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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다. 그동안 여권에서 줄기차게 나오던 말이 슬며시 사라졌다. 바로 ‘계파 화합’이다. ‘친(親)이명박계’와 ‘친박근혜계’의 화합이 그것이다. 현재 양 계파의 화합을 외치는 여권 인사는 아무도 없다. 표면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세종시 수정안 사태가 마무리되면서 ‘싸울 일’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 친이계와 친박계가 맞붙을 만한 정치적 현안은 별로 없었다. 지난 연말 예산안 강행 처리 때도 다른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민주당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사찰 의혹을 제기하며 여권의 분열을 기대했지만, 한나라당은 꿈쩍도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딘지 좀 부족해 보인다. 단순히 싸울 일이 없다는 것만으로는 친이계와 친박계의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만큼 여권 내부의 기류가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 상당수 친이계 소속 의원들의 색깔이 엷어졌다는 소리가 자꾸 나온다. 한때 정치권에 회자되었던 ‘월박(越朴)’과 ‘주이야박(晝李夜朴)’을 넘어 ‘신친박(新親朴)’이 등장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돈다. 물론 아직 실체는 없다. 변화의 조짐만 감지될 뿐이다.
출발점은 지난해 8월21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단독 회동이다. 박 전 대표는 이대통령을 만난 뒤 적극적인 ‘소통 행보’에 나섰다. 계파를 가리지 않고 현역 의원들을 만났다. ‘고집 센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충청도 사투리로 엮은 ‘썰렁 개그’까지 선보였다. 친이계 의원들의 반응도 호의적이었다. 박 전 대표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친박계측에서는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 전체 의원 가운데 80% 정도를 만났다고 분석한다.
박 전 대표의 비서실장 역할을 맡고 있는 이학재 의원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 의원들을 거의 다 만났다고 보면 된다. 요즘도 스케줄이 부족할 정도로 만나자는 요청이 들어온다”라고 말했다. 사뭇 의미심장한 얘기도 전했다. 이의원은 “친박과 친이의 벽은 허물어졌다. 박 전 대표와 교류를 안 하겠다고 말하는 의원을 아직 못 보았다. 또 자연스런 만남을 통해 박 전 대표에 대한 오해를 푸는 계기가 되었다고 다들 반가워한다”라고 밝혔다.
친이계 일부 의원이 친박계로 돌아섰다고 말하는 의원도 있다. 박 전 대표와 한나라당 의원들의 모임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진 영남권의 한 친박계 재선 의원은 “내가 (박 전 대표에게) 제출한 의원 명단의 3분의 2 정도와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친박으로 넘어온 의원도 많다”라고 주장했다. 박 전 대표가 소속된 한나라당 ‘이공계 의원 모임’도 확대되었다. 친박계 서상기 의원이 주축인 이공계 모임의 회원은 경북대 수학교육과 출신인 이철우 의원 등이 합류하면서 당초 16명에서 21명으로 늘어났다.
소통 행보에 나선 박 전 대표의 정치적 메시지에 대해 “구태의연한 편 가르기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라는 것이 친박계측의 설명이다. 자연스러운 만남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외연 확대를 위한 프로그램이 가동되지 않았다고 못박는다. 한 친박계 인사는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아직 2년이나 남은 데다, 따로 프로그램이 필요 없을 정도로 박 전 대표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의원들이 많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역시 이러한 박 전 대표의 행보의 목적은 친박계의 외연 넓히기에 있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중도 온건 성향의 친이계를 ‘신친박계’의 공간으로 끌어당기려 하는 목적이 숨어 있다.
아예 친박계 내에서 ‘계파 해체’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와 눈길을 끈다. 박 전 대표를 돕고 싶어 하는 친이계 의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친박계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친박계의 한 인사는 “친박과 친이의 경계선을 실선에서 점선으로 만드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 친박계가 벽을 쌓으면 박 전 대표의 소통 행보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 친박계 스스로 계파 해체를 선언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라고 강조했다.
총선 앞두고 있어 ‘커밍아웃’ 쉽지 않을 듯
물론 친박계가 발톱을 모두 제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숨기고 있을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친이계 의원 가운데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얘기도 그래서 나온다. 친박계는 이를 ‘잔도(棧道)를 불태우고 간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잔도는 험한 벼랑 같은 곳에 선반을 매달아놓은 듯이 만든 길이다. 잔도를 불태웠다면 소통은 없다. 지난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박 전 대표를 정치적으로 공격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비방한 인사들이 대표적이다.
친이계의 움직임도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는 형편이다. 박 전 대표와 만났다고 친박 성향으로 돌아섰다는 근거가 없다. 호기심 차원에서 접근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직 정치적 정체성을 드러낼 만한 환경이 조성되지도 않았다. 오는 2012년 대선에 앞서 총선이 실시된다. 총선 공천이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커밍아웃’을 하기가 어렵다. 영남권의 한 친이계 재선 의원은 “언제까지 친이계로 있을 수는 없지만, 지금은 시기상조이다. 마음을 고쳐먹은 친이계 의원들이라도 총선 전까지는 색깔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일단 자기부터 살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앞서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또 하나의 변수는 여론이다. 차기 대선 후보 지지도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는 박 전 대표이지만 강력한 경쟁자가 떠오를 경우 환경은 순식간에 바뀐다. 박 전 대표에게로 ‘쏠림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는 친박계의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친박계 일각에서도 지금은 ‘박근혜 대세론’을 말할 단계가 아니라고 인정한다. 당분간 친이계 의원들의 ‘눈치 작전’이 계속될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대목이다.
박 전 대표의 외연 확대와 맞물려 친박계 내부의 변화도 의미심장하다. 현재 친박계에서 새로운 주류가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기존의 신주류와 구주류에서 벗어난 친박계 일부 초선 의원들이 별도의 모임을 갖는 등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박 전 대표에게 ‘항상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연평도 무력 도발이나 개헌에 대한 보고서를 만드는 것은 물론 박 전 대표를 직접 만나 정국 현안에 대해서 논의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새해 들어 친이계와 친박계의 변화는 더욱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표가 정책 행보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더욱 그렇다. 정치판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말이 실감나게 다가올 2011년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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