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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나/또 다른 삶

시 한수


산문(山門)

이병초


송홧가루를 빠져나온 바람이
저만치서 입술을 훔친다
바위틈에 끼어 크다 말았어도
맡둥이 내 허벅지만 소나무
솔밥들을 매달고 쭉 찢어진 데를
시린 햇살이 꽂힌다
배꼽 떨어진 삽처럼 막심 못 쓸
눈두덩 주저앉은 저것의 속내
바위틈에 똬리 트느라고 애 꽤나 녹았겠다
어디 큰 판에 가서 화끈하게 붙어보지도 못한
푹 꺼진 윗목 같은 날들
먹잇감에 쫓기던 새벽 꿈자리를 매달고도
맨살에 와닿는 실바람에 화악 쏠리던 시절이
왜 없었으랴
집 두고도 집 그리워했던
흰머리 늘어나는 머리맡이
우툴두툴 밑동에 맺혔을 거다
누가 캐가려다 못 캐간
저 뒤 캥기는 자세로 두고두고 늙어갈 소나무
아무 말도 못하고 쭉 찢어진 데를
송홧가루 묻은 햇살이 가만가만 처맨다






1963년 전북 전주 출생
우석대 국문과,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졸업
1998년 계간《시안》신인상 당선
시집『밤비』『살구꽃 피고』등
현재 웅진세무대 교수
                                              ( 2012.북한산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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