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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초의 어원과 명칭
우리나라에서는 난화란 말보다는 난초라는 말로 많이쓰 인다.
매화, 국화의 명칭과 달리 난초라고 일컫는 것은 난은 꽃과 향기도 좋지만 ,
그 잎이 사철 청정하고 수려한 데서 화가 아니라 잎을 강조하는 초를 붙여
쓰게 되었을 것이다.
란(蘭)을 한자로 찾아보면 은대의 갑골문자나 주대의 금문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한대의 <설문해자>에 비로소 나타난다.
이로써 보면 우리말로 난초 또는 난도 중국의 진대 이후 에서 유래된
말임을 알 수 있다.
蘭 자를 草(초)와 闌의 합성어로 쓴 것은 난이 식물이기 때문에 부수인
풀초 자를 난에 썻음을 알 수 있다.
闌의 聲符子(성부자)를 쓴 것은 글자를 만들기 전에 난이란 구어가 있어서
그 음을 나타내기 위해 쓴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 난에는 문 밖을 가로막은 난간이라는 뜻이 있으므로 단순히 음만
취한 것이 아니라, 난초는 대개 화분에 심어 난간에 두고 완성하므로
자를 취해 뜻을 겸한 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생각 할 수 있다.
2, 공자의 생애와 난초의 상징과정
▷발생 텍스트로 자라난 난초
구애와 벽사를 의미하는 난초의 무속적 코드는 공자의 등장과 함께 군자의
유교적 코드로 변한다. 상징작용만이 아니다.. 약용이나 제례용으로 응용되던
‘상징물’이 문화텍스트를 만들어내는 ‘상징 기호’로 차원이 달라진 것이다.
따라서 창포와 동일시되기도 했던 난초의 느슨했던 정체성과 경계영역도 분명해진다.
돌과 옥이 대비되는 것처럼 난은 잡초와 차별화됨으로써 그 상징성을 들어낸다.
난초의 벽사 상징이 식물로서의 속성이나 약초와 같은 효용성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면, 군자의 상징성은 공자의 생애와 사상을 나타내는 전기적 요소에서 창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군자를 상징하는 난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공자가 빈 골짜기에서 난초를 만나 탄식하고 거문고를 탔다는 공곡유란의 고사는
공자와 난초가 결합된 환유적인 성격을 띤 상징성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군자의 덕을 난향에 비긴 일반적인 상징성 유사성에 그 기반을 둔 것이라
풀이 할 수 있다.
* 벽사와 세시풍속: 주나라 소왕의 설화에서 보듯 난초는 원혼을 풀어 주거나 액운을 쫒는
벽사의 힘이 있더고 믿었다. 그리고 공자가 살았던 시대만 해도 난을 구애를 뜻하는 상징물
이거나 선남선녀가 3월3일 삼짓날 냇가에 모여 난초(창포)를 캐어들고 노래를 겨루며 논
세시풍속과 관련이 있었다.
▷공자와 난초의 만남
지금까지 난초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 대부분은 공자가 빈 골짜기(空谷)에서
유란(幽蘭)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근원으로 한 것이며, <논어>나 <사기>와 같은
문헌이 아니라 주로 민간설화의 구비문화에 가까운 텍스트로 이루어졌다.
그 텍스트 중 하나가 전국시대를 중심으로 한 거문고의 곡명을 해설한 채웅(133~
192)의 <금조>이다. 그 책 가운데 공자가 작곡했다는 <의란조>의 을
풀이한 대목은 이렇다.
공자는 제후들을 찾아다녔지만 그들은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가던 길에 은곡을 지나던 중 홀로 무성한 난을
보고 분연히 탄식하며 말하길 “그 난은 마탕히 왕자에 합당한 향을 지녔거늘
어찌 잡초 사이에서 외롭게 피었느냐, 어리석은 자들 틈에서 오직 때를 만나지 못한
현자와 같구나” 그리고는 수례를 멈추고 거문고를 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짧은 서술이지만 이야기 속에는 서실상 공자의 전 생애가 압축되어 있다.
공자는 난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芝蘭生於深林 지란생어심림
不以無人而不芳 불이무인이불방
君子修道立德 군자수도입덕
不爲困窮而敗節 불위곤궁이패절
깊은 산속 지초 난초는 / 보는 사람 없다하여 향을 내지 않음이 없고
도를 딱고 덕을 쌓는 군자는 / 가나하다고 지조를 버리지 않는다.
▷난초의 시간 상징 - 열국의 순유
우선 공곡유란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시간축은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열국을 주유, 수많은 제후를 찾아다니다가 끝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노나라로 돌아올 때까지로 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공자가 난초를 만나기 전까지 BC 497년에서 483년애 이르는 13년
동안의 생애이다.
▷난초의 행위 상징 – 원과 한의 텍스트
행위의 축은 시간과 공간의 두 축이 합치는 좌표 위에서 벌어 진다.
그 행위를 조각으로 나눠보면 은곡을 지나다/ 향기를 맡다/ 잡초 사이에 숨어 있는
난 발견/ 난초를 보고 탄식하다/ 수례를 멈추다/ 거문고를 타다.
잡초들 사이에 피어 있는 난초는 범속한 필부들 틈에서 묻혀 지내는 자신의
모습이고, 맑고 높은 난향은 오랫동안 홀로 가꾸어 온 자신의 학력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누구도 맡을 수 없는 그 향기에 대한 아쉽고 분한 탄식은 바로 누구도 알아
주지 않아 이루지 못한 자신의 포부에 대한 탄식이다.
한마디로 이러한 탄식과 원과 한의 텍스트는 불우한 군자의 난초 상징에서
‘불우’쪽으로 시선이 더 쏠릴 때 발생하는 텍스트다.
3. 한국의 난 문화
▷ 조선의 한의 문화사
당쟁이 심했던 조선의 선비들은 ‘불우한 군자’로 살아가는 일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군자의 덕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때를 만나지 못한 불우함을 한탄한
‘원의 텍스트’와 ‘한의 텍스트’에 치우치기 쉬웠다.
그렇기 때문에 시문학은 말할 것도 없고 난초는 문인화의 영역에서도 송말의 화가
정사초의 그 것과는 또 다른 한 풀이의 특이한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규태의 글에서 지적되어 있드시 난초를 그린다고 하지 않고 ‘친다고’ 하는 데서
한풀이의 특성을 읽을 수 있다.
친다는 동사는 ‘눈보라 친다’. ‘떡매로 내려 친다.’할 때처럼 격렬한 동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난초를 그리면서 솟구쳐 오르는 억울함과 분한 마음 그리고
웅어리진 분노를 분수처럼 밖으로 자연스럽게 쏟아내는 행위는 분명 그리는 것이
아니라 치는 것이라고 해야 맞다. 그리는 것으로는 한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 복합적인 조선의 난문화
그러나 조선의 문화는 늘 양면성을 강하게 드러내듯이 한편에서는 난초를 불우한
군자의 이미지로 그리기 보다는 오히려 속세를 떠난 은자의 고결한 기풍으로,
혹은 도교사상의 영향으로 공곡유란을 공곡신선으로 바꾸는 은둔문화가 한의
텍스트 못지않게 성행했다는 사실을 놓칠 수 없다.
퇴계는 <도산십이곡>에서 빈 골짜기에서 제 홀로 향기를 풍기고 있는 난초의
자태를 불우한 군자의 한으로 보지 않고 스스로 덕을 쌓아 독립득행하는 군자의
고결한 상징으로 예찬했다.
이황의 호인 '퇴계' 가 의미하듯이 평생 동안 벼슬자리를 스스로 사양하거나
물러나기 위해 임금에게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한 퇴계는 계곡의 난과 궁궐의
난초를 다같이 사랑한다.
유란이 재곡하니 자연히 듣기 좋네/
백운이 재산하니 자연히 보기 좋네/
이 중에 피미 일인을 더욱 잊지 못하네
* 피미일인 = 궁궐의 임금
▷ 번성의 싱징으로서의 난초
신화의 세계에서 난초는 여름의 신인 화성을 상징하여 번창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난초를 기르거나 그림 그리는 것은 번창의 기원을 담은 것이다.
난초 가운데 손이라는 품종은 보라빛 꽃을 피우는데 그 발음이 손과 같아서
자손을 뜻한다.
다른 난초들도 대게 고귀한 자손을 의미한다. 난손이라고 하면 상대방의 손자에
에 대한 미칭으로 쓰인다.
경기도 지방에는 '난초꽃이 번창하면 그 집에 식수가 는다'는 말이 있었다.
또 충북 지방에서는 "꿈에 난초가 대 위에 나면 자손이 번창하고, 난초꽃이 피면
미인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었다고 한다.
▷ 부끄러움이 없는 지식인의 이상
조선말의 지사 이건창은 청백의 정신과 우국문학으로 유명했다.
그는 35세 때, 종제인 난곡 이건방이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에 <난곡4장>을
지어, 조정에 나가더라도 인적없는 골짜에서 꽃을 피우듯 아름다운 덕을 함양하라고
권면했다.
난초는 나라에 향을 풍겨야 하거늘/ 인적없는 골짝에서 꽃을 피웠기에/
성인은 한숨지었다만/ 난초야 스스로 부끄러워 하지 않았네/
화려한 옷에 채색 노리게 차고/ 조정에 오르면/ 왕자야 귀하게 여기겠지만/
난초에 빛을 더하진 않는다오/
골짜기에 있어도 난이요/ 조정에 있어도 난이니 / 난의 본성이 어떠한가
향기롭고 무성하여/ 향기를 스스로 풍길 뿐/ 꼴짜기든 조정이등 관계없다오.
▷ 자연 혹은 자연스러움의 상징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춘사 제7곡에 보면 난초와 지초의 심상이 함께 나온다.
방초를 바라보며 난지도 뜨더보자/ 일엽편주에 시른 거시 무슨 것고/
두어라 갈제는 내뿐이오 올제는 달 뿐이로다.
난초와 지초를 격정시키지 않고 병렬시킨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난초는 뭇 풀과 본성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방초와 어우러져 자연의 세계를
구성한다. 즉 난초와 지초를 방초의 곁에 나란히 둠으로서 자연의 조화로운
세계를 표상해냈다.
▷ 난초의 향기 상징
난은 자스민, 계화와 더블어 향화삼원으로 칭송을 받아왔다.
자스민은 차로, 계화는 식품향료로서 각기 첫손에 꼼혀 왔지만 그 가운데서도
난은 전체의 향초를 대표하는 조향으로 으뜬의 자리에 있었다.
난초라 하면 사군자의 하나로 금방 묵란화가 떠오르지만 비록 묵향을 맡을 수 있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회화는 시각예술로 군자의 인품을 상징하는 난초의 후각적
세계를 표현항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난초의 상징세계에 관한 최종적인 물음은 난향에 대한 것이며, 그 향기의
후각 기호가 시각 기호를 비롯해 다른 감각 기호와 어떻게 구별되는 가를 따지는
일이다. 난초에서 향기상징을 빼면 모든 상징세계가 무너지고 만다.
난초는 잎의 특성, 꽃과 심지어는 모든 부위에 상징성을 담고 있지만 그 것들을
하나로 지탱하는 상징의 기둥은 난향에 있다.
묵란도의 모든 제시의 시구에서 난향이 집약되어 있는 것처럼 난향은 난초의 속성이
아니라 그 전체를 대신하는 제유의 역활을 해왔다.
난초의 별칭인 '천하제일향', '국향', '왕자향', '향조' 등을 보아도 난초=향 이라는
등식관계를 알 수 있다.
▷ 선계의 구성요소로서의 난초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난초는 대개 고결한 인품이나 자연의 본성 자체를 상징했다.
한편 중국 문학에서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시문에서는 난초가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예가 드물다.
오히려 선계의 구성요소로서 표상된 일이 있다.
소설헌 허경란의 시가 그렇다. 허경란은 선조 때 한 역관이 명나라 여자와의 사이에
낳은 딸이라고 하는데, 허난설헌의 시에 차운해 시집을 남겼다.
즉, 소설헌은 허난설헌의 <유선사> 87수 가운데 74수에 차운을 했는데, 제11수에서
선계의 밤 풍경을 다음과 같이 형상화 했다.
은촛대 촛불과 옥수슬 평상의 빛은 맑은 하늘을 깨뜨리고/
달은 난초 물가를 굽어보며 아득히 높이 떠 있구나/
뜰에 향기로운 안개가 촉촉이 물기를 품었을 때/
깊숙이 통방에 들어가 옥퉁소를 부노라.
선계는 맑은 이미지와 화려한 이미지가 겹쳐있다. 달이 난초 물가를 비추는 관경
관경 또한 맑은 이미지와 화려한 이미지가 겹쳐있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트 박물관 소장
중국은 예부터 낙취를 방지하고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난초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이는 일본에도 전해져 모두 난향을 풍겼으며 무사들은 재앙을 물리치고 구급상비약으로서
난초를 몸에 지녔다고 한다.
간송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추사가 산 속에서 소심란과 홍심란을 찾아내고 이를 같이 즐기고 싶은 임 생각에
시를 쓴 정섭의 시를 공감하여 그린 그림이다.
' 산중에 찾고 또 찾아서 붉은 속꽃 흰 속꽃을 찾아내었네, 한 가지 보내련들 길이 멀구나,
이슬 향기 차기가 지금 같고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난초는 옛사람들이 닐컫기를 '꽃 가운데 군자'라고 햐 향기가 적은 소나무, 꽃이 없는 대나무
, 꽃과 잎이 따로 있는 매화의 세한삼우 보다 상위에 그 가치를 두었다.
또한 꽃과 잎과 향기가 함께 있는 난초는 궁벽한 산야에서 자라지만 온갖 꽃과 아름다움을 다투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구차하게 이를 얻는 것을 아니한다 해 불우한 가운데서도 구결한 인격을 잃지 않는 군자의 품성과 다름없이 보았다.
중앙국립박물관 소장. 난초는 실물 보다 정신을 소중히 여겨 선비정신과 동일화했다.
특히 유교 정신과 융합해 조선의 선비사회를 지배하기도 했다.
진주국립박물관 소장, 예나 지금이나 난초는 다른 식물보다 기르는 데 무척 정성을 들여야 한다.
난에게 쏱는 정성에 비해 난초에게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과 정신적 충족감이 더 크다.
간송미술관 소장, 이 그림은 서화로 일생을 보냈던 문인화가 김영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바위 밑에 수직으로 뻗은 수려한 자태의 난초가 자리하고 있다.
오른쪽 상단에 적힌 조맹부의 묵란에 대한 제시ㄱ의 내용에서 알 수 잇드시
이 그림은 난초의 향기를 주위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과 어울려 시각적으로 옮겨
왔음을 알 수 있다.
석파 이하응의 석란도에서 원과 한의 텍스트를 넘어 한 시대를 호령했던 대원군의 모습을 관해보시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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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6. 10. 한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