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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연 세본담채 해악전신첩 간송미술관 소장
위 그림은 겸재의 나이 72세인 1747년 금강산 제3차 답사여행을 다녀오다
들려 그 장관을 화폭에 옮겨 표현한 작품으로 “해악전신첩”의 21면 그림 중
하나로 만년의 진경산수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삼연선생이라 불리었던 그의 스승 김창흡(1653-1722)의 호 삼연은 물론
삼부연(三釜淵)을 상징하는 별호이다.
삼부연은 강원도 철원군 갈밀읍 용화동, 용화산 일대의 물이 한탄강으로 흘러
내려가다 천길 벼랑을 만나 떨어져 생긴 폭포이다.
높이 20m 절벽과 3개의 웅덩이가 있어 이무기 3마리가 승천했다는 곳이다.
다음의 사진은 실경을 찍은 것이다.
두 그림을 비교해보자. 실제 삼부연 폭포를 화폭에 그린 추정 위치에서 보면
용화산의 중첩한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보이는데, 폭포 위에 있는 평지의 완만한
시냇물을 상징하기 위해서 그 뒷봉우리들을 모두 생략해 놓았다.
이처럼 산천에 실재하는 경관을 그리는 산수화를 실경산수화라고 하면 한 거름
더 나가 산수의 진경을 그리되 재구성하여 화가가 내적으로 대상에서 느낀 기상
과 의미를 개성있고 독창적인 화법으로 표현한 것이 겸재풍의 진경산수화이다.
산수화의 진경시대(1675-1800)를 조선후기인 숙종에서 정조시대까지로 구간을
두는 것은 17세기 후반에 와서야 비로소 조선은 외침으로 인한 피해복구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중농정책의 효과로 농·상업이 발달하여 국태민안으로 한양의
상류층 사대부인 경화세족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신문화를 향유할 수 있게 돼서
시·서화에서도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인 중국풍의 옛것 귀향적 타성에서 탈피하여
현실과 경험을 중시하는 이 시대의 보편적인 가치관을 반영하는 예술론이 등장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겸재가 창안하여 우리의 산수를 대상으로 삼아 독자적인 양식으로 화면에
전개시킨 조선회화의 어엿함과 긍지를 드러내는 이 화풍은 심사정, 김홍도, 이인문
등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꽃피어져 , 빛나는 민족의 문화유산으로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것도 이시대의 경제발전에 의한 생활의 여유와 그로인해 자기문화에 대한
긍지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림을 감상하기 전에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정선의 생애를 잠시 살펴보는 것이
그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적어본다.
겸재 정선(1676-1759)은 숙종2년 병진년에 한성부(서울) 북부 순화방 유란동에
탄생했다. 지금은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일대니 인왕산 동쪽, 북악산 서남쪽
기슭으로 경복고등학교가 있는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대부집안으로 14살에 부친을 여의어 근처에 사는 외가의 도움도 받았다한다.
겸재는 어려서부터 노론의 4대신인 몽와 김창집(1648-1722)의 아우들인, 농암
김창협(1658-1721) , 삼연 김창흡(1653-1722) , 노가재 김창업(1648-1721)의
문하에 드나들며 성리학과 시문서화 수련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게 되고, 그들의
후원으로 진경산수 화풍으로 대성할 수 있었다 본다.
겸재가 진경산수화의 사상적기반이 되는 조선 성리학을 익혀 그 근본인 주역에
까지 정통하게 되는 것은 스승인 삼연의 가르침에 의해서고 화법과 화론에
정통할 수 있었던 것은 노가재의 가르침을 받는 결과라고 한다.
한편 겸재는 진경산수화로 대성 후 지금의 종로구 옥인동에 있엇던 자수궁 근처의
인왕곡으로 이사하였는데 이곳에서 진경문화의 일환으로 출현한 풍속화의 대가인
관아재 조영석(1686-1761)와 담을 맞대고 살게되었다.
그의 조부 파서 조봉원(1608-1691)은 당시 율곡학파의 수장인 우암 송시열과 뜻을
같이한 문신·학자로 관아재는 파서의 차남 조해의 막내인 넷째 자제로 그의 맏형은
농암의 제자가 되고 , 관아재는 우암의 제자인 이희조의 제자가된다.
그런데 관아재 집안은 당시 장동일대에서 명망을 날리던 안동김씨 가문과 학연,
혈연으로 겹겹이 맺어져 있었다.
그리고 당대의 진경시의 대가인 사천 이병연(1671-1751)은 인왕산 밑에서 태어난
죽마고우 사이로 이 두 사람의 우정은 정말로 깊었다.
겸재 만년의 대작 ‘인왕제색도’는 이 우정의 산물 중 하나로, 삼연에게서 진경시를
전수받은 동문지기 사천은 겸재와 함께 시·화의 쌍벽을 이루며 당대 조선의
진경문화를 주도하게 된다.
겸재는 화원이 아닌 사대부로서의 화가이다.
그는 집안형편 때문인지 과거를 통한 입신출세를 지향하지 않았지만
김창집(66세)의 천거에 의해 38세에 음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왕세자를 호위하는 위수라는 벼슬을 비롯하여 한성부주부 등 현감직도 맡는다.
당시 진경문화를 주도하던 동문지우들의 각별한 도움과 국왕 영조의 배려하에
영조 9년(1733) 봄에 58세 나이로 경상도 청하현감(종6품)으로 발령을 받아
전년 여름 삼척부사로 나가있던 사천 이병연을 만나 동해안 명승지를 함께 읊고
그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현감된지 3년 만에 모친상으로 상경하게 된다.
그리고 겸재 나이 65세 되던 해인 영조 16년(1746) 초가을에 양화루 건너에 있는
양천현의 현령(종5품)으로 승진 발령된다.
이때 겸재가 없는 동해연안의 고을살이가 부질없다고 익년에 삼척부사 자리를
버리고 상경해 있던 사천과의 사이에 ‘시화환상’이란 약조가 이루어 진다.
이는 둘 사이 조석으로 상봉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기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
으로 이 약조가 지키지게 됨으로 한강 주변 근교의 진경 33폭이 탄생하게 되는데
이것이 ‘경교명승첩’이다.
영조의 각별한 배려로 겸재는 80세에 첨지중추부사(종3품)와 81세인 영조 32년에는
종 2품인 동지중추부사까지 승진하는 영광을 얻는다.
장동은 종로구 통의동, 효자동, 청운동 등을 일컫는 옛지명으로 , 본인이 기거했던
인곡유거를 비롯하여 자신의 평생을 보냈던 장동주변 일대의 산수를 있는 그대로
가 아닌 대상의 윤곽과 질감, 그리고 중량감이 주는 상태나 색을 초월하여 본인이
내적으로 느낀 의미를 개성있게 표현한 작품으로 보면 되겠다.
영조27년(1751) 종이채색 29.5x33.7cm 간송미술관 소장
취미대
'산이 정상에 미치지못하면 취미라한다 山未及上, 翠微' 즉 취미란 산중턱을
일컫는 말이다. 푸른 빛이 점점 희미해진다는 산중턱을 가르키는 시어디.
취미대 영조31년(1755) 종이채색 28.5x33.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을 보면 이곳이 지금 청와대 동쪽 일대의 북악산 기슭이다.
폐허가 된 경복궁 북쪽 후미진 곳으로 인적이 드문 들판을 내려다 보고있다.
앞에 너른 들판이 호수처럼 비어 있고 그 너머로 경복궁 담장이라고 생각되는
회색빛 긴 담장이 둘러쳐져 있으며 담장안에는 노송림과 잡수림이 우거지고
저멀리 목멱산이 우뚝 솟아있다.
산자락 중터 오른쪽 하단의 높은 언덕위 소나무 숲 속에 높고 널은 암대가 솟아있고
그 위에 세 사람이 선비가 모여 있는데 이곳이 취미대인 모양이다.
현재 취미대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화폭에 재현된 풍경으로 미루어 볼 때
대은암과 가까운 북악산 남쪽 기슭으로 추정된다.
대은암 영조31년(175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북악산 기슭 육상묘 위쪽 바위를 그린 대은암은 취미대의 반대 시점을 취하면서 백악의 골짜기와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을 그리고 숲 사이에 축조된 세도가의 저택을 함께 그렸다.
대은암 영조 27년(1751) 종이 채색 29.5x33.7cm 간송미술관 소장
대은암
북악산 산기슭 중에서 가장 빼어난 집터는 종로구 세종로 산1번지 일대라고 한다.
북쪽으로 북악을 등지고 남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대은암은 옛날 남곤(1471-1527)의 집터인데 바위곁에 행랑채가 있으니 아직도
사람들이 지금도 널리 대은암이라 일컫는다'고 했다
훤출하게 키 큰 노송들에 가려진 초당 뒤로 검게 보이는 바위가 대은암인 모양,
초당 아래로는 만리뢰 개울물이 콸콸 여울져 흐르고 아래쪽에 번듯한 대저택이 있다.
본채와 사당채만 보인다. 노거수가 된 잡목 잎새들이 엷은 농도의 먹점 위에 짙은
농도의 먹점을 찍어 먼저 쓴 먹색을 파괴하는 파필점을 변형시킨 대담한 점법으로 짙게
난타하거나 담장 밖 수림을 못 끝으로 세워 놓은 듯 끝이 뾰족한 점인 첨두점을 빽빽이
채워놓은 것 등으로 보아 늦더위가 극성을 부리는 늦여름 어느날 정경이다.
독락정 영조31년(1755) 국립중앙박물관
대은암의 동쪽 끝자락에는 독락정이 세워졌다. 개울물이 흐르는 여울목의 돌 위에 지어진 띠로 엮은
소박한 누정이 바로 독락정이다.
독락정 영조 27년(1751) 간송미술관 소장
독락정
독락정은 지금 정와대가 들어선 세종로 1번지 동쪽 산골짜기에 있던 정자이다.
이그림이 그려질 당시, 북악산 남쪽 기슭 일대를 대은암동이라 불렸다 하니 그 때로
보면 대은암동의 동쪽 끝자락에 있던 듯하다.
'독락정' 진경에서 북악산 상봉 부근 공쪽 기슭에 비들기바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그림은 독락정 부근 산 중턱 부분만 그렸기에 부근에 익숙하지 아니하고는 알아보기
어렵기에 능선 위에 비들기바위를 표현해 놓았다.
휘둘러서 어지럽게 두드리는 휘쇄난타하여 암벽을 대담하게 그 특징만 드러내 놓고
대부분의 바위산은 희미한 윤곽선안에 바탕색을 그대로 방치한 채 미점 계통의 가로점을
군데 군데 찍어서 초목을 상징했다.
그리고 푸른색이 도는 먹빛흔적으로 대담하게 골짜기와 산기슭을 우려내니 자욱한
북악의 늦여름 정취가 화면에 가득 넘친다.
두 폭의 그림 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 더 추상적이다.
간송본에는 석대 위에 올러앉은 비들기바위의 형상이 비록 거북머리 형태를 보이기는
해도 이를 받쳐주는 석대와 별개로 구분해 표현함으로 현무의 거북머리를 상장하는 듯하다.
청송당 영조31년(1755) 종이 채색 29.5x33.0cm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청송당 영조 27년(1751) 간송미술관 소장
청송당
청송당은 '솔바람 소리를 듣는 집'이란 뜻이다.
조선 중기에 큰 선비로 이름났던 청송 성수침(1439-1564)의 독서당 이름이다.
지금 종로구 청운동 89 경기상고 자리(현재 청운 중학교)에 있었다.
청송단은 청송이 34세 나던 해인 중종21년(1526) 병술 봄에 지은 것이다.
기묘사화로 스승인 정안 조광조(1482-1519)를 비롯하여 많은 사우들이 사약을 받는
등 화를 입자 청송은 출사를 포기하고 독서에 전년하기 위해 자신의 집 뒤에 청송당을
지었다 한다.
그의 학풍은 자제인 우계와 우계의 집우인 율곡에게 전해져서 장차 율곡파를 형성한다.
울창한 솔숲과 절벽을 이룬 바위들을 임리(물이 뚝뚝 떨어질 듯 흥건함)한 묵법으로
대담하게 처리했다. 방 두칸 마루 한 칸 퇴 반 칸인 듯한 청송당의 조촐함이 솔숲의
그윽한 정취와 함께 통창하고 고즈넉하게 드러난다. 증흐한 풍모의 노선비 하나가 시동의
인도를 받으며 유란동(겸재가 자란 곳) 개울을 건너 청송단으로 향하고 있다.
두 그림 다 시점을 허공에 띄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심원법을 구사하고 있지만
간송본이 더 가까운 시각으로 잡고 있어 그윽한 분위기가 더울 고조되고 있다.
반면 국립중앙박물관 본은 시점이 멀어져서 주변 경치를 한눈에 조망하게 함으로
청송당 일대의 뛰어난 경관을 총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게 한다.
창의문 영조31년(1755) 존이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창의문
태조실록 권10 태조5년 병자9월 24일 기묘 기록에 도성인 경성축조를 끝내고 사방의 정반에
4대문을 내고 그 간방에 4소문을 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있다.
이때 각 성문에 월단과 누각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4대문과 4소문 모두에 해당한 기사인지
알 수 가 없다. 그런데 사소문의 문루를 영조 때 비로소 세우는 것을 보면 국초에는 문루가
없었던 것 같다.
인왕산 자락과 북악산 자락이 서로 마주치는 골짜기 능선 위에 날아갈듯이 지어진 문루와
성문, 그 좌우 인왕산과 북악산 능선을 따라 날개를 펼치듯 뻗어나간 성벽 마치 날개를 퍼덕이며
내려 앉은 한 마리의 독수리 같은 형상이다.
군대 둔데 송림이 우거지고 작고 큰 바위들이 널려있는데 성안 바위산은 기운찬 부벽찰법
(험준한 바위를 그릴 때 붓을 빗자루 쓸듯 사용하는)으로 쓸어내리지 않고 그와는 대조적인
아주 부드러운 피마준을 구사했다.
인왕산 북쪽 끝 봉우리인 백련봉은 한 덩어리의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백색 암봉이다.
백운동 영조31년(1755) 29.5 X 3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운동
백운동은 인왕산 자락이 북산 자락과 마주치는 인왕산 동편 북쪽 끝자락에 해당하는 곳의 지명이다.
지금은 종로구 청운동 8 일대로 자하문 터널과 이어지는 자하문길 서쪽 골짜기이다.
청운동이란 이름은 1914년 일제가 경성부제도를 실시하며 동리를 통폐합하여 동명을 개칭할 때
그 아랫동네인 청풍계와 백운동을 합쳐지은 것이다.
이곳은 인왕산의 세 봉우리 중 중앙에 해당하는 낙월봉 줄기가 흘러내려 북악산 자락과 마주치는
곳이어서 계곡이 깊고 개울물이 풍부하며 바위 절벽이 아름다워 일찍부터 도성에서 가장 빼어난
명승지로 꼽혔다.
주변 모든 산이 암산일 터인데 겸재 특유의 부벽찰법을 쓰지 않고 다만 담묵 담청의 훈염( 붓질을
할 때 움푹히 들어간 부분은 붓질을 거듭함으로 어두운 느낌을 주고 도드라진 부분에는 덜하는)과
태점과 피마준 만으로 부드럽게 산을 처리하고 있다.
청휘각 영조31년(1755) 국립중앙박물관
청휘각
청휘각은 련재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부근에 있던 정저이다.
청음 김상헌(1570~1652)의 손자인 문곡 김수항(1629~1689)이 벼술이 높아지자 여러곳에
저택을 마련했는데 그 중 옥류동 저택의 후원에 지었던 정자가 바로 청휘각이다.
청휘각이란 비갠 뒤 맑은 햇빛이 찬란하게 비치는 집이라는 뜻이다.
청휘각이 지어진 것이 겸재 11세 때의 일이다. 그러니 겸재는 스승인 삼연 김창흡과 농암 및
노가재 김창어업을 찾아 뵙기 위해 어려서부터 자주 이 청휘각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장동팔경 그림 중에 당연히 들어갔을 것이고 더구나 50대 이후에는 겸재가 바로
청휘각 곁으로 이사와 살았다고 한다.
겸재가 70대 중반 이후에 그렸을 이 청휘각에서는 익숙한 주변 경치를 능란하게 그렸을 사실을
직감할 수 있다.
겸재는 인왕산을 타고 흐르는 옥류동 계곡과 그 아래 세워진 청휘각을 소박하게 재현했다.
청풍계 영조6년(1730) 종이 채색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26.0x96.2cm
청풍계
청풍계는 인왕산 기슭의 북쪽에 해당하는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 골짜기를 일컫는 이름이다.
원래는 푸른 단풍나무가 많아서 청풍계(靑風溪)라 불렸는데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다 순국한
우의정 선원 김상용(1561-1637)이 별장으로 꾸미면서부터 맑은 바림이 부는 계곡이라는 의미인
淸風溪로 바뀌었다고 한다.
척화파의 좌장격인 동생 김상헌이 청나라에 잡혀가자 형 김상용은 치욕스럽게 살지 않겠다하여
강화도성 남문에서 폭약에 불을 붙여 자결하였다.
그 절개를 높이사 우암 송시열이 이곳 청풍계 바위에 선생의 절의가 자손만대에 이르라는 의미로
각자를 새겨놓았다.
청풍계곡 물이 흘러 흘러 조선시대의 개천으로만 불렸던 청계천 시내가
청계천이란 이름을 얻게되었다고 한다.
수성동 영조27년(1751) 간송미술관 소장
수성동
수성동계곡은 인왕산과 맞닿은 옥인동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데 서울의 중심을 관통하는 청계천의
원류 중 하나다.
한 때 계곡의 일대에 옥인시범 아파트가 들어 있어서 계곡의 원형이 파괴된 상태였으나
2012년에 여러 동의 건물을 철거하고 옛 경관 회복을 위해 소나무 등 1만8천여 그루를 심는
노력 끝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수성동은 원래 안평대군의 비해당 옛 집터가 있던 곳으로 시내와 바위가 아름다워 여름철
노닐며 관상하는 인가가 많은 명소였다. 이골짜기에는 기린교라고 하는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어졌튼 겸재 시절에는 벌써 이 터가 그대로 공터가 돼버린 것을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곳을 선비 세 사람이 유상하러 나와있다. 동자 하나를 데리고 나온 일행 중 앞장선 이가
행중의 존장인 듯 긴 지팡이를 짚도 무엇인가를 애기해주는 것 같다.
뒤따르는 두 선비는 문생이거나 자제인 듯 공수하여 근청하고 있다. 혹시 비해당 얘기를 하는지.
화면에 선염된 맑고 풍부한 청색과 따뜻한 녹색은 한 여름의 무성한 숲에서 들리는 우렁찬
물소리를 시각화한 것이라 한다.
자하동 영조 27년(1751) 종이채색 간송미술관 소장
자하동
자하동은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3, 4 및 15번지 일대의 창의문 아래 북악산 기슭을
일컫던 동네 이름이다.
한자로는 '붉은 노을 속에 잠긴 마을'이라는 환상적인 뜻이지만 사실은 순 우리말
'잣동'을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도성의 북소문에 해당하는 창의문을 서울 사람들은 지금도 창의문이라 부르지 않고
자하문 또는 자문이라고 부르지않는가, 자하문이란 원래 순수 우리말인 잣문에서 유래
하였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는 본래 산이 많은 까닭에 자연히 성곽이 산마루를 따라
쌓이니 성의 의미는 그대로 산마루와 공통되는 것이다.
이에 산마루를 뜻하는 재 혹은 자가 그대로 성을 의미해 우리말로 훈을 낼 때 '잣성'으로
풀어 읽는다. 따라서 자하동은 자하문 아랫동네라 할 수 있다. 그림으로 보아도 바로
북악산 자락이 동쪽에서 내려와 인왕산 줄기로 이어지는 언덕 아래에 마을이 있다.
필운대 영조 27녕(1751) 간송미술관 소장
필운대
필운대는 필운동 9번지 일대로 필운동 북쪽 끝 인왕산 기슭에 있는데 지금은 배화여고 교정 본관
뒤편 언덕으로 그앞에 고층 건물을 지어 놓았기 때문에 그 경개와 운치가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백사 이항복의 옛집터로 알려진 이곳 석벽에는 이항복이 직접 각서했다는 '필운대'라는
세글자가 남아 있다.
이곳은 인왕산 남쪽 줄기의 중턱에 가까워 여기서 보면 서울 장안이 한 눈에 조망되던 곳이다.
겸재는 이 경치를 어느 시원한 여름날 화폭에 올렸덩 듯하다.
뒤편 인왕산 봉우리를 거의 생략해버리고 낮은 구릉만 태점과 흐링 윤곽으로 간결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2단으로 된 필운대의 석대상을 분명하게 표시하고 상단 석벽 아래는 노송림으로 병풍을 둘러
석벽을 가렸다.
대 아래 넓은 공터가 있고 그 건너 이쪽 소나무 언덕 아래에는 집 한 채가 서있으며 그 막은쪽 선바위
밑으로는 시원한 개울물이 쏟아져 내린다.
뒷산 봉우리를 무질러 놓아 상부가 허전해지자 두 봉우리 사이에 암봉 하나를 삐죽이 내밀게 했다.
펑퍼진 필운대와 질펀한 소나무 숲에 음양조화 감각을 부여하려는 의도인 듯하다.
육강현
당시 풍속화의 대가인 관아재 조영석(1686-1761)이 이 그림을 설명하며 '농은당에서 육강현
(육각현을 소리나는대로 씀)을 그렸다'고 하였다. 그는 겸재와 담을 맞대고 살았다.
앞의 큰 저택이 농은당이고 그 뒤로 언덕 너머 소나무숲에 필운대가 보이고 그 너머가 육각현이다.
강희언(1710~?)의 인왕산도 개인소장
겸재의 화풍을 따른 조선 후기 실경산수화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정선(鄭敾)의 화풍을 따른 이 작품은 강희언의 『산수·인물풍속화첩』에서 분리된 것이다.
그 화첩의 강희언 자서에 “삼청동 정선의 옆집에 살았는데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다.”고 쓰여 있었다 한다.
그림의 오른편 상단에는 ‘늦은 봄 도화동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다(暮春登桃花洞望仁旺山)’라는
화제(畫題)가 있다.
이 그림은 화제처럼 자하문(紫霞門) 근처인 도화동에서 보고 느낀 인왕산의 인상과 감동을 사생한 것이다.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와 달리 북쪽에서 포착한 인왕산의 전경을 담은 것이다.
전체적으로 정선의 필법을 참조하였다. 하지만 인왕산의 특징적인 암벽보다 미점(米點)으로
처리한 산 계곡의 주름을 강조하였다. (실경산수라 산아래 마을을 참조하라고 올려 봤다)
백악산 영조16년(1740) 간송미술관 소장
세종로 네거리 부근에서 북악산을 보면 산이 마치 하얀 연꽃 봉우리처럼 보인다.
그래서 원래 백악산이라 불리웠던 모양이나 그 아래 경복궁이 터잡고 앉고 난 후
서울의 진산으로 주산이 된다하여 북악산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백악산 봉우리 끝이 곧게 솟아있다. 겸재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그렸다고 보는데
청와대 앞이나 삼청동 근처에서 백악산을 바라보면 이렇게 보인다고 한다.
* 장동 일대의 풍광을 여덟 경치로 장첩하거나 한 장면씩 화폭에 담았는데
겸재가 남긴 '장동팔경첩'은 간송 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크게
백악산 일대인 - 취미대, 대은암(남곤), 독락정(김수흥), 청송당(성수침),수성동(안평대군)
인왕산 기숡 - 청풍계(김상용), 청휘각(김창흡), 필운대(이항복)
백악과 인왕산의 연결지점 - 창의문, 자하동, 백운동으로 구분된다.
장동팡경은 1751년 과 1755년에 걸쳐 두번 그렸는데 겸재의 화풍이 정립된 노년기다
두번째 그릴 때는 백운동, 창의문, 수성동을 다시 그려넣고 청휘각, 자하동, 필은대는
빼어 버렸다. 그래서 총 11폭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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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서적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최완수 1999 (주) 태원사
겸재의 한양 진경 최완수 2004 동아일보사
겸재 정선 최완수 2009 (주)현암사
2016년 11.11. 한바다 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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