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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는 영조16년(1740년) 경신년 겨울 65세 나이에 양화나루 건너에 있는 양천현의
현령(종5품)으로 승진 발령된다.
양천은 지금 강서구 가양동으로 서해의 세곡선이 오르내리는 경강의 인후에 해당하며
한성부와 강화를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뿐만 아니라 삼각산으로부터 북악산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화강암봉들과 남산 그리고 한강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펼쳐져 天下絶勝을
만들어내고 있어 그 내력을 일목요연하게 조망할 수 있는 곳은 양천만한 곳이 없다.
지금도 한강하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아득하게 넓어지는 강폭을 앞에 두고 바라보면
그 곳이 서울 북산을 관조하기에 더 없이 좋은 장소임을 알 수 있다.
사생을 위해 승선하여 경강을 오르내리는 것 외 양천현아 뒷편 나지막한 궁산에 오르면 눈에
담기는 풍광이 그대로 겸재의 붓끝에서 진경산수로 빚어지게 되었다.
산 뒤편 기슭에는 당대의 문사 이유가 지은 소악루가 있어 겸재에게는 이곳이 한강의 경치를
사생하기에 더 없는 장소가 되어주었다.
한강상류를 바라보며 달이 뜨는 모습을 그린 ‘소악후월’ 과 남산 너머로 벌겋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포착하여 그린 ‘목멱조돈’ 등 이십여 폭의 한강변 진경산수가 이 시기에 그려졌다.
경교승첩 상권에는 19폭, 하권에는 14폭의 그림이 그려졌는데 상권과 하권의 그림들은
화법이나 화재에 있어 사뭇 다르다. 하권에는 묵법이 한층 부드러워진 그림이 많치만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겸재 특유의 진경을 맛보기 어렵다고 한다.
또한 수려한 강변풍경으로 일관된 상권과 달리 하권에서는 그림의 소재가 일정치 않다.
경교명승첩에 수록된 그림은 다음과 같다.
상권. 19폭
독서여가, 녹운탄, 독백탄, 우천, 미호, 석실서원, 미호2, 삼주삼각산, 광진, 송파진,
압구정, 목멱조돈, 안현석봉, 공암층탑, 금성평사, 양화환도, 행호관어, 종해청조,
소악후월, 설평기려, 방천부신
하권1. 6폭
인곡유거, 양천현아, 시화환상간, 홍관미주, 행주일도, 창명낭박
하권2. 8폭
은암동록, 장안연우, 개화사, 사문탈사, 척재제시, 어초문답, 고산상매, 장안연월
이다.
[ 광진 ]
워커힐 호텔과 아파트 등이 들어서있는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 일대를 그렸다.
아차산을 중심으로 그리면서 광나루의 명미한 풍광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두어
강산이 어우러지고 그 사이에 별서가 운치있게 경영된 사실을 집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산은 마치 원산인 듯 굵은 필선으로 대강 외형을 잡은 다음 연두빛 일색으로
전체를 칠하고 있다.
[ 녹운탄 ]
깍아지른 듯한 절벽아래 여울 물살이 거센 듯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배에서는 사공들이
있는데로 다 나와 앞뒤에서 삿대와 노질에 여념이 없다.
절벽 위 등너머 산 밑에는 제법 살만한 터전이 있어 번듯한 기와집들이 들어서고 벼랑끝
높은 곳에는 정자가 있다.
[ 독백탄 ]
독백단은 현재는 쓰지 않는 지명으로 겸재시대에도 겸재나 사천같은 아취있는 문사들이나
이렇게 표현했을지 모른다.
스승 삼연조차도 '단구일기'에서 족백단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일기내용을 통해보면 족백단은 분명 마재에서 남한강변의 월계 사이에 있어야한다.
남북한강이 어우러지는 양수리 근방 어느곳인데 그런 곳이 족자섬 한 군데 밖에 없다.
바로 이 우리말 족자섬 여울, 즉 족자여울을 한자로 차기하면서 족백단이라 했던 것이다.
족은 음을 취하고, 백은 잣 柏(백)으로 의역해 훈을 취한 것이다.
이를 겸재는 족이라는 음까지도 순 우리말인 쪽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의역하며 음가가
비슷한 독으로 표기해 쪽자여울 모두를 훈역한 이름인 독백단으로 개명한 듯하다.
남양주시 운길산에 자리잡은 수종사에서 내려다본 두물머리 풍광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수종사 경내에서 바라다보는 두물머리의 사시사철 풍광, 일출과 일몰 운해까지
매우 아름다운 운치를 간직한 곳이기 때문이다.
[ 동작진 ]
지금 동작대교가 놓여있는 동작나루를 강북쪽에서 보고 그린 것이다.
멀리 관악산 우면산이 원경으로 처리되고 현재 국립묘지가 들어서 있는 강 건너 동작마을 일대가
그림의 중심에 있다.
지금은 지하철이 뚫려있는 동작봉 제일 높은 봉우리 밑으로는 과천가는 큰 길이 나 있던 것을 알수
있는데 강변 쪽으로 작은 산언덕 하나가 봉싯 솟아나서 운치를 더해준다.
반포천이 한강으로 흘러드는 이수교 일대는 저지대라 버드나무숲이 가득 우거지고 흑석동쪽
강변마을 역시 버들숲으로 가려져 있다.
[ 목멱조돈 ]
목멱산은 남산이 다른 이름이다. 남쪽 산을 순 우리말 '마뫼'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마뫼는 마산(馬山) 또는 마시산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한강 하류 양천 현아 쪽 지금의 가양동 쪽에서 보면 남산이 이렇게 보인다.
서북쪽으로 멀리 떨어져서 목멱산 동쪽의 낙은 봉우리가 엇갈려 나와 먼저 보이고 서쪽의 높은
봉우리가 그 뒤로 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철이 되면 아침해가 그 높은 봉우리 등줄기에서
솟아오르게 마련이다.
강너머 남산 밑으로 낮게 깔린 구릉들은 만리재 에오게 노고산 와우산 등일 텐데 엷은 먹선으로
쳐낸 산의 윤곽 위에 연두빛으로 안개나 딜빛 등 은은한 분위기를 표현하는 훈염법으로 처리하고
그 위에 다시 푸른빛 도는 먹색으로 엷게 묻칠하여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각의 야산임을
강조하고 있다.
태양이 떠오르는 남산은 한결 밝게 연두빛으로 산 전체를 우려내고 울창한 송림을 상징하기 위해
대미점보다는 큰 먹점을 가로로 겹겹찍어 중봉 이상은 온통 검게 물들여 놓았다.
흥건한 먹빛과 주홍빛 태양은 신묘한 음양조화를 암시하는데 양천쪽에서 바라본 남산 모양이
신비로운 여체를 연상시키는 분위를 더욱 고조시킨다.
'목멱산에서 아침해가 돋아 오르다'라는 뜻으로 쓴 시제 <목멱조돈>은 사천에 겸제에게 보낸 시의 제목이다.
양천현의 동헌인 종해헌이나 파산 기슭에 세워진 소악루에 앉아서 보면 이처럼 남산 위로 해가 떠오를 것이다.
사천은 남산의 일출을 보며 여러 상념에 젖었을 겸제를 떠올리면서 이러한 시를 지어 보냈다.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언덕들 낚싯배 가린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종남산에서 오르리라.
[ 삼주삼산각 ]
석실서원말에서 서남류하는 물길을 따라 한두 모퉁이를 돌아 내려오면 광릉 사릉 동구릉쪽의 물을 모아오는 왕숙천
이 합류하는 외미음이 나온다. 이곳이 겸재의 스승 농암 김창협이 터를 잡아 살던 곳으로 농암은 이 앞에 모래밭이
세 군데 있다하여 삼주라 이름 짓고 삼산각을 지어 살았다 하니 이 그림 중앙에 자리잡은 집이 바로 농암이 살던
삼산각일 것이다.
큰 언덕 아래 번듯한 기와집이 삼산각일 것이고 , 세 채의 집 중 맨 앞에 있는 것이 외사랑으로 농암이 머물며 삼산각
이란 현판을 걸었던 집인가 보다. 기와를 인 반듯한 담장을 두르고 그 밖으로는 동쪽에 노손 몇 그루가 서 있고 서쪽
에 잡목으로 둘러쌓인 초가로 지은 작은 집인 협호가 몇 채 있다.
역시 연두빛 일색으로 화면을 화사하게 처라하면서 해삭준이나 피마준계통의 부드러운 선묘를 지극히 절제해 쓰고
미점도 성글게 찍어 밝고 섬세한 분위기를 살리려한 특징을 보인다.
[ 석실서원 ]
양수리에서 남 북한강이 만나고 능내리에서 소내와 합쳐지면 두미천의 협곡을 뚫고 서북쪽으로 흐른다.
두미천 협곡이 수십리 이어지다가 평지에 나서게 되면 다시 강은 두 줄기로 갈라져 방장도라는 큰 섬을
만들면서 서북류하는데 이 방장도가 바로 당정리와 미사리이다.
두 줄기가 되었던 강물이 미사리 앞에서 다시 합치며 좁은 물목에서 꺾여서 남류로 방향을 틀어가는
곳의 북쪽 대안이 곧 석실서원촌이다.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미금시 수석동인데 석실이나 서원말이라
해야 알아 듣는다.
전경을 연초록빛 일색으로 설채하여 초봄의 새틋한 맛을 강조하는데 겸재 그림에서 드물게 보이는
전답 표현이 있어 가능한 사실에 충실하려했던 그림으로 보인다.
[ 소악후월 ]
소악후월이라는 제목은 소악루에서 달 뜨기를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양천읍지'의 누정조에 다음과같은 기록이 있다.
악양루 옛터에 소악루가 있으니 현감 이유가 지은 것이다. 그는 자를 중구, 호를 소와 또는 소악루라
하는데 영조 조에 동복현감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중국 악양루 제도를 모방해 누각을
창건하고 소악루라 이름 했다.
겸재가 부임한 양천현의 읍지는 지금 강서구 가양동 파산 아래에 있었다.
겸재는 소악루에서 달맞이 하는 정경을 한 화폭에 담기위해 소악루를 근경으로 잡고,
달이 떠오르는 한강 상류를 원경으로 잡았다. 그러자니 소악루 뒤편 성산 위에서 소악루와
한강 상류를 바라보는 시각이 될 수 밖에 없다.
솔품이 우거진 성산 등성이 아래에 큼직한 소악루 건물이 있도 그 주변으로 잡목이 가득
우거져 있다. 강변 아래에는 거목이 된 버드나무 몇 그루가 늘어진 자지들을 탐스럽게
풀어 헤쳐 푸르름을 자랑하는데 둥근 달은 남산 너머 저쪽 관나루 근처에 둥실 떠있다.
달빛에 숨죽인 어둠이 간 건너 절두산 절벽을 험상궂고 후미지게 만든 다음 선유봉, 두미암,
탑산 등 강 이쪽 산봉우리들을 강 속으로 우뚝우뚝 밀어 넣고 있다.
강건너로는 삼각산 연봉이 백색의 신비로움을 자랑하며 줄기줄기 내려와 북악과 인왕으로
이어지는 장관이 한눔에 잡히고 동남으로 돌리면 한강 상류 저 건너편에 남산이 우뚝 솟아
있다.
소악루와 본채 등 큰 기와집들은 숯 속에서도 그 위세가 당당하지만 그 아래 초거집은
그대로 달빛 어린 숲 그늘에 파묻힌 느낌이다.
이런 대조적인 표현이 부름달 뜨는 밤 소악루 주변의 경치를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로 이끌고있다.
[ 송파진 ]
멀리 남한산성이 산능선을 따라 굽이굽이 웅장하게 둘러지고 그 안에 청저하게 보호되어 길러진 노송림이
성벽위로 솟아나니 마치 성위에 녹색 휘장을 둘러 놓은 듯 하다.
이것이 남한산성이 본 모습이며 그다운 아름다음이라하겠다. 녹음이 짙은 한 여름이나 새싹이 돋는 봄철,
단풍든 가을, 눈 쌓인 겨울 언제 보아도 소나무가 사시사철 푸르기 때문에 남한산성은 늘 이렇다.
남한산성에서 줄기줄기 내려오는 산자락들이 송파의 동쪽은 감싸지만 삼전도 쪽인 서쪽에서는 그 산자락이
멀리 끊어진다. 이런 단절된 공간을 드러내기위해 초록빛 색칠을 먼산 아랫자락에서 흐리며 바탕색을 그대로
남겨 마치 아지랭이 속에 잠긴듯 중간을 비워두었다.
송파진은 지금 송파대로가 석촌호수를 가로지른 후 생긴 동쪽 호숫가에 있던 나루터다.
사실 송파나루 일대는 한강물이 마음대로 흩어질 수 있는 평야지대다.
한강은 양수리에서 남북한강 물이 합쳐서 큰강을 이룬 후 예봉산 검단산 등 큰 산 사이 협곡을 따라 서북
쪽으로 흐르다가 한양 부근에 와서 아차산과 암사동쪽 매봉자락에 의해 일단 물목이 좁아진다.
남쪽에서 우면산 자락이 밀고 올라와 봉은사가 있는 삼성산 일대의 구릉을 만들어 매봉과 마주보며 물목을
좁히기 때문이다.
남쪽에서 수원 용인의 물들이 북류하여 봉은사 동쪽에서 한강으로 흘러드니 이것이 탄천이다.
중랑천은 의정부에서부터 천보산 도봉산 수락산 삼각산 등의 물을 모아오고, 청계천은 한양 서울의 물을
몽땅 모아 온다.
송파진은 한양과 남한산성 및 광나루에서 각각 20리씩 떨어져 있던 교통의 중심지였다.
부근에 큰 도선장인 삼전도가 있으나 병자호란 후 기피하는 경향이 짙어 삼전도승을 송파진으로 옮겨 별장
으로 하고 수어청으로 하여 관리하였다.
부근의 송파장은 큰 장시로서 객주 거간을 비롯한 도선주들이 모여들어 그에 따라 송파진의 역활이 컸다.
[ 양화환도 ]
양화진은 마포구 합정동 30번지에 있던 나루다.
한양 서울에서 양천이나 김포, 부평, 인천, 강화 등 경기도 서부지역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이 나루를
건너야 한다. 그래서 일찍이 한양 서울의 뢰백호에 해당하는 길마재 줄기가 한강으로 밀고 내려오다
강물에 막혀 불끈 소구친 바위절벽이인 잠두봉 북쪽 절벽아래에 나루터를 마련하고 이를 양화나루라
하였다.
이곳에서 출발한 나룻배는 맞은편 강기슭인 경기도 양천현 남산면 양화리 선유봉 아래 백사장에
닿았다. 이곳 역시 양화나루였다.
양천 양화리는 그 동네 한강가에 버드나무 숲이 우거져 버들꽃이 필 때면 장관을 이루기에 ' 버들꽃
피는 마을' 이라는 뜻으로 이런 이름을 얻었다.
양화나루는 잠두봉이나 선유봉 쪽 모두 삼각산으로부터 관악산에 이르는 서울주변의 명산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뿐만아니라 광활한 백사장과 호수같이 너른 강물이 아득히 아래 위로 이어
져서 정쾌무비한 장강풍정을 만끽할 수 있다.
배들은 모두 양화진영이 있는 잠두봉 아래 나루터에 매 두었던 듯 그쪽 강안 곳곳에 여러 척이 배가 보인다.
광막한 한강수를 가운데 두고 이쪽 선유봉은 삼각진 로똑한 자태로 날카롭게 솟아 있고 저쪽 잠두봉은
비록 강안에 솟구친 절벽이로되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역시 겸재가 의도한 음양대비일 것이다.
[ 종해청조 ]
宗海聽潮 종해청조라는 그림의 제목은 양청현의 현령이 동헌인 종해헌에 앉아서 조수 밀리는 소리를 즐기고
있다는 내용이다. 양천현 관아가 현재 양천향교 서남쪽 가양동 239 일대인 성산 남쪽 기슭한 강가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실재로 이 그림에서 겸재라고 생각되는 벼슬아치 한분이 사모관대 차림으로 종해헌
2층 누마루 난간에 기대 앉아 있다.
이때 한강에서는 밀물이 강물을 제압하여 사나운 기세로 역류하고 있는 듯하다.
이 그림은 관아 뒷산인 성산에서 내려다 본 시각으로 그린 것이다.
조수가 밀려드는 드넓은 한강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난지도를 비롯한 모래섬들을 강 건너에 수없이
그려놓고 돛단배도 아래 위로 여러 척 띄어 놓았다. 그리고 강 상류에는 동쪽에 남산을 서쪽에 관악산을
먼 산으로 그려 놓았다.
[ 행호관어 ]
'행호에서 고기잡는 것을 구경한다' 는 뜻이다. 한강물이 용산에서 서북쪽으로 꺾여 양천앞에 이르면
맞은편 수색과 화전 등 저지대를 만나 강폭이 갑짜기 넓어진다. 그래서 안양천과 불광천이 강 양쪽에서
물머리를 들이미는 곳부터 서호 또는 동정호 등으로 부르게 되는데 창릉천이 덕양산 자락을 휘감아돌며
한강으로 합류하는 행주 앞에 이르러서는 그 쪽이 더욱 넓어 진다. 이곳을 행호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양천현아 뒷산인 성산에 올라 서북쪽으로 행호를 내려다 보는 시각으로 그렸다.
당연히 현재 행주외동 일대의 행호강변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 행호에서 고기잡이가 한창이라 배들이 때를 지어 그 너른 행호 물길을 가로막고 그물을 좁혀 나가는
듯하다. 이곳에서 이처럼 큰 규모의 고기잡이 행사가 벌어지는 것은 행주 웅어와 행호 하돈(황복어)으로
널리 알려진 별미 중의 별미가 잡힐 철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모두 임금님 수라상에 오르는 계절의 진미이므로 사옹원에서는 제철인 음력3,4월이 되면 고양군과
양천현에 그 진상을 재촉했다한다. 그러면 두 군에서 고기잡이 배를 모아 본격적으로 웅어와 복어 잡이에
나섰다. 즉 이그림은 그 아름다운 행호에서 전개되는 고기잡이모습을 그려 낸 것이다.
오른쪽 덕양산 기슭에는 죽소 김광욱의 별서인 귀래정 건물이 들어서 있고 가운데에는 행주대신으로 불리던
장밀헌 송인명의 별서인 장밀헌 건물이 큰 규모로 들어서 있다. 송인명은 당시 좌의정이었다.
그리고 지금 행주대교가 지나가고있는 덕양산 끝자락 바위 절벽 위에는 낙건정 김동필의 별서인 낙건정
건물이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런 행주 일대의 별서들은 겸재와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낙건정 주인 김동필은 사천 이병연의 이종사촌 아우였다. 뿐만아니라 낙건정 김동필의 둘째 자제인 상고당
김광수는 당대 서화골동 수집의 제일인자로 겸재 그림을 몹씨 좋아하던 인물이었다.
귀래정 주인 동포 김시민은 겸재와 사천인 스승 농암과 삼연의 삼종질로 문인이라서 겸재와 사천과는 동문시우
였으며 스승들이 인가한 진경시의 대가였다.
[ 독서여가 ]
초가 지붕아래 두 쪽 송판 툇마루 위에 사방관을 쓴 한 선비가 나와 앉아 왼손은 마루를 집고
오른손에는 쥘부채를 펴든채 반쯤 기대어 앉아 앞을 응시하고 있다. 많치 않은 수염을 기르고
눈매가 날카로우며 이마가 훤칠하고 체구가 작달만한 이 양반은 누구일까
겸재가 50대 초반 백악산 아래 유란동에서 생활하던 모습을 그려낸 자화상으로 보고있다.
이 그림 속에는 두 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하나는 책장문에 장식되어 있는 그림이며, 다른
하나는 그림 속 인물이 펼쳐든 쥘부채에 그려져 있다. 방안의 책장에는 책이 겹겹이 쌓여 있어
책 읽기를 즐기는 선비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책장문에 장식된 겸재 그림에서 이 방이 겸재의
서재임을 알 수 있다.
방의 열어젖힌 곁문을 통해 향나무 둥치가 보이며, 툇마루 앞 마당에는 난과 함께 모란꽃 화분이
놓여있다. 독서를 하다 남은 겨를에 꽃을 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물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꽃이 아니라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날카로운 눈매로 앞을 매섭게 쏘아보는 것이 사뭇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
[ 시화환상간 ]
我詩君畵換相 看輕重何言 論價間
내시와 자네 그림을 서로 바꾸어보니 그 사이 가치의 경중을 어찌 말로 논할 수 있겠는가
정선과 사천 이병연 두 막역지우가 갓을 벗고 상투 차림에 서로 격이없이 마주 앉아 물 맑은
개울가 노송밑에서 시를 쓰는 종이와 그림그리는 종이를 펼쳐놓고 시화를 논하며 시화환상간의
약속을 하는 모습이다.
정면에 얼굴을 보이고 앉은 노인이 이병연이고 그와 마주앉아 뒷모습과 옆모습만 보이는
콧대 높은 노인이 정선이라고 한다. 그리멀지않은 곳으로 부임해가는 친우가 못내 섭섭해
시와 그림을 바꿔보자고 약속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한양에서 양천이면 가까운 거리건만 심지어 벼슬을 받아가는 자리것만 두 老友의 이별이 절절
하기까지 합니다. 그아쉬움을 달래고져 詩畵를 주고받는 약조를 합니다.
이 약조가 투철하게 지켜진 덕분에 두 친구가 주고받은 시화첩이 경교명승첩이됩니다.
겸제가 양천으로 떠나지 평생지기 사천 이병헌은 석별의 아쉬움을 시로지어 표현했다고 한다.
자네와 나를 합쳐 놔야 왕망천의 될 터인데
그림 날고 시 떨어져 양쪽 모두 허둥댄다.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지 보이니
강서에 지는 노울만 원망스레 바라본다.
양천은 지금은 서울에 편입되었응 정도로 강 하나를 사이에 둔 고을임에도 이별을 이토록
아쉬어하고 있으니 이둘은 참으로 각별한 우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인곡유거 ]
인곡유거는 겸재 정선(1676~1759)이 살던집의 이름이다.
인곡유거가 있던 자리는 종로구 옥인동 20번지 부근이다.
[ 개화사 ]
현재 강서구 개화동 332 번지( 김포국제공항의 동북쪽 )에 있는 개화산 약사사의
겸재 당시의 모습이다.
그 때는 주룡산 개화사라 했기 때문에 개화사로 그림 제목을 삼았다 한다.
[ 장안연우 ]
봄을 재촉하는 이슬비가 촉촉히 내리는 날, 서울 장안을 육상궁(청와대 서편) 뒷산쯤의 북악산
내려다 본 전경이다.
연무가 낮게 드리워 산 위에서는 먼 경치가 모두 보이는 그런 날이 었던 모양으로 남산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멀리는 관악산 우면산 청계산 등의 연봉들이 아련히 이어진다.
비록 남대문로와 운종가 일대의 번화가가 운무에 가려져 있다하나 효자동 청운동 일대에서 동쪽으로
광화문과 종로 초입까지, 서쪽으로는 서울 역사박물관이 있는 경희궁 근처까지 표현하고 있어 당시
인구 18만 남짓이 살던 한양서울의 진면목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
[ 장안연월 ]
장안연우와 같은 시각으로 육상궁 뒤 북악산 남쪽 기슭에서 서울장안의 안개낀 밤풍경을 내려다 보고
그린 그림이다. 보름달이 남산 위로 휘영청 밝게 떠 있는데 밤 안개가 낮게 드리워 어둠과 함께 萬戶長安의
수만은 인가를 모두 삼켜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키 높은 나무숲만 거뭇거뭇 보일뿐, 도시의 아름다운 모습은 짐작할 수도 없다.
아무리 달 밝은 밤이라 해도 밑에서 위로 올려다보면 달무리가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달빛이 밝는 탓에 저 멀리 관악산, 우면산 등의 먼 산이 아득하게 보이고 있다.
'승정원일기' 925책에 영조16년 경신 1740년 12월11일에 양천현령으로 부임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그해 여름 막역지우 사천 이병연과 시화환상간 약조를 했다고 하는대 이는 1736년 5월16일
겸재 모친의 별세로 청하현감직을 그만두고 상경했는데 그 다음해에 삼척부사자리를 버리고 사천이
올라와 있었다. 사천은 조석으로 상봉못하는 아쉬음을 떨칠수 없어 전별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전별시를 써주며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 시와 그림을 주고 받기로 약조를 했다고 한다.
迎吏楊花渡 마중 나온 아전과 양화 나루 건너니
津頭是縣衙 나루 끝이 바로 고을 관아라네
去都三十里 서울에서 삼십 리
闔境百餘家 집이라곤 모두 백여 채
政事元無獄 정사엔 본래 옥사(獄事)가 없고
樓臺但有茶 누대엔 다만 차(茶)가 있을 뿐
時時覓團領 때때로 울긋불긋 관복이 찾아드는 건
星蓋入江華 강화로 떠나는 사신들이라오
그 약속이 지켜져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지금 우리가 '경교명승첩'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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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서적
겸재의 한양진경 2004 최완수 동아일보사
겸재 정선 2009 최완수 (주)현암사
2016.11.23. 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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