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의 에스컬레이션
그러므로 “아테네의 패권에 대한 스파르타의 위협 인식이 전쟁의 원인”이라는 투키디데스의 분석은 대체로 옳다고 하겠지만, 직접적으로 전쟁이 벌어지게 된 계기는 비교적 사소한, 제3자들끼리의 분쟁이었다. 기원전 436년, 아드리아해에 떠 있던 작은 섬나라 에피담노스에서 분쟁이 발생했다. 민주파가 과두파를 내쫓고 정권을 잡았는데, 과두파들이 이민족과 함께 돌아와서 에피담노스를 공략했던 것이다. 다급해진 민주파는 모도시인 케르키라에 도움을 청했는데, 과두체제였던 케르키라가 거부하자 이번에는 케르키라의 모도시인 코린토스로 찾아갔다. 코린토스는 본래 식민도시였으나 이제는 라이벌이 되어 있던 케르키라를 견제할 목적에서 원조를 받아들였고, 여기에 케르키라가 반발하면서 에피담노스 내전은 어느새 ‘코린토스-케르키라 분쟁’으로 바뀐다. 서전에서 케르키라에게 일격을 당한 코린토스는 분개하여 해군력 강화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그러자 두려워진 케르키라는 아테네에 도움을 청한다.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주요 일원인 코린토스를 적대시하는 일이 꺼려졌지만, “해군국끼리 힘을 합쳐야 하며, 케르키라는 지정학적으로 펠로폰네소스를 견제하기에 좋은 위치”라는 설득에 “평화조약을 깨트리지 않는 한에서 원조”하기로 결정한다. 케르키라에 원군을 파견하되, 코린토스를 먼저 공격하지는 않으며 케르키라 상륙만 방해한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는 코린토스의 반발을 가져왔고, 아테네는 코린토스를 압박하면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이면서 코린토스의 식민도시이자 아테네의 동맹국이었던 포티다이아에 코린토스와의 관계를 끊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포티다이아는 이를 거부하고 아테네와 동맹을 끊는 한편,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한다. 코린토스를 후원한 앙갚음으로 아테네의 해상봉쇄를 당하고 있던 메가라도 스파르타를 애타게 찾았다.
이렇게 해서 작은 섬나라 에피담노스의 내전이 코린토스-케르키라 분쟁으로 확대되고, 다시 아테네-코린토스 분쟁으로, 그리고 아테네-스파르타 대결로 확대되고 말았다. 스파르타에서는 신중론자이자 아테네의 실질적 지도자 페리클레스(Perikles)와 친했던 아르키다모스 왕(Archidamus II)이 전쟁에 부정적이었으나, “펠로폰네소스 동맹 맹주국으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더 이상 아테네의 횡포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누르지 못해 결국 평화조약이 깨지게 된다.
페리클레스의 자신감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도 전쟁은 되도록 피해보려는 입장이었으나, 일단 전쟁을 한다면 아테네는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까닭은 첫째, 아테네에게는 사상 최강의 해군력이 있다. 둘째, 델로스 동맹 기금에암피폴리스의 은광이 있는데다, 해상교통로를 통제할 힘이 있는 아테네에 비해 적의 자금력은 얼마 못 버틸 것이다. 셋째, 스파르타와의 주변 섬나라들은 아테네의 해상봉쇄와 민주화 선동의 결과 아테네 쪽으로 돌아설 것이며, 그러면 스파르타를 포위하여 압박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튼 최강의 육군력을 가진 스파르타와 육지에서 정면대결을 펼치는 일은 피해야 하며, 아티카의 농민들을 모두 아테네와 피레우스 항을 잇는 성벽 안으로 피신시키고 농성하면서 해군력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페리클레스의 전략은 대체로 타당해 보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들어맞지 않게 된다. 먼저 아테네가 최강의 해군력을 가진 점은 틀림없었지만, 그 해군력은 만능이 아니었다. 오늘날이라면 전함과 항공모함만으로 적국을 초토화할 수도 있고, 대규모의 병력을 상륙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화력이라고는 활이나 돌팔매가 고작이었던 당시의 배는 주로 충돌하거나 수상 백병전을 펼치거나 하며 적의 배를 공격하는 일만 할 수 있었으며, 병력 수송력도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해군력은 적의 해상로를 차단하여 경제적 고통을 줄 수는 있었으나, 적의 도시를 직접 공격하고 적군을 소탕할 능력은 부족했다.
그리고 해군은 인적, 물적으로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했다. 1백 척의 삼단노선을 한 달 동안 운용하는 비용은 파르테논 신전을 세우는 비용의 네 배에 맞먹었다고 한다. 배를 만들고 수리하는 데도 돈이 많이 들었지만, 풍력을 별로 이용하지 못하고 다수의 노잡이들의 어깨 힘에 의존하던 당시의 배는 그 노잡이들에게 지불해야 할 급료 때문에 돈 먹는 하마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육전에서는 패배해도 대체로 투입된 병력의 10퍼센트 정도만 희생되었던 데 비해, 해전에서는 70, 80퍼센트를 웃도는 희생이 나왔다. 배 한 척이 침몰하면 배에 타고 있던 인원은 거의 몰살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육지에서 스파르타에 결정타를 가할 수 없는 이상 전쟁은 장기화될 수밖에 없었고, 아무리 아테네의 자금력이 풍부했어도 장기 전쟁에는 대책이 없었다. 게다가 인력 손실도 심각해져서 전쟁 말기에는 출신 성분별로 엄격히 구분되던 병종이 마구 뒤섞여, 귀족 출신이 노잡이를 하는가 하면 노예가 전투병으로 투입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페리클레스가 기대했던 대로 스파르타 주변의 나라들이 손쉽게 민주화되면서 반 스파르타로 돌아서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재난도 찾아왔다. 기원전 430년과 426년에 아테네를 덮친 역병이었다. 종래 페스트로 알려진 이 역병은 최근의 연구에서는 장티푸스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무튼 페리클레스의 주장에 따라 아테네 성벽 안에 주민들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에 피해는 더욱 컸다. 기원전 429년에는 페리클레스 자신조차 역병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이 역병은 아테네 인구의 삼분의 일을 쓸어갔으며, 그렇게 전쟁이 격렬하지 않았던 초기 10년 동안에는 역병에 따른 인명피해가 아테네가 입은 인명피해의 대부분이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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