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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연치 않은 이유(이씨 왕조는 나라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로 나라를 잃고
고통을 겪은 국민에게 미국을 등에 업고 36년 동안 국민을 피폐하게 했던 구
일본 경찰제와 검찰인원으로 한 치안유지와 부정부패 행정으로 국가 재건의
찬스를 놓친 이승만정부가 4.19 학생의거로 붕괴 후 박정희 군사정권(5.16)에
나라를 맡기게 됨으로 , 한편으로는 국가재건을 위해서는 잘한 정부였다고
일부 국민들은 말하지만, 우리 50년대 출생하고 유신군사정부를 겪은 세대는
말한다, 전혀 그러하지만은 않다고, 무시무시한 일본식 강권통치로 다스린,
그 중 하나가 해방 후 20년 만에 맺은 굴욕협상인 한일협정(1965.6.22.)이
그 것이다. 풀어서 ‘한일 기본조약 및 청구권 등에 관한 협정’으로 일본은
한일합방 후 갖은 협잡과 수단으로 수탈해서 주한 일인에게 나누어준 일본인
한국 내 자산반환을 요구하며 고작 8만 달라(무상 3억, 저이자 2억, 상업차관
3억불)로 협상을 맺어 지금까지도 두 나라간 문제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부연하는 이유는 60년대 중반 태동(1965.4. YMCA의 청년부에서 ‘싱어롱Y’
이라는 모임)하여 군사정부와 기성세대의 몰이해로 시련을 겪고, 밴드사운드,
즉, 드럼 베이스와 화려한 키보드와 스트링에 의해 몰락하기 전까지 신세대
음악문화로 급부상하여 새로운 대중의 가치관을 생성하고 반영했던 대중가요
특히 한국의 자본주의 산업화 과정에서 대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활을 하였던
통기타문화와 깊은 관계 때문이다.
사실, 60년대에 들어 와서도 이 땅에는 일본 ‘엥카’의 영향을 받아 태생한
트로트 이외는 새로운 대중음악은 모두가 미국을 통해서 들어온 것이
전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대 전부터 미국에는 포크뮤직이 선풍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무교동에 최초의 음악감상실(다방)이며 음악그룹인 쎄시봉(C’est
si bon)이 있었다.
대학생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팝음악을 들으며 음악적 갈증을 해소하던
곳이다. 쎄시봉 음악그룹이 맴버는 대학생 이장희, 윤형주, 김세환, 조영남,
등 그리고 고졸 송창식이 었다.
1966년부터는 매주 금요일에 라이브 공연인 ‘대학생의 밤’을 이끌었다.
물론, 작사작곡가인 한 대수(1948년생)와 김민기(1951년생)가 등장 전까지는
포크록 장르의 번안가요를 주로 소개했다.
당시. 대학가는 한일국교정상화반대 데모가 한창이라 모든 학교가 휴교상태에
있어서 학교에 못간 학생들은 젊음의 열기 분출구를 찾지 못해 당구장이나
대폿집 등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고 일부는 당시 붐을 이루던 음악감상실에
들여 박혀서 팝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과였다.
그 시절 대학축제나 특활모임, 과내모임에서 산수 좋은 곳을 찾아 둘러앉아
통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선하다.
시대는 변하고 조류에 따라 시대갈등이 늘 생겨왔지만 당시(60년대 후반~
70년대 말) 만큼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1960년대 말부터 미국의 청년문화 유입과 이에 영향을 받은 한국의 청년문화
바람이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 청바지, 장발(한대수), 포크송, 생맥주, 미니스커트
(윤복희)와 함께 대마초도 자연스럽게 공존하게 된다.
일본문화에 젖은 기성세대와 만년 철권통치와 이반된 통기타문화는 불온한
것으로 일반에게 인식시키고 대마초를 핑계로 정부의 일제단속이 시작된다.
사실, 새로운 장르의 음악으로 부상한 통기타음악은 기존 가수들과는 별개로 그들
스스로 키타 코드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즐겼던 시대에 앞선 음악이었다.
왜냐면 대중적이면서도 시대를 통탄한 통기타 선율에 묻어난 의지와 의식은
한 시대를 가르는 큰 변천을 야기하고 발현하게 한 청년문화였건만, 정부에
의한 퇴폐문화로 보는 단속은 많은 노래가 금지곡으로 검렬되어 음악활동이
위축되고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어려워지게 된다.
히피문화의 시초로 간주된 한 대수의 앨범은 판매처분 금지를 받게 되고,
당시 한일협정 반대 시위와 반전시위 등 각종 시위에 널리 불렸던 양희은이
불러 히트시킨 김민기의 ‘아침 이슬’ 등도 금지곡으로 지정을 받게 되었다.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자유분방한 청년문화는 이해부족으로 퇴폐 풍기문란으로
전락되어 치안 경계대상 1호로 지정 말도 되지 않는 탄압을 받게 된다.
그러면 쎄시봉싸롱에서 불린 트윈폴리오의 번안곡 ‘하얀 손수권’부터 들어 보자.
투윈폴리오(송창식과 윤형주)가 1969년에 발표한 곡으로 경쾌한 선율로
아름답고 맑은 화음이 특징이다.
1968년에 미국서 귀국하여 1969년 쎄시봉에서 데뷔하여 포크록 장르의 음악을
한국에 소개한 뉴욕서 히피문화를 현지 실시간으로 받아드린 한대수가 작사작곡
하여 1974년 1집 앨법 '멀고 먼 길'에 수록된 '행복의 나라로' 를 들어 보자
서울 미대 시절 "도비두(= 도깨비 두마리)"그룹을 결성하여 노래활동을 시작했던
김민기의 1970년 작사작곡 노래 '아침 이슬'이다.
1971년은 통기타 튜엣의 전성기를 맞이 한다.
화음과 분위기를 중시하는 톤기티음악에서 듀엣은 아주 효율적인 구성이었다.
키보이스의 노래 "해변으로 가요" 투에이스의 " 비들기 집" 들어 보자
이외에도 투코리안스(김도향, 손창철), 쉐그린(이대원,전언수), 어니언스.
4월과 5월이 있엇고, 혼성듀오로는 뚜와 에무아(박인희,이필원), 라나에스포
등이 있다.
신선함과 젊은이의 사랑, 감성, 일상이 녹아있는 '어니언스'의 '편지'(1975)
1970년대 초반 트로트와 신중현, 페티킴, 정윤희 등 가수들이 주류를 이끌고 있을
때 젊은이들의 통기타음악은 그저 그들만이 모여 즐기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1973년 '그건 너'의 성공은 통기타세대가 주류가 되며 가요계의 주도권을
갖는 시발점이 되었다.
쎄세봉 출신으로 일찍부터 라디오 인기DJ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이장희가 그
주인공, 그는 통기타의 단순하고 쉬운 반주 대신 전자기타를 사용하였고, 밴드연주를
통해 비트와 화려함을 추가 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통기타 음악이 가진 젊은 감성과 신선함을 잃지 않았는데 이점이
성공의 열쇠였다고 한다.
다음 해인 1974년 최인호 원작 이장호 감독의 영회 '별들의 고향'의 영화음악이 대거
히트하면서 이에 힘입어 통기타 가수들이 주류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이와 함께 '그건 너' 의 성공은 통기타 가수들의 진영도 재편성을 하게되는데 1972년 전성기를 구가하던
듀엣들이 거의 모두 해체되고 솔로로 데뷔하게 된다.
멜로디가 중시되는 통기타에 있어서 화음은 음악의 주요한 역활을 했었는데 밴드 사운드의 사용과 키보드
스트링 등의 장식은 화음보다 앞선 유행이 되어 이제 화음은 역활을 상실하게 되어서다.
계속해서 별들의 고향 ost 삽입곡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들어 보자
다음해인 1975년 UCLA에서 촉망받던 하길종 감독이 귀국하여 '바보들의 행진'을
만든다. 대학생 병태와 영자가 겪는 대학의 낭만과 현실과의 괴리, 거기에서 오는
허무감을 담고 있는 이 영화는 청년문화의 또 하나의 상징이 된다.
바보들의 행진의 OST 삽입곡 '왜 불러', '고래사냥, '날이 갈수록'이 또 히트를 친다.
음악감상실의 통기타 문화라는 작은 틀 속에서 머물던 젊은이의 문화는 이 두편의 영화를
통해 세상으로 분출됨으로서 기성세대로 하여금 새로은 세대의 문화를 인정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시대상황은 이상하게 돌아가서 역풍을 맞이 한다.
즉, 방공을 국시의 제1로 삼는 유신정부에게 베트남이 끝내 패전함으로 국가적인 위기감을
증폭시켰고, 더우기 1974년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던 장충동 국립국장에서 영부인 육영수여사
피살됨으로 통기타문화는 불온한 것으로 간주( 일종의 희생양)되어 포크음악을 선도하던
한대수, 김민기의 노래는 금지곡이 되고 쎄시봉 주 멤버들도 구속되거나 현장을 떠나게 된다.
유신 군정부의 '가요 정화 조치'라는 된 서리를 맞게 된다.
'바보들의 행진' OST십입곡을 들어 보자.
계속해서 통기타 2세대 이수만(1978)과 최백호(1977)의 노래를 들어 보자.
1970년도 중반을 지나면서 여러가지 사회적 요인으로 인해 포크의 열기는 급격히
시들고 1976년 조용필로 시작된 세련되고 흥겨운 트로트풍 고고 바람이 가요제를 휩쓴다.
'고고'음악이란 1960년대 중반 이후 크게 유행했던 모든 록계열의 댄스음을 총칭하는
말로 고고 리듬은 밝고 경쾌한 스타일로 재해석되어 그릅사운드 음악의 전형이 된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축제 때만 되면 으레 학내 가요제가 열렸다. 그런데 1977년 MBC
방송국이 주최한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산울림'이 만들고 서울농대팀 그룹사운드
'샌드페블즈가 불러 대상을 차지한 ' 나 어떡해'는 고고 리듬을 사용한 밴드 노래로 대학가요제
출신 '산을림' 그룹사운드가 부른 '아니 벌써' 와 함께 대학가에 신선한 충격으로 덮쳐들어
열풍을 일으켰고 그열기는 곹 바로 대학내 그룹사운드 붐으로 이어지개 된다.
센드페블즈의 '나 어떡해' 와 산울림의 '아니 벌싸를' 마지막으로 들러 보자.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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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2 한바다
참고서적 : 한국의 대중음악사 2003 이해숙 손우석 리즈엔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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