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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요의 태동기인 1920년대부터 1960대 말까지 반세기 동안의 조선과
한국이 겹치는 우리 근대 가요사는 그 요람기 , 황금기 , 수난기 , 재생기로
구분되는 데 이번에는 가요의 탄생과 식민지 시대를 통과하며 겪는 시대 상황을
살펴보고 민족의 수난과 비탄, 그리고 저항을 노래하는 가운데, 조선 총독부의
강압으로 1944년 레코드사들이 개점휴업 상태가 되기 전 우리가요의 황금기를
향유한 불멸의 기라성 같은 유명가수들의 가요 노래들을 들어 보자.
* 광복 이전 가요 (~ 1945년)
나라 잃은 설움과 한 그리고 저항을 노래하다
-1920년 중반 ~ 1930년대 전반 가요 곡의 요람기(초창기)
신민요와 창, 가곡이 포함된다.
-1930년 초중반 ~ 1940년 초반 가요 곡의 황금기(전성기)
-1940년 초반 ~ 1945년 해방 가요 곡의 수난기
* 광복 ~ 한국전쟁기 (1945~1953년)
희망과 절망의 이중주 (해방의 감격과 전쟁의 아픔 노래)
* 재생기 = 한국전쟁이후 ~1960년대 (1953~1969년)
전쟁의 잿더미를 딛고 동경과 자유를노래한 대중가요 등장
- 1910년대 외국대중가요 번역 번안한 형태
- 1920년대 무성영화의 주제가( 연극 속 노래
무성영화<낙화유수 1927년 > 김서정 작곡•시 본명 김영환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로 평가
유성기(측음기) 등장 1880년 대동강 프랑스 신부
- 1887년 왕실전의 (미) 알렌 고종3년 최초 소개
- 1889.3. 서울에서 최초의 유성기 시청회 (세문안 교회 근처 )
- 1901.8.17. 서울 시내 전등 점등식 거행
- 1908. 일.미 축음기제조주식회사 발족
- 1930년대 일본 음반회사 한반도 친출
직업가수 등장 채규업<유랑인 노래 1931> 최초 직업가수 작사작곡
창가집 1912년 3.17. 매일신보 판매광고 <보통창가집> 김인식
- 1914년 11.12. <조선속곡집> 이상준
- 1915년 4.3. 평양 종로 광문책사 발행 <정정증보 신구잡가>
- 1921년 5.2. 동아일보 <근화창가> 근화사 발행
창가집 장사꾼 “연가사” 매개로 퍼짐
- 가요 사상 최초의 인기곡 1926년 <사의 찬미> 윤심덕
8웡.5일. 동아일보 정사사건 보도 김우진과 관부영락선 “덕수환” 대마도 앞바다
- 1926년 11. 경성방송국 설립 1927년 2.16. 방송개시
- 1927 합동 측음기 주식회사(제비표 조선레코드) 발매 개시
- 1927.2.16. 경성방송국 개국 및 본방송 개시(호출부호 JODK 현 KBS 전신)
- 1928년 6.21. 빅타사 세일상회로 총판점 개설
- 1929년 2. 콜로비아레코드사 , 신보발행은 1928.11.11.부터
-1928.4. 최초의 창작가요 <낙화유수(노래 이정숙)>발표
-1929.3. 우리나라 직업가수 제1호 채규엽 데뷔, 콜롬비아레코드 <유랑인의 노래>
- 1931년 –1932.9. 포리도루레코드사
- 1933년 1. OK레코드사 발매 , 1937년 2월 . 조선에서 녹음한 음반 발매
* 1910년대 1920년대 사회 상황
-1905년 경부선 , 1906년 경의선, 1914년 호남선(대전-목포) 개통
- 1905.11 을사보호조약 아토 통감 임명 외교권 접수 내정간섭
- 1907년 일본채무 1,300만원 조선지배비용 조선정부에 부담 국체보상운동
민족정신 고무창가 통감부 극도로 탄압. 통제
-1929년 함경선, 1933년 도문선(청진 물자 집산고) 만주침략
-1920년. 총독부 산미증식계획 실행
농촌 피패 1918년 쌀 소동, 1920년 1270만석 생산 185만석 일본 송출
1923년 1630만석 생산 870만석 일본 송출
조선인 곡식은 만주에서 사온 좁쌀, 옥수수, 콩 등의 잡곡 대체
1926년 조선수력전기회사
1927년 조선질소비료회사
-1930년 전국토의 임야.전 40% 몰수 총독부 소유
-1931년 만주사변 조선 병참 기지화
-1912년, 1933년, 1935년 3차례 1347수의 민요, 속요 수집 민족적 요소 제거
* 광복 이전 데뷔 인기 가수
1. 고복수 (1911~1959) 경남 울산 ,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노래한 대표가수
1927년 까지 만주로 쫓겨간 우리 땅 농민의 수가 100만명이 넘었고, 관서•관북의
험준한 산악에서 화전민으로 살아야했던 조선인이 120만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대표곡 1934년<타향>, 1935년<사막의 한>, 1935년<짝사랑>
조선가요의 황금기는 김능인 작사•손목인 작곡<타향살이>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1932년 콜롬비아레코드 주최 ‘전조선 9도시 콩쿠르대회’
예선 1등 입상, 경성 본선에서 3등으로 입선한다.
이 때 본선에 참가하기 위한 여비가 없어서 잡화상을 경영하던 부친의 돈 60원을
몰래 훔쳐서 줄행랑치듯 상경했다는 일화가 있다.
1934년 OK레코드 6월 신보에 데뷔한 고복수의 처녀작인 <이원애곡>,<타향>은 발매
1개월 만에 5만장 팔릴 정도로 대 유행곡이 되었고 <타향>은 제목이 <타향살이>로
불리게 되었고 고복수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다고 한다.
1934년 4월 신보에서 또 다른 대표작 <사막의 한>을, 그리고 1938년 1월 신보로
박영호 작사•손목인 작곡 <짝사랑>을 히트시킨다.
<짝사랑> 가사 중‘ 으악새’는 다년생풀 억새를 의미하며 이 노래가 크게 유행한 후로는
이 노래는 애틋한 사랑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 타향살이
** 짝사랑
** 사막의 한
2. 백년설 (1914 ~ 1980) 경북 성주 본명 이갑룡, 1950년대 개명 이창민
대표곡 1938년<유랑극단>, 1940<나그네 설움>, 1940<번지없는 주막>
1941<대지의 항구> 1942<고향설>
1959년 2월 동아일보 ‘천자예담’에 실린 본인의 회고담을 보면 애당초 가수가
되려던 생각은 없었고 학창시절부터 문학과 연극에 관심이 많아 극작가가 되려는
꿈의 실현 방편으로 23세에 콜럼비아레코드사에 입사한 것이 가수된 계기였다.
1940년대 활동했던 다른 남자 가수들과는 달리 음정을 흔들어 구수하면서도 듣는
사람에게 절규하듯 독창적이고 달콤한 애수를 품은 노랫소리가 그의 특징으로
1938년 한 해가 저물어 가는 하늘에 구슬픈 멜로디를 타고 흘러나온 박영호 작사
•전기현 작곡 백년설 노래 <유렁극단>은 뜻밖에 단번에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이듬해 1940년 2월 신보로 발매된 조경환 작사 이재호 작곡 <나그네 설움>은
10만 매를 넘는 폭발적인 판매고를 올려 그가 이적한 태평레코드사를 당대의 유명
레코드사인 OK사, 빅타사, 콜로비아사 3사와 일약 동등한 존재로 부상시킨다.
1940년 10월 신보에 발매된 인기곡인 <번지없는 주막>은 OK사 조명암•박시춘 콤비
와 선두다툼을 하던 처녀림•이재호 콤비의 작품이다.
백년설의 폭발적인 인기에 주목한 OK사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를
1941년 전속계약금으로 2천만 엔, 월급 350엔으로 스카웃해 간다.
그 해에도 그의 주옥같은 가요 , 남해림 작사•이재호 작사<대지의 항구> 김다인
작사•이봉룡 작곡<고향설>이 나온다.
OK사에 이적 후에도 인기곡을 쏟아내던 백년설은 1944년 이후 총독부의 강압에
의해 개점휴업 상태에 빠지자 백년설가요대, 정염예는대를 조직하여 각지를 순해
공연했다.
3. 남인수 (1918~ 1962) 경남 진주 본명: 최창수 이칭/별칭 강문수, 최창수
대표곡 1938년<애수의 소야곡>,<꼬집힌 풋사랑>, 1942<낙화유수>,
1943<서귀포 칠십리>, 1945<가거라 삼팔선>
개가하신 모친을 따라 진주 강씨 문중에 들어가면서 강문수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다소 불운한 유년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고 알려지며 학력사항에 대한 기록은 없다.
가수를 지망한 강문수는 상경하여 시에론레코드 방문 했고 그 자리에서 채용됐다.
데뷔곡은 <눈물의 해협>이며 1936년 7월에 발매되었다.
대표곡인 <애수의 소야곡>은 데뷔 시 불러 큰 반응을 얻지못했던 <눈물의 해협>을 가사만
바꾸어 다시 부른 노래였다고 한다.
남인수는 음역이 넓고 감정표현이 풍부하며 옹골찬 미성에 음 높이와 발음이 정확하고
고음 처리에 강점을 보여 당시만 해도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가수로 크게 선전되었다.
레코드 발매에 앞서 1936년 5월10일 김해화, 신난수와 함께 라디오에 출연했고
그해 12월에 <비에 젖은 부두>도 발표했다고 함.
강문수의 노래를 주목한 오케이레코드의 이철과 강사랑의 설득으로 스카웃된다.
오케이레코드로 옮긴 후 남인수란 예명으로 첫 히트곡은 1917년 3월 신보로
발매된 <인생극장>,<물방아 사랑>이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8년 게재된 대중연애 출연자 프로필에 OK사 입사 후 3년(향년 22세)
만에 <물방아 사랑>으로 유행가요계의 기린아로 소개되었고, 1938년 발표한 이노홍
작사•박사춘 작곡<애수의 소야곡>으로 조선 가요계의 레전드 가수로 등극하게 된다.
4. 이난영 (1916~ 1965) 전남 목포 본명 이옥례 부군: 김해송
대표곡 1935년<목포의 눈물>, 1937년<해조곡>, 1939<다방의 푸른 꿈>
1942년<목포는 항구다>
1935년 <목포의 눈물>이라는 한 편의 유행가가 조선 전국을 휩쓸어, 전남 해안가에
위치한 항구 도시 목포는 일약 낭만과 추억의 고장으로 만들었다.
“ 사공의 뱃노래 감을 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데/
부두의 새악씨 아옹저진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나 목포의 설움 “
호남지방은 비옥한 곡창지대인 동시에 목화산지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일제는 전북 군산항, 전남 목포항을 통해 이 곡창에서 나는 쌀만 하더라도 1920년에
185만석, 1922년에 970만석을 일본으로 송출했으니 조선 농민은 낡은 옷을 입고
기아에 시달리다 못해 토지를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야 했는데 항구 또한 민족의
비애가 서린 이별의 무대를 상징한다.
‘이난영’이란 예명은 태양극단의 단장인 박승희가 붙여준 것이다. 가요계의 불멸의
여왕으로 군림한 그녀지만 데뷔는 극장의 막간 가수였다.
그것도 처음에는 무대에 서기는커녕 밥 짓기 등 부엌일을 도맡았다고 한다.
1933년에 취입한 태평레코드의 <불사조>가 그녀의 데뷔곡이다.
OK레코드에서 1935년 9월 신보로 발매된 <목포의 눈물>의 대성공은 이난영을
‘가요의 여왕’으로 끌어올려 그 자리를 탄탄하개 다져주었다.
1936년에 ‘오카 란코’란 이름으로 일본 가요계에 진출 했다. 1937년 발매한
이노홍 작사•양상포 작곡 <해조곡>은 대 히트를 친다.
“ 갈매기 바다 위에 울지 말아요/ 연분홍 저거리만 눈물 젖는데/
저 멀리 수평선에 흰 돛대 하나/ 오늘도 아 가신 님은 아니 오시나
1939년 남편 김해송이 만든 브루스 조의<다방의 푸른 꿈>은 검은 의상으로 몸을
감싸고 약간 코맹맹이 소리로 애조 띠게 노래를 해 관객을 매료시켰다고 한다.
6.25동란으로 남편을 인민군에 끌려가 생이별을 하고 일곱 자식과 함께 남겨졌으나
절망하지 않고 음악을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겠다 결심하고 도미하여
만든 보컬 팀, 김시스터즈로 셋 중 가운데 딸은 친오빠인 박시춘(=이봉용 )의 딸이다.
5. 황금심 (1922~ 2001) 경남 동래,(1921년 서울 청진동) , 본명 황금동 부군: 고복수
대표곡 1937년<알뜰한 당신>, 1939<삼다도 소식>
1937년 말 가요계에 데뷔한 황금심은 조명암 작사 전수린 작곡 <알뜰한 당신>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민요조 가수였다.
OK사에 이미 스카웃 되어있던 그녀를 당사 문예부장대리인 김상진이 손목인과 박시춘
에게 소개했고 스타소질 있음을 인정한 두 작곡가는 그녀를 위해 각각 <지는 석양 어이 하리>
와 <왜 못 오시나요> 곡을 지어 1938년 발매 예정으로 녹음을 한 상태였는데 철모르는
황금동은 빅터레코드사와 전속계약을 맺어버리는 사건이 있었다. 법정타툼까지 갔으나
전수린 등의 설득으로 해결되 빅타에 입사하게 된다.
대표작으로는 이노홍 작사•박시춘 작곡<왜 못 오시나요>, 이무풍 작사•조자룡 작사<여창에
기대여>, 화산월 작사•문호웡 작곡<만포선 천리 길> 등이 있다.
손목인 = 양상포 , 이노홍=박노홍=이무풍 보면 된다.
반도악극좌에서 활약하던 황금심은 무대공연을 통해 알게된 고복수와 1941년 집안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을 한다.
6. 장세정 (1921~2003) 평양
대표곡 1937년 <연락선은 떠난다>, <아시나요>, 1939년<항구의 무명초>,
1940년<잘 있거라 단발령>, 1941년<역마차>, 1948년<울어라 은방울>
관부연락선 그것은 일제에 의한 조선 식민지 지배의 축도이기도 했다.
강제 연행되어 감방 같은 방에 갇힌 채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면서 강제 노동에 동원되던
조선인은 많았다. 1923년 관동지진 대학살 사건을 비롯하여 각지의 공사현장, 탄광, 공장에서
차별받으며 혹사된 조선인의 원한이 여기 저기에 서려있었다.
1930년대 중반에 등장한 그녀는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 실연 등의 노래를 많이 불렀다고 하나
당시 가수들이 즐겨 부른 민요나 타령풍의 노래 보다는 재즈나 블루스 등 서양 가락에 맞추면
서도 조선민족 정서에 맞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애인에 대한 그리움의 사연, 이별의 사연, 부두에 얽힌 사연, 국경선에 얽힌 사연 이 모든 사연이
그 시기에 우리 조선민족이 겪는 사연들었습니다.
평양 화신백화점의 상신악기점 점원으로 일하던 장세정은 OK레코드사의 1937년 2월 발매된
박영호 작사 김송규 작곡 <연락선은 떠난다> 한 장의 데뷔곡으로 가요계의 신데렐라가 된다.
1940년 11월 발매된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사 <잘있거아 단발령>은 그녀의 목소리와 창법을
최대한 살린 곡으로 고음을 살린 여운있는 멜로디에 그녀의 뛰어난 가창력이 돋보인다.
7. 백난아 (1923~ 1992) 제주 한림 본명 오금숙 부군 : 이재호
태생은 제주이지만 온가족이 함북 청진으로 이사 어린시절를 그곳에서 보냈다.
대표곡 1941년 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 <찔레꽃>, 1949년 <낭랑18세>
1940년 태평레코드사와 조선일보가 공동 주최한 콩구르대회 에서 2등 입상했고,
같은 해 빅타레코드사가 주최한 청진 콩쿠르 대회에서는 1등을 차지 실력이 알려짐
그 해 선배가수 백년설로부터 예명 백난아를 받고 '오동동 극단'을 취입하였고
<망향초 사랑>, <도라지 낭랑> 등 해방 직전까지 태평레코드 전속 가수생활 했다.
1941년 태평레코드사 주최 '레코드예술상 회령대회'에서도 1등을 받았다.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낭랑18세>는 1949년 럭키레코드에서 취입 한 것이다.
출생 년도가 다양하게 나오는 것은 나이를 속이고 활동한 까닭이요 1930년도에
백년설의 양녀로 입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8. 김정구 (1916~ 1998) 함남 원산
대표곡 1938년<눈믈 젖은 두만강> 김용호 작사, 이시우작곡
뉴코리아레코드 1936년 4월 신보 <삼번통 아가씨>로 데뷔 '최선' 여가수와 듀엣
1938년 2월 신보 <왕서방 연서> 김진문 작사 , 박시춘 작곡 히트
1938년 2월 신보 <바다의 교향시> 조명암 작사 손목인 작곡 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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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13. 한바다.
참고문헌
위키디 백과사전
한국가요사(1894-1945) 박찬호 2000 도서출판 미지북스
한국대중음악사 산책 김형찬 2015 알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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