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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나/제주도 관련

허벅 , 제주의 문화유산

**

*

비취색 영롱한 고려청자와 담백하고 순백의 미를 자랑하는

백자, 그리고 담백하고 자유분망한 분청사기 등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아름답고 고은  도자기가 존재하고 있는

한편으로 간장 된장 김치 젓갈 등 한국인 특유의발효식품과 함께 

생활 용기로써의 역할을 오랫동안 해온 옹기가 있다.

 

흙으로 만들어 유약을 입혀 구운 그릇을 도자기라 하는 데

이는 도기와 자기를 총칭하는 말로 옹기는 도기에 속한다.

 

옹기는 그 강도나 빛깔에서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데

옹기를 만드는 소재인  태토 나 유약 , 굽는 방법

그리고 소성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 한다.

 

흙은 그 성분에 따라 도기토 와 자기토로 구분되며,

소성 온도는 도기의 경우 섭씨 1,100~1,200도에서

자기의 경우는 섭씨 1,270~1,300도의 고온에서

구워진다고 한다.

 

옹기는 고은 흙으로 만든 청자나 백자와 달리

작은 알갱이가 섞여 있는 점토()로 만들어지는 데

가마에서 소성될 때 질이 녹으며 미세한 구멍이 형성되며

겉 표면이 거칠고 미세한 기공이 있어 이 기공으로 숨을 쉬며

자체적으로 계절에 따른 온도, 습도를 조절해주며 단열 효과도 높다.

 

옹기는 그 쓰임새가 다양하여

보관 및 저장용으로는 독, 단지, 주전자 ,두멍 등,

제조용으로는 시루, 뚝배기, 소줏거리(고소리), 탕기, 단지 등이

운반용으로 동이, 장군, 물허벅 등이

일상용으로는 등잔, 호롱, 재떨이, 화로, 요강 등 다양하게 이어왔다.

 

소고에서 살펴보고져 하는 제주 물허벅은 수옹(水甕)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甕(옹)이란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총칭하는 단어로써의 한자 표기어다.

 

옹기를 굳이 그 형태에 따라 옹(). ().()으로 나누어 보면,

옹으로는 운두가 높고 중배가 부르며 키가 큰 대옹(大甕) 등 독이 보이고

항은 옹보다는 작으며 위 아래가 좁고 배가 불록한  항아리로 보면 되고

앙은 동이로 몸이 둥글고 아가리가 넓으며 양 옆에 손잡이가 달린 옹기로

항아리 보다 작은 편이다,  큰 형태의 동이로는 퉁퉁한 두멍 등이 있다.

 돌이 많고 바람이 거센 풍토에서 상수도가 원활히 공급되는 60년대

중.후반까지 사용되어 왔던 제주도에서 사용되었던 허벅은 생활환경에

맞게 만들어져  물을 길어나르는 용도 외에 각종 곡물 씨앗들 그리고 

술이나 간장 등 액체를 보관하는 용기로 혹은 상을 당해서는 팥죽을

쑤어 담아 니르는 그릇으로, 혼례식 등 여흥에는 악기로 쓰였던 옹기이다. 

 

허벅은 보통 물허벅이라고 도 하는 데 물을 넣고 운반할 때는

항시 물구덕이라는 대오리(대나무)로 만든 구덕에 넣고 지고 다녔다.


 


허벅은 소박하고 볼록한 것이 제주 특유 조형적 미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크기. 형태 . 용도에 따라 다양하여 무려 36종이나 된다고 한다.

 

크기로는 맞춤허벅이라 불렸던 크기가 가장 큰 바릇허벅’, 부터

성인들이 지고 다녔던 일반 크기의 허벅’.

소녀들이 지고 다녔던 대배기(대바지) 허벅’

그리고 어린아이 용인 애기 대배기 허벅이 있었다.

 

형태로는 허벅과 크기는 같은 데 부리가 높고 낮음, 넓고 좁음의 차이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등덜기’, ‘방춘이’, ‘능생이라고 하는 데

등덜기는 목이 더 좁고 부리에 단이 있어 깔대기 모양과 비슷하고,

방춘이는 허벅 부리처럼 생겼는 데 부리가 조금 낮고 넓고,

능생이는 부리가 가장 낮다. (문두의 사진 참조)

 

그리고  등덜기’가 있는 데 이것는 허벅 등덜기라고도 한다.

이것은 주로 술이나 기름을 운반하거나 저장할 때 사용했는 데

목이 좁기 때문에 헝겊이나 새띠를 이용하여 부리를 막아도 잘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웃데기허벅, 바릇허벅방춘이, 허벅능생이 , 대배기등덜기.

애기대배기 등덜기, 애기대배기 방춘이 등 이름이 조합된다.

 용도별로 보면  물허벅, 죽허벅, 씨허벅, 술허벅, 오줌허벅(장군)

등으로 불려졌는데 허벅방춘이, 허벅능생이, 허벅등덜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부리가 부러지거나 모양이 변하면 오줌나르는 오즘허벅이 된다. 


1960년대 초반 이즈미 세이치(泉靖一)씨가 제주도 답시후 작성한 보고서

'제주도'에 물허벅에 대해 자세히 소개됐다고 한다.

그때 조사한 보고서에는 조사가구의 88%가 물허벅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함.


1988년 제주도민속자연사 박물관 '제주도 농기구'의 자료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허벅은 용량이 1말반 들이로 전(부리) 10.5cm,

항(몸통)길이 26cm , 굽(바닥)길이 21cm , 무게 5km 정도 였음.


 이제부터 풀어나갈  제주의 소중한  자원이며  젖줄인 용천수와

그것의 운반도구이며 삶의 애환을 담은 제주문화 유산인 물허벅을 

우선 , 제주인의 삶을 거친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풍요롭고 편리하고

아름답게 꾸며나가고져 했던 제주사회 구성원에 의해 습득하고 공유,

전달된 생활양식의 과정과 그 과정에서 이룩해낸 물질적 정신적

소산이란 문화적 측면에서 시작하자.

 

문화적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 어떤 민족이 생성 발전하는 과정 중에

그 민족에게 고유한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을 한마디로 민족성이라

한다면 탐라인의 후예인 본 제주인의 지역 정체성(성질, 기질 등)을

보려면  우선,  한반도인 본토의 문화에 필적되는 탐라의 선사유적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풀어보자.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는 유적지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 제주도에는

북제주군 애월읍 어음리 선사시대 동굴혈거생활 유적지인 빌레못

동굴(사적 제342 7~8만년전 구석기 시대유적지, 애월읍 어음리)

를 필두로  신석기 시대의 생활을 보여주는 고산리 일대 유적지,


        [ 고산리 출토 유적지]


대정읍 상모리 일대에서 출토되는 청동기시대 유물, 청동기와 철기

시대를 어우르는 삼양.곽지리 용담동 유적지,


 

       [곽지리 출토 옹기]



그리고 신라 문무왕2(서기662)에 신라의 영향권하에 들어가 속국이

되고  그후  통일 신라시대에 상당하는 기간을  보여주는

 성산읍 종달리, 애월읍 고내리 유적지 등에서 출토되고 있는 토기를 보면


               [종달리 출토 터날문토기]

탐라인의 핏속에는 고대로 부터 이어져온 도가의 미적 정서의 흐름이 있다.

 

그리고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어우르는 용담동제기유적지의 유물을

보면 분명히 초기국가의 출현과 강력한 권력집단이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 용담동 출토 제사유적 항아리]



그러나

백제의 풍왕(AD661~663년) 2년 663년 백제 부흥 연합군(약 52,000명)

일원으로 병선과 지원군(탐라:1만5천,왜:2만)을 을 보냈던 탐라는 백강 하구

(백촌강 전투, 양측 참전 년인원 19만명라고도 함)의 결전에서 폐배를 겪고

세월이 흐르고 흘러 고려 숙종10(AD1105)에는 고려의 중앙집권 통치하에

탐라국호가 폐지를 당하고,  AD1214년에 일개 지방군인 탐라군으로

전락했으며 ,원의 고려 강점기에는 100(AD1273~1374) 동안

원의 직할지가 되어 고려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음 속에  기나긴 세월 동안

온갖 수탈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본토의 조선시대에는 죄인의 유배지로 무시되는 것도 모자라

인조7(AD1629)부터 순종23(AD1823)까지 무려 200년 동안

제주인의 본토출국 금지령을 취하여 탐라인의 본토 문물을 받아드려

문물적으로 융성할 기회를 완전히 차단당했고 ,있는 모든 것을 박해를

당했다면 생각해 보아도 제주인의 생활상을 상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래도 제주인은 왜세에 의한 수탈로 점철된 역사 속에서 가난과 학정을

우직하게 공동 운명체인 구성원의 응집력으로 버티는 지혜를 견지해왔다.

 

조선사료에서 살펴보면 탐라인의 비참한 생활 상을 살펴볼 수 있다.

이형상(AD1653~1733) 1702년 6월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제주도 및

주변 섬들의 자연, 역사,산물, 풍속을 기록한 지방지 '남환박물지'의 기록 중



그중  해산물 채취를 주업으로 했던  제주잠녀의 생활상을

"

여자의 부역이 매우 무겁다

여인들이 치마가 없어서 단지 삼노로 허리를 두루메고,

몇 자의 굵은 배를 바늘을 이용하여 삼노의 앞면을 얽어

메었으나 오직 그 음부를 가릴 뿐이다.

옷과 치마를 벗고 적신(몸뚱이와 볼기짝)을 들어내는

것이어서 참담하여 차마 볼 수 없다.’

"

라고 했다.

 

그리고 조선 숙종 때의 문신 임장하(AD1687~1730)가 제주도

대정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제주 풍습을 60수 시로 남긴 것 중 서재집 탐라잡시’를 보면



어느집 사람인지 타래 머리 올린 여인

가을 하늘에 맨살을 드러냈네

일년 내내 부지런히 힘들게 일해 해도

반 가릴 짧은 치마도 없네.’

 

라고 했을 정도의 그 당시 제주인의 생활은 처절하도록 각박했다.

 

그래도, 각박한 풍토와 가나과 학정 속에서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

탐라 구성원의 불굴의 생활 행동양식(공동운명체 정서)은 물질적

정신적 소산으로 본토에서는 볼 수 없는 제주 특유의 옹기인

물 허벅의 탄생을 가져왔다.

사실 질흙으로 만들어진 허벅은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유산이

아니다.

그것은 재료에 대한 심안과 축적된 기술과 솜씨, 그리고 실패와

좌절의 반복을 통해 얻는 경험과, 일산에서 보고 듣는 조형적 미감이

체계화되어 얻어진 결과물이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부연하면,

제주도는 대부분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화산회토 지형이어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년중 강수량이 1,400mm 을 상회하지만

비가 내리면 물이 지하로 빠져버리고  자연적 저수지형이 드물어

식수는 대부분 해안가에서 솟아나는 용천수에 의존했다.

 

1999년에 발표된 용천수는 대략 911여 군데가 되며, 세부적으로

분류하면, 북제주군에 540 개소, 남제주군에 371 개소가  분포되어

있었는 데 그것도 대부분 해발 200m 이하인 해안가에 있었다.

 

지금은 마을이 넓어지고 기간사업인 해안도로 및 항만공사등으로

매립이 되어 많이, 보존 조치없이, 사라지고 있지만 옛 지도를 봐도

촌락형성은 용천수가 많은 지역에 형성(제주시 143개, 서귀포 168개)

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제주도 중산간 지역이나 산간지역에는 지형상 겨우 7.7%

(70여개소) 정도 였음으로 삶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본다.

왜냐면 해안가에 분포되어 있는 용천수는 대부분 밀물 때면 바닷물에

잠기는 해발 5m 이하에 있었고, 해안방어가 되어주지 못하는 당국의

조치로 외구 및 해적의 출몰로 입는 피해가 많았음으로

실질적으로 주거지는 해안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수도가 공급되기 전 식수. 목욕. 빨래 등 생활수, 그리고 농업,

축산용수는 이 용천수에 대부분 의존하였는 데 이전부터 쓰고 있던

주요 용천수를 몇개소 찾아보면

 


   [곽지 용천수]


 

           [용담 용천수(엉물, 섯물)]

  

 

       [애월읍 용천수(하물) 유수암리 마을]




      [서귀포 소낭머리 용천수(자구리 해안)]


등 제법 많이 있고 지금은 명소가 되고 있다.

 

아래 사진은 50~60년대 물허벅을 지고 운반하는 모습이다.


  


누가 뭐래도 불과 물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곧바로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물이 부족한 제주도에서 매일 물을 길러 식수를 운반하는 일은

삶을 지속시켜 나가게 해주는 행위로, 제주의 새벽은 물허벅을

지고 용천수가 있는 샘가로 물 길러 오가는 여인의 발자국 소리로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탐라인들에게는 물 허벅은 물을 운반하는 것을 넘어서

생명수를  담고 다니는 것을 의미했다고 본다.

 

남아있는 사료로 조선시대의 제주여인들이 물허벅을 지고

물 길러 다니는 것에 대한 것으로

조선시대 기묘사화로 1520 8월부터 1521 10월까지

제주에서 유배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기록한 풍토기인

김정(1486~1521)의 충암집 제주풍토록에는


 


한라산과 제주 고을에는 샘과 우물이 매우 적어서, 마을 주민들이

5리나 되는 지역에서 물을 길어오는데, 이를 가까이 있는 물이라한다.

..

물을 길어 오는데 반드시 나무통으로 등에 지고 가는 것이 많이

길어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릇 지는 물건은 대부분 여자들이 등에 지고 간다.’

 *

제주 대정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조선시대 조관빈(1691~1757년)이

시로 기록한  풍속 시인  회헌집탐라잡영에는

 


몸을 드러낸 시골 아낙 옷자락도 여미지 않고

멀리서 샘물 길어 물병을 지고 가네

한 집에 사는 처첩의 인생도 고달픈 데

날 저문 방아 노래 원성 처럼 들리네'


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화산섬으로 본토 지방과는 다르게 구멍이 많고 투박한

현무암 돌이 다니는 길에 널려있고 ,어떤 것은 뿌리가 깊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풍토에서 깨지기 쉬은 항아리를 머리에

얹가나 들고 가는 방식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아래 사진에서 보여 주는 장면은 우리가 국민학교를 다녔을

이전 만해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현실 매일 매일의 생활에 직결되었던 물 허벅과 물구덕,

그리고 물이 담긴 물구덕을 내려 놓기에 편리하게 만들어 논

정재(부엌) 앞에 설치된 물팡돌은 용천수를 중심으로 하는

제주의 미를 형성하는 중추적인 역활을 했음으로 해서,

제주의 돌문화(돌하르방 등)와 등짐운반(물구덕), 그리고 생명수

집약할 수 있는 제주인 삶의 함축이자 상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구덕

                                         [ 돌팡돌   ]


그러면 마지막으로 편리성을 갖춘 생활양식의 한 축이었던

세련된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갖춘 예술품으로서의 허벅의 생산

과정과 모습을 살펴보자.

 

자연을 닮은 항아리, 선조들의 지혜가 모인 결정체인

옹기로서는 최고의 미를 지니고 제주의 문화 유산인

제주미의 그 자체를 보여주는 허벅은 옹기의 백미다.

 

야무진 부리와 잘록한 목

탄력있게 배부른 중배

불을 머금은 용암의 색

하늘로 솟구치는 듯한 불꽃을 머금은

제주 허벅 몸 속에는

화산 흙, 섬 바람과 강렬한 태양 볕,

생명의 빗살 무늬 속에

질기고 질긴 탐라인의 운명이

녹아 있다.


 



무형문화제 제 24호로 2001년에 지정된 허벅은

철분이 많은 화산회도의 영향으로 몸체가 붉은

빛깔을 품고 있으며 가마 속 장작의 나무 진액

으로 독특한 아름다운 색깔을 구현시키고 있다.

선사시대의 토기에서 모여주는 생명의 빗살인

빗실무늬와 표면의 투박함은 실로 미의 극치다.



 

도공 고 송창식선생이 묘사한 언어를 빌리면 허벅은

" 조지록하면서, 터부록한 형태 "를 갖는다.

 굽에서는 서서히 펒;다가 시원한 곡선으로 이어지며

부드럽고 강한 선으로 어깨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 옹기의 생산방식은 본업화된 체계를 갖춘 공동생산

방식을 체택해 본토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즉, 몸체에 비해 절제할 수 있응 만큼의 아주 작은 입을 갖추고

아름답게 퍼진 입술을 만들었고, 절제와 과감한 몸매로 이루어

지는 형태의 아름다움을 갖고있다는 것.


 그리고 허벅표면에 나타난 문양으로는 불꽃 문양, 용암문양, 

은하수문양, 달무리문양, 보로롱문양(빗살무늬)으로 나뉜다.

특히 제주도 허벅은 3박4일간의 석요(돌가마) 의 고온 속에

제몸을 녹이는 자화성을 지니게 되어 두드리면 파도소리 같은

굵고 맑은 소리가 들리고 가벼워 사람들이 모이면 악기로도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주도에서 조사된 유적 중에서 정확한 시기를 유추해

볼수 있는 곳이 대정읍 신평리 석요장이라 한다.

전통옹기를 가장많이 생산되었던 곳은 남제주군 대정읍 구억리

상동마을이었고 점토의 주공급지는 신평리, 무릉리, 한경면 고산리,

조수리, 애월읍 광령리로 보이고 제주 전 지역에로의 공급은 안덕면

대정읍 모슬포에 위치한  포구를 통해서라고 짐작하고 있다.

1970년 조사에는 옹기 요지가 약 60여곳 확인되었었다고 한다.

제주도 전통 옹기의제작 인적요소를 보면

가마굴을 다루는 굴대장, 옹기제작 옹기대장, 불담당 불대장,

땔감과 찰흙을 담당하는 건애꾼인 섬피로 구성됐다고 한다..

 

돌가마는 가마에서 굽는 온도와 방법 그리고 구워진

그릇의 빛깔에 따라 노랑굴, 검을굴로 나뉜다.


 

                   [노랑굴 가마]


노란굴에서 구어진 옹기는 그 빛깔이 노랑색을 띈다.

잿물(유약)을 바르지 않고 섭씨 1,100도가 넘는 고온에서

구우며 , 그릇의 태토와 소성시 자연유의 빛깔에 의해

구워진 옹기의 표면이 붉은 색을 띈 노랑색이 되는 것이다.

 


검은굴에서의 불때기는 노란굴과 비슷하나 소성의 마지막

과정이 다르고 불때는 시간이 짧다고 한다.

섭씨 900도 내외의 온도에서 아궁이로 영료를 한 아름 집어

넣은 후 밀폐시키면 가마속에서 타고 있던 장작에서 연기가

발생하여 기물 표면에 스며들어 완성된 옹기는 진한 회색 혹은

검은색으로 변하고 광택이 없는 것으로 변한다고 한다.


         [ 구석팟 검은굴]

 

                   [한향림옹기관 소장, 파주]

 

               [ 무형 문화재 장인 허벅만들기]


**


2015 .11.30.  한바다


참고서적

'옹기' 한국 기층문화의 탐구10. 조윤형 1971 (주)로얄프로세스

'허벅과 제주질그릇 ' 국립민속 박물관  2007 (주)대한프린테크

'제주의 옹기'  국립제주박물관 2007 (주) 신광씨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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