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과 나/또 다른 삶

그리스 고전기(BC478~BC323)의 마감 "펠로폰네소스 전쟁"(펌)

 

**

*

 펠로폰네소스 전쟁 - 그리스의 황혼

(글 순서)
 
1.  펠로폰네소스 전쟁 - 그리스의 황혼
2.  투티기데스 - 실증적 역사를 개척한 그리스의 역사가
3.  페리클레스 - 아테네 민주정치의 전성기를 가져온 대정치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첫해, 전사자 추도연설에서 “우리 아테네는 헬라스의 모범이다”라고 주장하는 페리클레스.

 

 

펠로폰네소스 전쟁 개요

 
전쟁주체 : 
델로스 동맹 VS 펠로폰네소스 동맹
전쟁시기 : 
기원전 431~기원전 403
전쟁터 : 
그리스, 에게해 일대, 소아시아, 시칠리아
주요전투 : 
델리움 전투, 암피폴리스 전투, 만티네아 전투, 시라쿠사 전투, 아이고스포타미 해전

영광의 그리스, 사상 최악의 전쟁에 뛰어들다

 

페르시아 전쟁은 얼마 전까지 사상 최대의 전쟁이었다. 그래도 두 차례의 해전과 두 차례의 육상전으로 승부가 정해졌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치르는 이 전쟁은 기간도 무척 길 뿐 아니라, 달리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피해를 헬라스 전체에 가져왔다. 일찍이 그 어떤 야만족의 침입도, 또는 헬라스인끼리의 다툼도, 폴리스들을 이토록 황폐하게 한 적은 없었다.”
 

스스로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다분히 아테네 쪽 시각이 반영된 이름이다. ‘펠로폰네소스인들과의 전쟁’이라는 말인데, 스파르타 쪽 시각에서는 ”아테네 전쟁“ 또는 ”델로스 전쟁“이라 불렀을 것이다)”에 참전하여 병력을 지휘했고, 전쟁이 시작될 무렵부터 그 심각성을 알아보고는 아군 뿐 아니라 적군의 자료까지도 두루 수집하고 냉정히 분석해서 길이 남을 전쟁의 역사를 쓰기로 결심했던 아테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Thukydides)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서두에서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실제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피해는 엄청났다. 전후 아테네는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승자인 스파르타의 피해도 그에 못지않았다. 메가라, 코린토스, 아르고스, 만티네아 등도 국력의 20내지 50퍼센트가 감소한데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내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멜로스, 스키오네, 토로네, 플라타이아이 등의 폴리스들은 아예 멸망했다. 전쟁 직전까지 초강대국 페르시아의 침입을 물리치고는 발칸 반도와 흑해, 동지중해 일대를 장악했으며, 고전 그리스 문명을 찬란하게 꽃피웠던 그리스는 이 자멸적 전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이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된다. 1차 대전에서도 승승장구하던 유럽 제국들이 동맹의 역학관계에 얽힌 나머지 대전을 벌여 자멸의 늪에 빠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1차 대전과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랐다. 우선 폴리스들의 성격상 분쟁은 그칠 날이 없었으며, ‘전쟁’ 이전에도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충돌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 이어져왔다(그래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과 끝을 어디로 잡느냐 하는 부분도 논란이 있다). 동맹이라는 것도 근대의 것처럼 그렇게 엄격하지 않아서,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동맹국의 적대세력과 손을 잡거나, 중립을 공언한 전장에 병력을 보내거나 하는 일이 흔히 벌어졌다. 본래 폴리스라는 것이 여러 종족이 뒤섞이며 이루어진 것이고, 다른 폴리스의 식민도시로 출발한 곳도 많았기에 한 번은 지배 종족간의 유대관계 때문에 한편이 되었다가, 다음에는 식민도시와의 인연 때문에 적이 되었다가 하는 등 복잡하고 불규칙한 국제관계가 일상이었다. 기원전 5세기쯤부터는 여기에 민주주의 정부냐, 과두제 정부냐 하는 점을 두고도 편이 갈렸다. 그래서 가령 전쟁 직전 아테네가 포티다이아에 출병했을 때, 코린토스는 “우리 코린토스의 식민도시인 포티다이아에 왜 간섭하느냐”고 항의했고, 아테네는 “포티다이아는 우리의 동맹국인데 코린토스가 압박하고 있으니 개입이 당연하다”고 맞받으며 서로가 정의를 주장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당시 스파르타와 아테네 제국.

 
 

말하자면 페르시아 전쟁 당시 놀랄 만한 단결(그나마 아르고스 같은 나라는 시종일관 스파르타와 맞서며 페르시아에 호응하는 등, 완전한 단결은 없었다)을 보여준 고대 그리스 세계의 본모습은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전국시대와 같았다. 그런데 왜 투키디데스의 말처럼 “사상 최악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하면, 바로 페르시아 전쟁의 결과 아테네의 세력이 전에 없이 떨치게 된 점, 그리고 역시 그 전쟁에서 그리스 최강의 육군국임을 과시한 스파르타에게 아테네에 대항하는 맹주로서의 기대가 모아지게 된 점이 원인이었다.

 

기원전 477년에 페르시아 전쟁을 마무리하고 향후의 침략에 대비하자는 뜻에서 수립된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동맹 회원국들이 납부하는 기금은 아테네가 유사시에 사실상 사금고처럼 쓸 수 있었고, 아테네 자체의 해군력에다 동맹국들의 해군력을 “대행”해준다며 돈을 받고 구축한 해군력을 이용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멀리 이탈리아나 이집트, 크림반도까지 병력을 운용할 수 있었다. 특히 해상로가 차단되면 생존이 어려워지는 작은 섬나라들은 아테네에게 전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는 이런 무력과 경제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고전문명을 꽃피우는 한편, 페르시아 전쟁 직전 기틀을 잡았던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수출”했다. 그리스 전역에서 상당수의 폴리스들이 아테네의 후원을 받고 과두제에서 민주제로 돌아섰다. 스파르타의 오랜 숙적, 아르고스까지.

 

이처럼 아테네가 그리스 세계의 유례없는 패권국으로 떠올랐을 뿐 아니라, 해군력을 위주로 하며, 다른 나라의 민주화를 후원한다는 점은 스파르타를 비롯한 여러 나라를 긴장시켰다. 헤일로타이라 불리는 노예들과 페리오이코이라는 예속민의 착취를 바탕으로 최정예 육군을 운영하던 스파르타는 특히 아테네 ‘민주해양제국’ 체제가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으며, “아테네를 견제할 나라는 스파르타뿐이다”라는 내외의 충동질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 페르시아 전쟁이 마무리되지도 않았던 기원전 475년에 이미 아테네를 공격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내부에서 격론을 벌였으며, 465년의 타소스, 459년의 메가라 분쟁에서 은근히 아테네와 맞서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도 두 나라의 대결은 서로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기원전 446년에 평화조약을 맺고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에 간섭하지 않으며, 스파르타는 델로스 동맹체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래도 두 나라 사이에 소규모의 무력충돌은 계속 빚어졌다. 평화조약은 다만 “확전을 자제하는 것”으로 지켜진다고 간주되었다. 그리고 마치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처럼, 두 나라는 “언젠가는 저들과 정면승부를 하게 될지 모른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외교와 국방정책을 잡아가고 있었다.

 

전성기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상상도.

 
 

분쟁의 에스컬레이션


그러므로 “아테네의 패권에 대한 스파르타의 위협 인식이 전쟁의 원인”이라는 투키디데스의 분석은 대체로 옳다고 하겠지만, 직접적으로 전쟁이 벌어지게 된 계기는 비교적 사소한, 제3자들끼리의 분쟁이었다. 기원전 436년, 아드리아해에 떠 있던 작은 섬나라 에피담노스에서 분쟁이 발생했다. 민주파가 과두파를 내쫓고 정권을 잡았는데, 과두파들이 이민족과 함께 돌아와서 에피담노스를 공략했던 것이다. 다급해진 민주파는 모도시인 케르키라에 도움을 청했는데, 과두체제였던 케르키라가 거부하자 이번에는 케르키라의 모도시인 코린토스로 찾아갔다. 코린토스는 본래 식민도시였으나 이제는 라이벌이 되어 있던 케르키라를 견제할 목적에서 원조를 받아들였고, 여기에 케르키라가 반발하면서 에피담노스 내전은 어느새 ‘코린토스-케르키라 분쟁’으로 바뀐다. 서전에서 케르키라에게 일격을 당한 코린토스는 분개하여 해군력 강화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그러자 두려워진 케르키라는 아테네에 도움을 청한다.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주요 일원인 코린토스를 적대시하는 일이 꺼려졌지만, “해군국끼리 힘을 합쳐야 하며, 케르키라는 지정학적으로 펠로폰네소스를 견제하기에 좋은 위치”라는 설득에 “평화조약을 깨트리지 않는 한에서 원조”하기로 결정한다. 케르키라에 원군을 파견하되, 코린토스를 먼저 공격하지는 않으며 케르키라 상륙만 방해한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는 코린토스의 반발을 가져왔고, 아테네는 코린토스를 압박하면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이면서 코린토스의 식민도시이자 아테네의 동맹국이었던 포티다이아에 코린토스와의 관계를 끊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포티다이아는 이를 거부하고 아테네와 동맹을 끊는 한편,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한다. 코린토스를 후원한 앙갚음으로 아테네의 해상봉쇄를 당하고 있던 메가라도 스파르타를 애타게 찾았다.

 

이렇게 해서 작은 섬나라 에피담노스의 내전이 코린토스-케르키라 분쟁으로 확대되고, 다시 아테네-코린토스 분쟁으로, 그리고 아테네-스파르타 대결로 확대되고 말았다. 스파르타에서는 신중론자이자 아테네의 실질적 지도자 페리클레스(Perikles)와 친했던 아르키다모스 왕(Archidamus II)이 전쟁에 부정적이었으나, “펠로폰네소스 동맹 맹주국으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더 이상 아테네의 횡포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누르지 못해 결국 평화조약이 깨지게 된다.

페리클레스의 자신감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도 전쟁은 되도록 피해보려는 입장이었으나, 일단 전쟁을 한다면 아테네는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까닭은 첫째, 아테네에게는 사상 최강의 해군력이 있다. 둘째, 델로스 동맹 기금에암피폴리스의 은광이 있는데다, 해상교통로를 통제할 힘이 있는 아테네에 비해 적의 자금력은 얼마 못 버틸 것이다. 셋째, 스파르타와의 주변 섬나라들은 아테네의 해상봉쇄와 민주화 선동의 결과 아테네 쪽으로 돌아설 것이며, 그러면 스파르타를 포위하여 압박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튼 최강의 육군력을 가진 스파르타와 육지에서 정면대결을 펼치는 일은 피해야 하며, 아티카의 농민들을 모두 아테네와 피레우스 항을 잇는 성벽 안으로 피신시키고 농성하면서 해군력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페리클레스의 전략은 대체로 타당해 보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들어맞지 않게 된다. 먼저 아테네가 최강의 해군력을 가진 점은 틀림없었지만, 그 해군력은 만능이 아니었다. 오늘날이라면 전함과 항공모함만으로 적국을 초토화할 수도 있고, 대규모의 병력을 상륙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화력이라고는 활이나 돌팔매가 고작이었던 당시의 배는 주로 충돌하거나 수상 백병전을 펼치거나 하며 적의 배를 공격하는 일만 할 수 있었으며, 병력 수송력도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해군력은 적의 해상로를 차단하여 경제적 고통을 줄 수는 있었으나, 적의 도시를 직접 공격하고 적군을 소탕할 능력은 부족했다.

 

그리고 해군은 인적, 물적으로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했다. 1백 척의 삼단노선을 한 달 동안 운용하는 비용은 파르테논 신전을 세우는 비용의 네 배에 맞먹었다고 한다. 배를 만들고 수리하는 데도 돈이 많이 들었지만, 풍력을 별로 이용하지 못하고 다수의 노잡이들의 어깨 힘에 의존하던 당시의 배는 그 노잡이들에게 지불해야 할 급료 때문에 돈 먹는 하마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육전에서는 패배해도 대체로 투입된 병력의 10퍼센트 정도만 희생되었던 데 비해, 해전에서는 70, 80퍼센트를 웃도는 희생이 나왔다. 배 한 척이 침몰하면 배에 타고 있던 인원은 거의 몰살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육지에서 스파르타에 결정타를 가할 수 없는 이상 전쟁은 장기화될 수밖에 없었고, 아무리 아테네의 자금력이 풍부했어도 장기 전쟁에는 대책이 없었다. 게다가 인력 손실도 심각해져서 전쟁 말기에는 출신 성분별로 엄격히 구분되던 병종이 마구 뒤섞여, 귀족 출신이 노잡이를 하는가 하면 노예가 전투병으로 투입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페리클레스가 기대했던 대로 스파르타 주변의 나라들이 손쉽게 민주화되면서 반 스파르타로 돌아서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재난도 찾아왔다. 기원전 430년과 426년에 아테네를 덮친 역병이었다. 종래 페스트로 알려진 이 역병은 최근의 연구에서는 장티푸스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무튼 페리클레스의 주장에 따라 아테네 성벽 안에 주민들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에 피해는 더욱 컸다. 기원전 429년에는 페리클레스 자신조차 역병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이 역병은 아테네 인구의 삼분의 일을 쓸어갔으며, 그렇게 전쟁이 격렬하지 않았던 초기 10년 동안에는 역병에 따른 인명피해가 아테네가 입은 인명피해의 대부분이다시피 했다. 

 

스파르타 중장보병의 복원도.

 
 

아르키다모스 전쟁


기원전 431년 3월,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테베가 델로스 동맹의 플라타이아이를 공격하며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첫 국면은 기원전 421년까지 이어졌으며, 스파르타 왕의 이름을 따서 ‘아르키다모스 전쟁’이라 부른다. 이 때에 스파르타는 계속해서 아티카를 침입했고,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직접 공격을 가하기보다 스파르타 편을 드는 도시들, 가령 메가라, 포티다이아, 미틸레네 등을 해군력을 앞세워 공략해 나갔다.

 

스파르타는 아테네 영토인 아티카를 손쉽게 점령했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었고, 아테네인들의 과수원과 농장을 망친 다음 3주 정도만에 철수하고는 했다. 본국의 농경지를 버려둘 수 없는 데다, 군대가 오래 외지에 머물러 있으면 본국에서 헤일로타이의 반란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병이 아니었다면 아테네인들은 성벽 안에서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의 전통 군대가 공성전에 익숙하지 않았던 점도 스파르타가 성벽 안의 아테네인을 건드리지 못했던 까닭 중의 하나인데, 기원전 429년에는 아테네 아닌 플라타이아이를 상대로 처절한 공성전을 펼치게 된다. 아르키다모스는 성 주위를 봉쇄해 농성군을 굶주리게 하고, 흙으로 망루를 쌓아올려 성벽 안으로 불화살을 쏘고, 땅굴을 뚫고, 플라타이아이의 내분을 획책하는 등 별 방법을 다 써 보았으나 플라타이아이는 아테네의 원군 없이 자력으로 2년을 견뎌냈다. 비슷한 시기에 아테네는 에게 해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에 전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미틸레네는 본래 델로스 동맹 소속이었으나 반기를 들었으며, 충격을 받은 아테네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미틸레네를 꺾어 버리려 했던 것이다. 기원전 427년, 미틸레네와 플라타이아이는 한 달을 사이에 두고 각각 아테네와 스파르타에게 항복했다. 그 처리를 두고 아테네는 “미틸레네의 모든 성인 남성을 죽이고, 나머지는 노예로 삼는다”는 결정을 내렸다가 하루 만에 너무 가혹하다며 취소하였으며(취소 결정은 간발의 차이로 미틸레네에 도착했다. 살육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스파르타는 주도자만을 심판하겠다는 약속을 깨고는 플라타이아이의 성인 남성들을 도륙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이런 차이는 민주국가와 군사국가의 성격 차이에서 나온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전쟁이 격화되면서 잔인한 보복과 포로 학살은 점점 더 일반적이 되고,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가리지 않게 되어갔다.

 

미틸레네에 잔인한 보복을 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던 사람 중에는 “선동정치가”의 대명사처럼 알려지게 될 클레온(Kleon)도 있었다. 그는 늘 호전적인 주장으로 아테네인들의 주의를 환기했는데, 페리클레스 집권기에도 “겁쟁이처럼 성벽 안에 틀어박힌 채 적들이 우리 땅을 멋대로 유린하는 꼴을 지켜보게만 만드는” 페리클레스의 정책에 반기를 들어 한때 탄핵에 이르게도 했다. 그런 그가 페리클레스 사후에 아테네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르자, 마침내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육상에서도 격돌하게 되었다. 역병에도 불구하고 아직 아테네의 인구는 스파르타를 훨씬 웃돌았으나, 스파르타는 자타가 공인하는 정예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원전 425년에는 스파르타 지휘관 브라시다스(Brasidas)의 부상과 헤일로타이의 반란 조짐을 잘 이용하여 스파크테리아에서 스파르타군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클레온이었으나, 펠로폰네소스는 424년에 아티카 북부의 델리움에서 아테네군에게 앙갚음했다. 과두파가 집권하던 보이오티아를 민주화하고, 아티카를 적의 손에서 빼앗으려던 아테네는 수만의 병력을 동원해 델리움으로 진군했다. 이 때 비로소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처음으로 대규모의 중장보병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밀집대형을 이룬 중장보병대끼리의 대결은 비교적 약한 전력을 진형의 좌측에, 강한 전력을 우측에 배치하고는 서로 상대의 좌군을 먼저 깨트리고 중군, 우군을 격파하려 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두 마리의 뱀이 서로를 휘감으며 머리를 물려고 하는 식으로 벌어졌다. 아테네의 우군은 먼저 펠로폰네소스의 좌군을 깨트렸으나, 병력 운용을 잘 못한 탓에 엉뚱하게 자신들의 중군을 공격해 버렸다. 사태가 수습된 다음에는 별안간 나타난 소수의 보이오티아 기병대를 대규모 원군으로 착각하고는 도주했다(소크라테스도 그 속에 있었다는 말이 있다). 그 사이에 보이오티아 연합군은 아테네의 남은 군대를 여유 있게 쓸어버렸다. 육지에서는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한 수 아래라는 사실을 증명한 전투였다.

 

이어서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는 아테네의 주요 자금원인 은광으로 접어드는 요충지, 암피폴리스를 공략했다. 암피폴리스는 스파르타의 손에 들어갔고(이 때 구원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투키디데스가 추방된다), 클레온은 전력을 기울여 기원전 422년에 암피폴리스 탈환전을 펼쳤으나, 적진을 뚫지 못하고 맥없이 후퇴하다가 전사하고 만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브라시다스도 전사함으로써, 양 측은 휴전을 모색하게 된다. 그리하여 422년 겨울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평화협정이 이루어졌고, 아테네 측 대표의 이름을 딴 “니키아스의 평화”가 약 7년 동안 이어진다.

 

참고문헌: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범우사, 2011);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책세상, 2004); 도널드 케이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까치, 2006); 빅터 핸슨, [고대 그리스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가인비엘, 2009); 장준호,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재구성: 외교논쟁과 그 현대적 함의”,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28집 제2호. 2007); 정재욱,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 내재된 투키디데스의 모순과 그 함의”, (동아시아연구. 제4호. 2002); 양준희,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론에 대한 재해석: 티모스적 시각과 (신)현실주의”, (국제정치논총. 제38집. 3호. 1998). 
 

함규진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스파르타 전사상.<출처: (CC) Benutzer:Ticinese at Wikipedia.org>.

 
 

니키아스의 “평화”, 그리고 멜로스의 비극


니키아스의 평화는 전투가 전혀 없는 평화는 아니었으며, 단지 서로가 확전을 자제했을 뿐이었다. 아테네 쪽에서 전쟁의 향방을 뒤바꿔 놓을 수도 있었을 모험을 시도한 때는 기원전 420년이었는데, 주인공은소크라테스(Socrates)의 제자이며 미남이자 재주꾼으로 유명했던 알키비아데스(Alkibiades)였다. 그는 먼저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이간질하려 했다. 니키아스 평화협정에는 스파르타만 서명했으며, 테베 코린토스는 서명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들과 스파르타 사이에 생긴 틈을 최대한 벌어지게 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펠로폰네소스에서 민주국가로 돌아선 아르고스, 엘리스, 만티네아와 손을 잡고 스파르타를 포위해 들어간다! 알키비아데스는 이 전략을 실현하기 위해 직접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북부에서 암약하는 등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418년의 장군 선거에서 아테네인들은 알키비아데스 대신니키아스(Nikias)를 선출하여, 온건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니키아스는 아르고스 등이 스파르타와 싸우면 경우에 따라 힘을 보탤 수도 있으나, 아테네가 먼저 평화협정을 정면으로 깨트릴 수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자 스파르타가 먼저 움직였다. 아기스 왕(Agis II)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패권을 잃으면 끝장이라는 생각에서, 1만 2천의 중장보병을 동원해 적대세력들을 분쇄하기 위해 만티네아로 진군했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서 아르고스와 만티네아도 전력으로 맞섰다. 그러나 아테네는 고작 1천여 명의 병력을 보냄으로써 “힘을 보탠다”는 말도 꺼내기 부끄러울 정도에 그치고 만다. 전투는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으나 아르고스 등도 분전했으므로, 아테네가 델리움에서처럼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면 결과는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스파르타는 만티네아인들은 잔인하게 살육하면서도 아테네의 패잔병은 달아나게 둠으로써, 니키아스에게 “보답”했다. 평화는 공식적으로 깨지지 않았다.

 

평화는 온건론자들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망쳤다며 목소리를 높인 알키비아데스가 새로운 모험, 즉 시칠리아 원정을 밀어붙임으로써 깨지게 되는데, 그에 앞서 작지만 의미심장한 비극이 아테네의 손에 의해 벌어졌다. 기원전 416년, 그리스 남동부의 작은 섬인 멜로스가 느닷없이 아테네의 침공을 받았다. 멜로스는 줄곧 중립을 지켜왔기에 뜻밖일 수밖에 없었는데, 아테네는 멜로스인들이 스파르타와 같은 종족임을 들어 그 중립을 믿을 수 없다, 항복하고 아테네에 예속되든지 멸망하든지 선택하라는 요구를 들이밀었다. 멜로스인들은 중립을 깰 의사가 없음을 주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정의가 우리 편에 있다. 강자라고 해서 이렇게 무도한 일을 저질러도 되는가”는 멜로스인의 항변에 아테네인들은 “우리야말로 정의이다. 정의란 곧 약자는 강자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대꾸했다. 결국 멜로스는 결사 항전을 벌였고, 아테네는 이 섬을 점령한 다음 성인 남성은 전원 학살, 부녀자는 노예로 만드는 ‘멸국’을 실행했다. 뒤통수를 친 미틸레네에 대한 분노를 인간적인 동정심으로 억눌렀던 아테네인들. 전쟁은 약 10년 만에 그들의 인간성을 말려죽였던 것일까.


멜로스 섬 해안에 솟은 바위. 2400여년 전의 비극을 묵묵히 바라보았을 것이다.
<출처: (CC) Arkoudes at Wikipedia.org>.

 

모험과 파국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에는 그리스 폴리스의 식민지로 출발하여 이제는 거의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는 도시국가들이 모여 있었다. 시칠리아 최대의 도시 시라쿠사는 스파르타를 원조하고 있었다. 반면 세게스타는 아테네의 동맹국이었는데, 역시 친 스파르타인 세리누스와 분쟁에 들어가면서 아테네에 구원을 요청했다. 아테네에서는 알키비아데스를 중심으로 이번 기회에 시칠리아를 손에 넣어 스파르타의 돈줄을 끊고 전쟁 수행의 기반을 마련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기원전 415년, 134척의 삼단노선에 5천여 명의 중장보병, 총인원 2만 5천의 대규모 원정군이 시칠리아로 출발했다.

 

사령관은 알키비아데스였으나, 조국 아테네는 다시 한 번 그에게 실망을 주었다. 헤르메스 석상이 누군가에게 파괴되었는데 그 범인으로 알키비아데스가 지목되면서, 원정을 중지하고 돌아오라는 소환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불복했을 뿐 아니라 스파르타에 망명해 버렸다.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가 결국 아테네에서 숙청되고는 페르시아에 망명했던 전철을 밟았다고 할까.

 

알키비아데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원정은 좀처럼 잘 풀리지 않았으며, 이듬해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가 2차 원정대를 이끌고 합류했으나 같은 해에 스파르타도 구원병을 보내자 전세는 완전히 아테네에게 불리해졌다. 기원전 413년, 아테네군은 에피폴라이 등에서 대패하고 퇴각을 시도했으나 그나마 실패하고는 처참하게 전멸하고 말았다. 7천에 달하는 포로는 채석장 노예로 팔려갔다.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는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의 앞길에 암운을 드리웠다. 인적, 물적, 심리적 피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아테네에게 계속 충격이 닥쳤다. 기원전 412년에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었으며, 에게해의 델로스 동맹국들이 대거 반 아테네로 돌아섰다. 이 모두가 알키비아데스가 꾀를 써서 조국을 팔아먹은 결과라고들 했다. 델로스 동맹 기금이 끊기고 은광까지 적에게 빼앗긴 아테네에 비해, 본래 자금력이 아테네만 못했던 스파르타는 새로 페르시아의 원조를 받게 되어 훨씬 여유가 생겼다. 더 나아가 스파르타는 그 자금력을 바탕으로 ‘모험’을 시도했는데, 바로 해군 건설이었다. 아테네는 신생 스파르타 해군과 맞서 키노세마(BC 411), 키지쿠스(BC 410)에서 잇달아 승리하여 “해군은 아무나 하나”는 교훈을 주는 듯 보였다. 그러나 명장 리산드로스(Lysandros)가 해군을 이끌며 스파르타 해군이 아테네를 물리치기 시작했고, 당황한 아테네는 한때 알키비아데스를 복귀시키면서까지 대응했으나 대세는 돌이킬 수 없었다. 기원전 406년, 소아시아 연안의 아르기누사이에서 아테네 해군은 스파르타 해군을 크게 격파하여 오랜만에 국위를 떨쳤다. 그러나 아테네 민회는 승리한 장군들을 처형했는데, 바다에 떨어진 아군 생존자들의 구출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이듬해,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은 아테네의 참패로 끝났다. 아테네의 삼단노선 180척 중 170척이 격침 또는 나포되었고, 수천의 포로들은 전원 학살되었다.

 

이로써 아테네는 사실상 전쟁을 계속할 능력을 잃었다. 아이고스포타미의 소식을 들은 아테네인들은 밤새 울고 소리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투키디데스의 뒤를 이어 전쟁사를 기술한 크세노폰(Xenophon)은 적고 있다. “모두들 스스로가 멜로스인들에게 가했던 행위를 당하게 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몇 달 뒤 무방비 상태의 피레우스 항에 리산드로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함대가 당당히 진입했으며, 아테네는 항복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국 중에서 테베는 “아테네인 모두를 노예로 만들고, 아테네의 건물을 모두 부수고 땅을 갈아엎어 목초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결국 아테네와 피레우스 항을 보호하던 성곽을 헐고, 델로스 동맹을 해체하며, 12척의 함선만을 유지한다. 그리고 민주정부를 없애고 과두정체를 수립한다는 조건으로 아테네의 항복이 수용되었다. 기원전 404년 4월이었다.

 
누가 승자인가


아테네의 “30인 참주”체제는 오래 가지 못했다. 몇 개월 만에 정변이 일어나 민주정이 복원되었으며,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면서 아테네와 코린토스가 합세한 스파르타-코린토스 전쟁, 그리고 스파르타-테베 전쟁에서 모두 스파르타가 패배함으로써 스파르타도 승자의 영광을 오래 누리지 못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끝을 이 때로 잡고, 결국 아테네가 승리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아테네고 스파르타고 할 것 없이 쇠퇴와 몰락의 그림자는 지울 수 없었다. 전쟁 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더 이상 밀집대형을 이룬 중장보병은 전쟁의 핵심이 되지 못했으며, 다양한 무기와 병과를 동원하는 공성전, 참호전, 상륙전 등의 전법이 전장의 모습을 변화시켜 갔다. 그런 변화에 가장 잘 적응했던 세력은 아마도 북쪽의 마케도니아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빅터 핸슨의 말처럼 “25만 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침략했던 페르시아도 물리친 아테네가, 왜 단지 4만 명을 이끌고 쳐들어온 마케도니아에게는 패배했는가”하는 사실을 보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치명적인 피해”를 그리스 세계에 입혔음은 분명해 보인다.


스파르타의 폐허. <출처: (CC) Thomas Ihle at wikipedia.org>.

 

아테네는 왜 패배했을까? 버나드 몽고메리는 지나치게 해군력에만 의존했던 페리클레스의 전략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테네는 대전 중반기부터 육상전도 시도했으며, 그 결과는 페리클레스의 전략을 고수하던 것에 비해 썩 좋지도 않았다. 투키디데스가 자신의 책에서 은근히 암시한 것처럼, 아테네의 민주주의 체제가 효율적인 전쟁 수행을 방해한 점도 있다. 알키비아데스나 아르기누사이 해전의 승자들을 ‘도덕적 문제’를 들어 숙청했던 식으로. 그러나 한편으로 브라시다스나 리산드로스 등 총지휘관의 역량에 너무 의존했던 스파르타의 방식이 진정 효율적이었을까? 민주주의 체제는 분명 어이없는 실책을 저지를 때도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독재 이상의 효율성을 가져온다. 아테네가 비록 이 전쟁에서 패배했다지만, 제국을 잃었을 뿐이며 국가도 국체도 지켜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거의 파산 상태에 빠져버렸다. 더 이상 노예들을 착취하는 군국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전쟁을 치르는 도중보다는 시작할 때, 과연 민주국가의 지도자들이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는 결정을 더 잘 내릴 수 있느냐는 점이다.

(끝)
2011.07.29.
 
 

투키디데스

“내가 여기에 쓰는 역사는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역사의 반복 또는 적어도 반복에 가까운 것을 대비하려는 사람이라면, 이 글에서 충분한 도움을 얻을 것이다. 이는 대중의 찬사를 받고자 쓰는 문학이 아니라, 영원한 지식의 보고로 남기 위해 이루어진 사실의 집적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서문에서 밝힌 대로, 투키디데스는 이십 년 정도 먼저 태어나 [역사]를 써낸 헤로도토스에게 ‘역사의 아버지’라는 영예는 빼앗겼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역사, 오직 사실에 기초한 인간의 역사”의 선구자로서의 위치는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다. 

 

 

아테네 “제국”, 그 영광과 황혼

 

기원전 5세기의 중간쯤에 아테네는 건국 이래 최대의 영광에 도달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초강대국 페르시아의 침공을 물리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 덕분에 또 다른 침략을 대비하고자 만들어진 델로스 동맹의 맹주를 맡았다. 이 동맹이 점차 아테네의 국력을 떨치기 위한 기반으로 바뀌고,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하게 된 아테네는 해상무역의 주도권 역시 잡아 막대한 부를 누리게 된다.  


 

이와 함께 페르시아 전쟁에 복무했던 하층민들의 참정권을 인정하면서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페이디아스, 아낙사고라스, 소크라테스,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파네스 등이 나타나 학문과 예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영광의 시대를 이끈 대정치가 페리클레스가 자신 있게 말했듯, “아테네는 그리스 전체의 모범”이라 할 수 있었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아테네 제국’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출처 : wikipedia>


그러나 이런 “아테네 제국”에 대한 반발도 커져갔다. 아테네는 맹주의 권한을 남용하여 델로스 동맹 기금을 사적으로 전용하는가 하면, 동맹에서 탈퇴하는 나라는 힘으로 제압하고 점령군을 두어 군사통치를 했다. 델로스 동맹 회원국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법률 문제는 아테네의 법정에서 아테네 시민들의 판결에 따르도록 강요되었기에 오랫동안 독자적인 삶을 누려온 소국가들의 불만이 컸다. 뿐만 아니라 전통의 육군 강국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패권을 염려했고, 시칠리아 등 멀리까지 식민지를 확대하려는 아테네에게 원래 그 지역에 이권을 갖고 있던 코린트 등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이들 동맹에 포함된 나라들과 중립인 나라들 사이의 역학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마침내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중간에 몇 년 동안 휴전하기도 하면서 기원전 404년까지 이어진 이 전쟁으로 아테네 제국은 몰락했으며, 승리한 펠로폰네소스 역시 힘이 다하면서 그리스 전체가 쇠퇴해 버린다. 그리하여 북방에서 힘을 기른 마케도니아에게 정복되고, 다시 로마의 손에 들어가면서 그리스의 영광과 독립은 천 년 이상 실종되고 만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이 시기에 살면서 이 전쟁에 직접 참전하고 또 관망했던 투키디데스가 조국 아테네의, 아니 그리스의 몰락을 엮어낸 역사서다.

 
 
오랜 추방이 불멸의 책을 쓰게 하다 


투키디데스의 생애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그의 아버지는 오롤로스이며 트라키아 왕가의 피를 이었고, 그곳의 광산을 소유했다고 한다. 아테네의 장군으로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인 밀티아데스와 친척관계라는 말도 있으며,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와도 혈연이 있다고 하지만 모두 분명하지 않다. 당시 오롤로스라는 이름이나 투키디데스라는 이름이 비교적 흔했기 때문에 이런 혼동이 불가피했다. 아무튼 그가 상당한 명문가 태생으로 유복하게 자랐음은 확실해 보인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의 가르침을 받아 무신론자가 되었으며, 귀족주의자였던 변론가 안티폰에게 웅변을 공부했다. 따라서 그는 귀족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발전을 적극 지지했고 페리클레스의 정치적 동지가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대중이란 선동에 놀아나거나 일시적인 감정에 휩쓸려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고 보았으며, 페리클레스와 같이 현명한 지도자가 있어야 민주주의가중우정치로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을 막지 못하고 어느 정도는 부추긴 페리클레스에게 반대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는 전쟁 직전에 이미 이 전쟁이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여겼으며, 그 진행 과정을 충실히 파악하고 기록하기 위해 여러 계층의 아테네인들에게, 심지어 일부 스파르타인들에게까지 돈을 주고 정보를 제공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가령 어떤 전투가 아테네의 사실상 패배로 끝났어도 아테네가 승리했다고 진상을 왜곡하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최대한 여러 각도에서 사실을 보려고 했던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424년 겨울에 장군으로 트라키아 암피폴리스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 군의 브라시다스가 암피폴리스를 점령함으로써 투키디데스는 책임을 지고 아테네에서 추방당한다. 이것은 과도한 조치였는데, 투키디데스가 패전한 것이 아니라 그가 도착하기 전에 암피폴리스가 브라시다스에게 항복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투키디데스는 에이온 지방을 적에게서 빼앗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는 페리클레스가 예상 밖으로 길어지는 전쟁으로 입장이 곤란했으며, 그나마 몇 년 뒤에는 역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한편 페리클레스의 라이벌이자 투키디데스와는 앙숙이었던 클레온이 권력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투키디데스는 20년 가량이나 아테네에서 떠나 있어야만 했다.  



투키디데스를 좌절시킨 암피폴리스의 폐허. 1831년의 그림. <출처 : wikipedia>

 

“...그러나 덕분에 나는 양쪽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 특히 펠로폰네소스 인들의 입장을 차분히 관찰할 수가 있었다.” 투키디데스의 독백처럼, 이런 불운은 한편으로 그의 역사 기록에는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그가 20년의 추방을 겪지 않았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그만큼 풍부하면서 심도 있는 작품이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면 20년 뒤에는? 이 부분이 모호하다. 기원후 2세기의 그리스 학자인 파우사니아스는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한 기원전 404년 직후에 투키디데스의 추방이 해제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파우사니아스는 그가 아테네로 돌아오던 길에 누군가에게 암살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기록에는 기원전 397년에도 그가 살아 있었다고 한다. 로마의 플루타르코스는 투키디데스가 아테네에 돌아와 기원전 395년쯤에 죽었으며, 친척인 키몬의 가족 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반면 그가 끝내 아테네로 돌아오지 못한 채 트라키아에서, 또는 이탈리아에서 숨을 거뒀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튼 “20년 동안의 추방”이라는 표현이 투키디데스 자신의 글에서 나옴을 볼 때 그가 전쟁이 끝나던 기원전 404년까지는 살아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왜 [전쟁사]를 기원전 411년의 일까지만 쓰고 남겨두었는지도 의문이다. 이처럼 이 위대한 역사가의 개인적 역사는 시작도 끝도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전쟁사]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작품이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그의 이름을 불멸케 했다.
 
 
“오직 사실만이 말한다”


그러면 투키디데스의 역사 서술은 어떤 점에서 독특했을까? 그는 우선 “그럴듯한 이야기”를 일체 배재하고 “근거 있는 사실”만 다루었다. 헤로도토스만 해도 신화와 전설, 야담이나 뜬소문 등을 뒤섞어 썼으나 투키디데스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일이나 여러 자료와 증언에 따라 사실이라 믿어지는 것만을 썼다. 이로써 역사는 비로소 “옛날 이야기”를 벗어나 “사실의 기록”이 된다. 또한 그는 역사 기술자의 주관과 입장을 배제하고 철저히 객관적으로 사건을 다루려고 했다. 헬레니즘 시대의 학자인 마르케리노스의 말대로 그때까지는 “코린트인은 자기네가 살라미스 해전에서 도망쳤다는 사실을 왜곡하고, 티마이오스는 자신의 아버지와 친했다는 이유로 안드로마코스를 찬양했다. ... 크세노폰은 플라톤을 질투했기에 플라톤을 따르던 메논을 험담했다.” 그러나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와 절친한 사이였음에도 그의 실수나 약점을 고스란히 기록했고, 조국 아테네의 참담한 패배나 어처구니없는 실책도 빠짐없이 담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묘사된 페리클레스의 장례식 연설을 그린 상상도. 당시는 전쟁이 시작된 직후인 기원전 431년이었고,
이 연설에서 “아테네는 그리스의 모범”이라는 말이 나왔다. <출처 : wikipedia>


또한 투키디데스는 역사의 흐름이 신이나 운명 같은 초자연적 존재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호메로스는 트로이 전쟁을 신들의 게임으로 풀이했고, 헤로도토스도 신의 뜻이라거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식의 해설을 곧잘 했다. 하지만 투키디데스는 우연을 제외하고는 인간의 의지만이 역사를 만들어간다고 보았다. 이런 독특한 역사관은 “과학적” 내지 “실증적” 역사관이라 할 수 있었고, 플루타르코스, 타키투스 등의 후배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2세기 로마의 작가인 루키아노스는 투키디데스야말로 역사가들이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확고한 지침을 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2천 년을 훨씬 뛰어넘어,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랑케는 투키디데스의 정신을 되살려 “실증주의 역사관”을 정립했다. 그는 또한 “현실주의 정치론”의 시조로도 평가된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어떤 이념이나 도덕 문제, 또는 우연에서 빚어진 것이 아니라 국제적 역학관계 때문이라고 했다.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이 아테네의 국력 증대를 우려했고, 이를 억제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원전 414년에 있었던 멜로스 대표와 아테네 사절 사이의 “멜로스 회담” 이야기는 그런 냉엄한 국제관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나타내 주는 사례로 꼽힌다.

 

헤로도토스(왼쪽)와 투키디데스의 양면 흉상.
<출처 : wikipedia>


당시 “우리가 무슨 불의한 짓을 했다고 우리에게 굴복을 강요하는가?”라는 약소국 멜로스의 항의에 아테네인들은 “당신들이 우리에게 잘못한 일은 없다. 하지만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뜻에 따라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유일한 정의다”라며 멜로스의 자유를 짓밟았다. 이는 국제관계를 기본적으로 힘의 관계로 이해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국가들 사이에 “세력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현대의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리고 정치 자체가 도덕이나 이념보다 권력의 역학관계에 좌우된다고 보는 시각은 마키아벨리 홉스 등의 사상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근대 정치학이 탄생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므로 현대 정치철학을 재정립한 레오 스트라우스도 [서양정치철학사]의 첫머리에 투키디데스를 놓았던 것이다. 이처럼 투키디데스와 그의 [전쟁사]의 목소리는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기에, 현실주의를 지양하려는 대표적 이상주의자였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도 파리 평화조약 회담장으로 가는 길에 [전쟁사]를 숙독하며 생각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한계와 의문


그러나 투키디데스의 역사서술과 사상이 그렇게 완전하지는 않았으며, 그의 영향력은 다소 과장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먼저 “실증적 역사서술”의 경우, 투키디데스가 개인적 입장과 주관을 배제하고 공평하게 서술했다고 하지만, 그는 사실 노골적으로 편을 들지 않았을 뿐이며 기사의 편집과 표현에서 교묘하게 자신의 편향성을 드러냈다고도 한다. 자신의 지론과 맞지 않는 사건은 언급하지 않거나 조그맣게 처리한다든가, 자신이 은근히 지지하는 쪽의 주장은 호소력이 큰 표현으로, 반대하는 쪽의 주장은 횡설수설하는 듯한 표현으로 기술하여 독자가 은연중 편향된 시각을 갖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언론이 중립을 표방하면서 은근히 특정한 입장을 옹호하듯, 투키디데스도 노골적으로 편을 들기보다 중립성을 내세우며 은근히 편드는 쪽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직접 보거나 충분한 근거가 있는 사실만 취급한다”는 투키디데스의 원칙도 역사가의 시각을 지나치게 좁혔다는 비판을 받는다. 역사가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정보의 범위는 매우 좁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화와 전설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필요는 없겠지만 과거사의 진실을 일부 알려줄 단서일 수 있는데, 실증적 역사관은 이를 일체 배제해버렸다. 또한 헤로도토스의 경우 이집트 문명의 독특성을 그 지리적 조건에서 찾는 등 자연, 인종, 경제, 문화 등에서 역사를 다각적으로 조명했지만 투키디데스는 오직 정치적, 군사적인 역사만을 역사로 보려 했음도 한계로 지적된다. 

 

이른바 “현실주의의 아버지”로서의 투키디데스도 의문의 대상이 된다. 투키디데스의 주장과는 달리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전의 아테네는 전성기를 지나 점점 국력이 쇠퇴해 가는 중이었고, 따라서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두려워하여 전쟁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는 점, 세력균형의 문제보다 오히려 지도자들의 정치적 입장이나 국민적 정서 등에서 전쟁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정말로 투키디데스가 현실주의자여서 국제관계는 오직 힘의 관계라 여겼다면 국가별 병력 규모나 전술전략, 지정학이나 경제력 등에 중점을 두어 서술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전쟁사]의 내용은 지도자의 연설이나 장군들의 무용담 등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그가 과연 현대 현실주의자들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일부. 10세기 경의 필사본이다.
<출처 : wikipedia>

  
오늘날 투키디데스의 “사실”이란?


기원전 5세기, 지금으로부터 2400년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 현대적인 “실증주의자”, “현실주의자”로 살고 생각했다고 보는 자체가 무리가 아닐까. 하지만 그의 역사 서술 방식과 그것에 깃든 사상이 참으로 보기 드문 것이었고, 그 영향이 오래도록 남아 지금까지도 일부 이어지고 있음은 사실이다. 투키디데스라는 인간은 우리의 직접 경험의 범위에서 아득하게 멀리 있지만, 그의 영향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점만은 “객관적”인 “사실”로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함규진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2010/12.22.
 

“우리의 정치체제는 이웃나라의 관행과 전혀 다릅니다. 남의 것을 본뜬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남들이 우리의 체제를 본뜹니다. 몇몇 사람이 통치의 책임을 맡는 게 아니라 모두 골고루 나누어 맡으므로, 이를 데모크라티아(민주주의)라고 부릅니다. 개인끼리 다툼이 있으면 모두에게 평등한 법으로 해결하며, 출신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에 따라 공직자를 선출합니다. 이 나라에 뭔가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서 인생을 헛되이 살고 끝나는 일이 없습니다.(…)실로 우리는 전 헬라스(그리스)의 모범입니다.” 기원전 431년, 페리클레스는 전몰자들을 추도하는 장례식 연설에서 절정에 달해 있었던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이렇게 찬양했다.
 
민주주의로 가는 길

 

아테네는 대략 기원전 10세기경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인데, 해외 식민지의 건설과 무역의 발달로 거둔 성과였다. 그것은 급격한 사회 변동도 가져왔다.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그때까지 농업을 기반으로 하고, 토지를 많이 가진 귀족들이 지배하는 체제였다. 그러나 상공업 발달로 막대한 부를 가진 평민이 늘면서 귀족과 평민 사이의 권력투쟁이 일어나고, 한편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의 대립도 발생했다.
 

이런 극심한 사회분열과 갈등을 틈타 ‘두 세력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사회안정을 가져오는’ 역할을 내세워 권력을 장악한 지도자가 ‘참주(티라노스)’였다. 대체로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독재로 정치를 했던 이들이지만 절망적인 사회분열보다는 공포 속의 안정이 낫다는 생각 덕분에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기원전 561년에(이후 한동안 실각했다가 546년에 재집권했다) 아테네의 정권을 잡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친서민 정책과 농업 진흥책, 문예 진흥책을 펴며 아테네를 강국으로 성장시켜 참주임에도 많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기원전 5세기로 들어서면서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참주들의 폭정에 견디지 못한 민중의 봉기가 일어나 참주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중에서 가장 빠른 나라가 아테네였다. 클레이스테네스는 기원전 510년에 참주 히피아스를 몰아내고, 508년에 아테네의 전통적 부족체제를 없애 부족 단위로 뭉쳐 상호 대립하는 악습이 사라지게 했다. 또한 참주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도자기 파편에 적어 다수표를 받은 사람을 추방하는 ‘도편추방제’를 도입해 참주가 다시 나타나는 일을 막았다. 이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큰 진보였다. 그러나 아테네가 본격적인 민주주의를 하기 위해서는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448)이 필요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륵세스 1세의 그리스 침략은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국가들의 사상 최대의 위기였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가 되는 법. 달걀로 바위치기라고 생각했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의외로 바위가 달걀에 맞아 쪼개지자, 그리스의 위상과 세력은 단숨에 뛰어올랐다. 특히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전투가 아테네의 해군을 주축으로 한 살라미스 해전이었기에, 이 전쟁 후 아테네는 그리스에서도 첫째가는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또한 아테네 사회 자체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페르시아를 물리친 후 재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국제기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었고, 따라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델로스 동맹’이 이뤄졌다. 동맹국들은 저마다 일정한 분담금을 내도록 했는데, 그것이 사실상 아테네의 국고처럼 되고, 그리스 방어용을 표방하여 아테네 본국의 함대를 건조하고 유지하는 데 쓰이며 바야흐로 “아테네 제국”이 탄생했다. 아테네가 해상제국으로 떠오르면서 페르시아 전쟁 때에 중요해진 노잡이들의 지위는 더욱 중요해졌다. 고대에는 군사장비를 개인 부담했기 때문에, 본래는 말을 소유할 수 있는 귀족들 위주의 기병대가 주력이었고, 이후 갑옷과 방패를 마련할 수 있는 부유한 시민들이 국방의 주축이자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군함의 노잡이는 팔 힘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최하층 시민들의 담당이었는데, 이제 그 노잡이의 중요성이 극대화된 것이다. 이것은 아테네 하층민들의 정치적 지위를 크게 향상시켰다. 페리클레스가 말한 대로 “통치권을 모두 골고루 나누어 맡고(…)나라에 뭔가 기여를 할 수 있다면 가난해도 상관없는” 본격적인 민주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여성과 노예는 그 ‘모두’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서양문명에 영원한 모범을 세우다


페리클레스는 이 아테네 민주주의, 아테네 제국을 전성기로 이끈 위대한 정치가였다. 귀족 출신이면서 클레이스테네스의 먼 친척이기도 했던 그는 보수파와 개혁파가 대립하는 와중에 개혁파의 선봉장이 되어 아테네의 정치개혁을 이끌었다. 또 그는 빼어난 용모에 인품도 뛰어났고, 웅변술은 당대에 당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학자나 예술가들과도 친했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 프로타고라스, 문인 소포클레스, 조각가 페이디아스 등과는 평생 친구였다.

 


아낙사고라스와 토론하는 페리클레스(상상도)

 

 

기원전 461년, 페리클레스는 보수파의 대표인 키몬을 도편추방에 걸어 내쫓는 데 성공한다. 이에 대항해 보수파에서 페리클레스의 동지로 개혁파를 이끄는 ‘투톱’ 중 하나였던 에피알데스를 암살해 버리자, 이후 페리클레스의 죽음까지 32년 동안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독무대가 된다. 당시는 분명히 민주제였으나 그가 마음먹으면 못하는 것이 없었으므로,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를 지은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당시는 사실상 페리클레스가 ‘첫째가는 시민’으로 통치한 1인 독재 시대였다”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 로마의 옥타비아누스가 ‘첫째가는 시민’을 자처하며 공화국을 제국으로 탈바꿈시킨 것과는 달리,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본질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처했을 때도 있는데, 친구인 페이디아스가 공금 유용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평생의 연인이었던 아스파시아가 신성모독 혐의를 받았을 때, 그리고 말년에 전쟁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였다. 이 때마다 페리클레스는 하마터면 도편추방을 당할 위험까지 처했고, 한동안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 선배들처럼 쿠데타나 암살이라는 수단으로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 오직 성난 군중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눈물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을 뿐이었다.

 

외교정책에서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제국을 유지해야 하지만, 되도록 무력 사용은 피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리스의 숙적 페르시아와는 기원전 449년에, 아테네의 라이벌 스파르타와는 445년에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내치에 힘썼다. 아직 페르시아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던 아테네를 말끔히 재정비하여, 누구나 찬탄할 만한 아름다운 도시로 만드는 사업도 그 중 하나였다. 오늘날까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아크로폴리스는 그의 시대에 이룩된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에 구현된 ‘완벽한 고전미’는 건축뿐 아니라 조각, 회화, 그리고 철학과 문학에서도 찬란히 성취되었다. 아이스큐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는 고전 비극을 완성했고,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역사학을 창립했다. 아낙사고라스, 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토스가 우주의 이치를 탐구하는 한편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도덕철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실로 아테네는 그리스뿐 아니라 전 (서양)세계의 모범이었고, 그 모범은 수천 년 동안 서양문명의 원천을 제공했다.


완벽한 것은 없다, 또는 단명한다

 


하지만 페리클레스가 “우리는 헬라스의 모범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 연설은 어떤 연설이었던가. 바로펠로폰네소스 전쟁 개시 후 몇 달이 지난 시점에서 전몰자들의 장례식을 치르며 행한 연설이었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얻은 그리스의 영광을 그리스인 스스로 허물어뜨리고, 아테네의 황금시대 또한 이로써 쇠퇴하고 마는 자멸적인 전쟁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결정적인 선택도 외면했고, 결국 자신이 완성한 ‘완벽한 체제’가 금이 가고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전쟁의 원인은 케르키라와 코린토스의 분쟁이라는 비교적 사소한 것이었으나, 그리스의 양대 강국인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여기에 말려들고 말았다. 스파르타는 아테네 제국이 못마땅했으나 특별히 손해를 보는 입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아테네가 스파르타까지 손에 넣으려 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아테네 역시 스파르타가 반 아테네 세력을 규합해서 제국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의심했다. 아테네 민회는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로 갈려 온통 시끄러웠다. 이런 가운데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를 선제공격하자는 주전파의 말을 듣지 않으면서, 스파르타의 체면을 살려 주는 최소한의 양보를 하자는 주화파의 주장도 거부했다. 그는 전쟁은 되도록 피해야 하지만 한다면 아테네가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스 최강의 육군을 가진 스파르타와 지상에서는 대결하지 않고 성벽을 의지해 철통 같은 방어에만 힘쓴다. 그 사이에 세계 최강의 아테네 해군으로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을 봉쇄하고 공략하면 결국 적들은 두 손을 들게 되리라는 계산이었다.

 


페리클레스 시대에 건설된 파르테논 신전

 


이 계산은 크게 보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두 가지 요소가 일을 그르쳤다. 하나는 지상에서는 오직 방어만 하는 전법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주전파의 비난이었다. 클레온을 비롯한 선동정치가(데마고그)들은 수십년 간 계속된 페리클레스 체제에의 염증을 교묘히 이용해, “페리클레스는 겁쟁이다” “적들이 우리 농지와 과수원을 마음껏 약탈하는 것을 우리는 손가락이나 빨며 보고 있으라고 한다”며 집요하게 성토했다. 이 때문에 페리클레스는 한동안 모든 공직에서 사퇴해야 했다. 얼마 후 아테네인들은 그를 다시 복귀시켰지만, 또 하나의 요소가 아테네와 페리클레스를 덮쳤다. 역병이었다. 페리클레스의 계획에 따라 모든 인구가 아테네 성벽 아래 밀집해 있었기에 전염병의 피해는 엄청났다. 이는 본래 페스트로 알려졌으나 최근의 연구에서 장티푸스로 밝혀졌는데, 결국 페리클레스 본인마저 병마에 희생되었다. 기원전 429년 9월이었다.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이 전쟁이 기껏해야 1년이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28년이나 끌었다. 결국 아테네가 기원전 405년에 스파르타에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끝났지만, 이긴 자나 진 자나 상처밖에 남지 않은 전쟁이었다. 페리클레스가 그토록 자신했던 민주정치조차 ‘중우정치’로 전락하거나 과두정치로 바뀌었고, 도시국가 내에서도 당파가 갈려 서로 헐뜯고 학살하면서 시민의 애국심도 도덕의식도 땅에 떨어졌다. 이토록 약해진 그리스를 다시 한 번 페르시아가 침략했다면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도시국가들의 문명을 끝장내는 바람은 동쪽이 아니라 북쪽에서, 젊은 정복왕이 다스리는 마케도니아에서 불어왔다. 

 
++ 네이버캐스트
2009.10.20.

'삶과 나 > 또 다른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제회복에 희망을 갖자  (0) 2015.09.26
자연과 인문  (0) 2015.09.26
2013년 세계 MBT (탱크)  (0) 2014.07.24
한미 해병 상륙훈련  (0) 2014.07.24
수메르문명(펌)  (0) 2014.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