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로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뜻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많고 많은 시인중에 기혼의 입장에서 그 대상의 과녘을 정확히 겨누고 사랑의 헌시를 날린 이는 청마가 아마도 유일한 경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명한 시이다. '행복'이란 제목보다는 마지막 행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로 선명히 기억되고 있다. 청마와 정운(이영도의 아호)의 사랑은 마치 황진이와 명창 이사종의 6년간의 계약사랑 만큼이나 시대의 파격을 담은 용기있는 사랑이다. 그들의 사랑을 과연 정신적인 사랑 만이었겠냐는 의혹도 상당히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청마와 정운의 사랑을 플라토닉으로 이해하거나 그렇게 믿고싶어한다.
해방이 되면서 만주에서 돌아온 청마는 통영여중 교사로 부임하여 1958년까지 이곳에 재직했다. 이 무렵 이 학교에는 여류 시조시인 이영도가 근무하고 있었고, 이때 청마는 이 단아한 여성시인에게 연정의 불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본래 생명에 대한 열애로 가득 찼던 호탕한 시인 청마는 강물이 넘치듯 흘러내리는 생명의 열정을 적어 연인 정운에게 바치기를 20여년. 죽음 문턱까지 5천여통의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누가 이토록 진하고 절절한 사랑의 밀어를 매일 새벽마다 잠 못 들며 흘려낼 수 있었을까.
이것은 차라리 축축한 감정의 물기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의 폭발이었으리라. 청마 사후에 나온 정운(이영도)에게 보낸 서간문집을 보면 그는 시인 청마가 아니라 진실한 생명에의 열렬한 사모가 마치 폭염처럼 불탔던 인간이며 남성이었다. 청마는 사랑하는 한 여인에게 무수한 헌시를 써 보내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고 절규하고 <행복은 이렇게 오더이다>라고 희열에 몸을 떨기도 하였다. 과연 청마는 남달리 더 많은 영혼의 갈증을 느낀 사람이었을까. 그는 처절한 허무를 반역하며 생명에의 긍정을 위해 몸부림 친 시인이었다는 평가를 지금도 받고 있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의 시 '행복'은 정운에게 바친 진홍빛 양귀비꽃 같은 열정으로 쓰여진 시다. 매일 매일 편지를 보내고도 갈증을 풀지 못한 청마는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라면서 그의 사랑의 증거를 죽음과 결부시켜 표현하였으며, 그 예는 이것 말고도 참으로 많다. 심지어 죽은 뒤에 사랑하는 그녀와 함께 묻히고 싶다는 말도 수없이 편지에 쓰고 있었다. 어느날 편지의 끝부분에 보면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날이 나의 落命의 날이 될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정향은 정운의 초기 예명)이라고 쓰여 있다. 청마는 이때부터 이미 낙명의 시간 ,즉 죽음의 시간에 이를지라도 사랑하는 그 여인이 있다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마에게 있어 사랑은 하나의 종교요 자기 구원의 최상의 길이었던 것이다
"나의 정운! 당신이야말로 내게는 나를 구원하는 종교 입니다. 오늘이야 나는 나의 죄스러운 육신과 정신을 당신앞에 내던지고 목놓아 통곡하고 싶은 그러한 날입니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최고의 믿음이 될 수 있었던 시기의 편지다. 59년에 발간된 청마의 자작시 해설서 <구름에 그린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필경 인간은 누구를 하나 사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것인가 봅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보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 편에 더욱더 큰 희열과 만족이 따르는 것인가 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받는다는 일은 내가 소유됨이요 내가 사랑함은 곧 내가 소유하는 때문일 것입니다"
아직도 청마의 정운에 대한 처절한 사랑에 비해 세상에 알려진 정운의 반응과 사랑의 증거는 별로 없다고 들었다. 그래서 어쩌면 첫행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는 사랑의 기교적 수사가 아니라 청마의 진정성이 녹아있는 솔직한 심경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청마의 서간문집을 보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청마의 부인이 과부 이영도와의 사랑을 묵인해 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주 오래전 김윤식 교수가 KBS TV에서 진행했던 <명작의 고향>인가 하는 프로에서 청마의 부인이 질투가 나지 않았냐는 기자의 물음에 "처음엔 뒤를 밟기도 했으나 그토록 목숨 같은 사랑인데 어쩌겠어요"라고 했던 그 말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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