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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과 병자호란 돌아보기
오늘은 국제정세가 살얼음 위를 걷듯 살벌한 작금에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누구보다 더 안민과 국익을 챙겨야 할 이때에 당의 명분만을 쫒는
극치를 보며 인조반정(1623년)으로 정권을 쟁취한 서인 일파와 왕 인조가
내정과 국제정세의 파악에 실패하여 변방의 오랑케로 여겼던 여진족이 세운
후금(청나라)에게 군사적으로 철저히 공략당해 임금은 삼배구고두레의 예를
홍타이지에 올리는 치욕과 백성과 조정의 사기를 땅에 떨어트린 병자호란의
슬픈 역사를 다산지석의 예로 살펴보자.
이와 같은 병지호란의 비극의 단초는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623년
서인일파가 무력을 동원해 정변을 일으켜 당시 임금이었던 광해군을 쫒아내고
그의 조카인 능양군 ‘종’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에서 시작된다.
반정의 이유로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반사대주의)’, ‘어머니 인목대비 폐위 사건’,
‘영창대군을 죽인 폐모살제’를 내세웠다.
우선 패모살제다, 선조와 중전인 인목대비 사이에서 뒤늦게 왕자가 출생한다.
이가 바로 영창대군이다. 선조는 늦둥이였던 영창대군을 매우 총애했고 이를
대신들 앞에서도 숨기지 않았다.
광해군에게 선위를 할 당시에도 영창대군을 염두에 뒀던 영의정 유영경 등의
선조의 선위 교서를 감췄다가 발각되는 일 등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가까스로
넘긴 후 마침내 조선의 제15대 왕으로 즉위 받을 수 있었던 광해군에게는
태생적 문제를 갖고 있었으니 정비의 소생도 아니고 후궁 출신 공빈 김씨의
아들로, 장자도 아니었다. 장자는 성격난폭으로 왕위에 올라가지 못한 임해군이
있었다. 임진란 시 피난가면서 위급한 후사 문제로 평판이 좋아 선택되었던 것.
소북파 무리를 숙청한 계축옥사를 통해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일파와
눈엣가시였던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 강화도에 위리안치한 후 불태워 죽임.
이제, 우리는 남한산성 수성에 실패한 이유를 세단계로 나누워 생각해 보자.
1592년에서 7년간 치루었던 임진·정유재란부터 1618년 후금 누르하치가 명나라에
선전포고까지, 1619년 명청전쟁부터 1627년 정묘호란까지 그리고 1637년에 난
병자호란까지 조선은 어떻게 외세에 의한 국란을 대처했는지 살펴보자.
도요토미는 1587년 7월부터 대륙진출에 대해 여러 번에 걸쳐 언급했다고 한다.
조선의 이덕형과 류성룡은 1589년 9월 일본통일 축하 명목으로 통신사를 파견하자는
주장을 피력하고 선조23년(1590년) 3월에 서인 정사 황윤길, 동인 부사 김성일을
임명하여 조선 통신사를 결성 일행을 보내 익년 3월까지 일본에 머무르게 한다.
도요토미가 일본 전국을 통일하기 전에도 중종5년(1510년) 4월에 진해 웅천, 부산진,
울산 염포 등 세종조에 왜인들이 조선 내에 살도록 허락한 삼포에 큰 왜변이 있었고,
명종10년(1555년) 5월에는 왜선 70여척이 전라도 영암의 달랑포와 이포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당한 을묘왜변 등이 있어서 조정에서는 유능한 장수들을 남부지방 방위에
배치하였으며, 경상, 전라, 충청도에 감사를 파견하여 성곽을 보수하였으나, 오래
지속된 평화로 전쟁준비에 대해 사회적 반발 지속 등으로 준비가 지지부진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전국을 통일한 일본은 육군 15만 이상, 수군 8천명 등 총병력 20여만 명
으로 조선을 치니 예상외의 병력에 조선 혼자의 힘으로 막기는 중과부적이었다.
1620년 서인은 능양군(인조)을 반정 모의에 참여시키고 1623년 3.13. 새벽을 거사일로
전한다. 김류, 이중로, 이귀, 최명길이 주축된 반정의 첩보를 받은 광해군의 반정 초기
처리와 대처 지연으로 반정은 성공하게 되고 광해군은 강화도, 제주에 18년간 유배된다.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정권은 즉시 중립외교를 폐하고 친명배금정책을 내세운다.
한편, 누루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홍타이지)는 본격적으로 1619년 명청전쟁을 일으킨다.
1621년에는 2차에 걸친 외교문서 사건이 있었고, 1622년에는 명나라 모문룡의 부대가
전투에 진 후 조선으로 후퇴한 사건 등의 연속 상에서 1627년 후금의 대조선 강경파가
득세하게 되고 후방의 조선군으로 인한 후환을 미리 방지하려 3만 명의 병력으로 1월에
조선을 침공한다. 당시 후금의 전투병은 약 8천명(수긍이 됨) 정도라는 설도 있다.
이때도 조선은 명과의 외교관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고, 후금이 명과 전투로 장기간
조선에 머무를 수 없는 약점을 이용, 3월3일에 후금과 화의가 성립되고 후금은 철수 한다.
그 후 9년이 지난 19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군신의 예’를 요구한다.
조선은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치욕으로 느꼈는데 군신관계로 전환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한다.
결국 그해 12월에 맹장 용골대가 이끄는 청나라 10만 대군(과장됨)의 전격전에 앞에 속수
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프랑스가의 미지노 방어선이 독일의 전차전을 앞세운 전격전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듯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할 시간도 없이 4일 만에 청군이 개성에 도착하게 되고 조선왕은
한 달반 식량 밖에 비축이 않된 남한산성으로 피신, 발이 묶이되 된다.
주병력이 조총병인 1만3000명 정도 있었으나 후방 지원이 불통으로 추위와 배고품으로
결국 애석하게도 치욕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받아 드리게 된다.
이제 1637년의 병자호란 패배의 원인을 심층 분석할 필요가 등장하게 된다.
왜냐면 조선은 임진·정묘의 전쟁을 치르면서 전쟁무기 개량에 힘써 조총부대를 육군주력
부대로 키웠다. 이는 후금의 명의 무순을 점령했던 명과 후금의 사루후전투 에서도
보여준다. 광해군 10년(1618~9년) 만주 요동인 사루후에서 명나라 10만 연합군과 후금군
3만이 전투가 있었다.
조선의 명의 요청으로 부차전투에 참가하게 되는데 강홍립 장군이 이끄는 정예군 1만8천
명 중 1만3000명이 조총부대 정예병이였다.
처음에는 연전연승하는 것 같았으나 명군의 전략 부족으로 조선군은 7~9천명이 전사하고
포로가 4천명으로 나중 실제로 귀국한 군사는 2천700명 정도라고 한다.
명나라 원정군의 전략실패는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 포위 공격에서 시작되었다.
명군의 10만 병력은 2만5천의 부대로 쪼개어 사방에서 진격하는 것인데 반해 고작 후금의
전 병력으로 추산되는 3만명은 대부분 기마병이었다.
대부분의 보병 위주의 연합군은 이점을 고려하여 적어도 군사를 5만명 단위로 운용해야
했다. 왜냐면 연합군 준에는 전투를 경험하지 못한 병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질과 양으로 모두 우세한 병력으로 2만5천 병력을 상대하는 후금은 좋은 위치를 점했다.
명군은 사루후 전투에서 300명의 장수, 5만5000명의 병사, 28,000필의 군마를 잃는다.
기존 군사 병력면에서 보면
임진 정묘왜란 후 조선의 최정예 부대원을 명청전쟁으로 대량 소실하게 된다.
인조반정으로 집권 직 후 이괄의 난으로 북방 정예군의 일 부 장수와 병사가 후금에 귀순
하게 된다. 전사한 병력을 포함 훈련된 정예병력의 큰 손실 중의 하나다.
둘째로 인조는 자신이 반정으로 집권 후 이광의 난 후 반란 공포증에 시달려서 강병과
훈련 보다는 군 감시 쪽에 주력했다.
다시 말하면 인조는 지방군(감영군)이 강력해지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았다.
하여 대부분 근왕군으로 유지하려 했다.
그리고 계속된 전쟁으로 극심한 경제란이 겹쳐서 전후 경제교란을 막지 못한 것도
전시 동원할 수 있는 병력 동원과 전투 군량미 비축에 실패했다.
조정 대신들 간의 반목은 변함이 없었다고 본다.
1. 남한산성을 수성하지 못한 이유
2. 광해군의 중립 외교
3. 사르후전투와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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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9.2. 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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