 정보망과 고유의 단결력을 과시하며 합방전까지 일상과
경쟁을 했으며 음양으로 살아남아 광복 후 나라 산업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다
는 연구결과도 공존한다.
5. 마무리 (3분) 질문과 의견
역사에서 만약은 없고 진자는 말이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 대우조선과 한진해운(전세계 해운업 순위 7위) 사태를 보면서 어쪄면 생소한
테마를 선택했습니다.
정부의 대처능력 부족과 CEO의 국익과 공익개념의 부재는 옛날과 다름없이
국가를 위기에 빠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경상상인의 꿈은 ? 동북아 해상무역의 신 장보고 ?
참고문헌
. 조선시대 서울의 경제활동 최완기 1994 서울학 연구소
. 서울 2천년사⒂ 조선시대 서울의 경제성장 2013 서울시사편찬위원회
. 거상 서울을 장악하다 국사편찬 위원회 2005 (주) 두산동아
. 한국의 모든 지식 김흥식 2012 서해문집
. 개한의 파도와 조선의 침몰 최흥석 2011 한국관세무역 개발원
. 조선의 못난개항 문소영 2013 (주)위즈덤하우스
. 백년전의 한국사 편집 신완규 2010 (주)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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