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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은 손창근孫昌根 선생으로부터 추사秋史 金正喜( 1786 ~
1856)의 걸작<불이선란도 不二禪蘭圖>를 기증받는다.
이 그림은 “불이선란도 不二禪蘭圖” 또는 “부작란도不作蘭圖”라고 부르는데
그림 윗부분과 왼쪽 부분에 쓴 김정희의 제시題詩 에 따른 것이다.
종이 바탕에 수묵으로 크기는 세로 54.9㎝, 가로 30.6㎝인데 추사 김정희가
펼친 예술의 세계와 도달한 정신적 경지를 가장 극적으로 잘 보여주는 작품
으로 서예 부분은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 중 하나이다.
사대부들은 글씨를 쓰다 남은 먹으로 문인화를 그리는 것을 餘技로 삼았다.
선비들은 그들의 정신적 이상세계를 심의적 사의적寫意的으로 그리는데 치중
하였다. 그래서 문인화는 자연 추상성에서도 서예와 일목상통하게 된다.
그들은 그림을 그리고 화제, 나아가 그림으로 표현하려 한 마음을 스스로
시와 글로 지어 개성 있는 서체로 화폭 위에 써넣었다.
문인화의 대표적 소재(梅蘭菊竹)인 사군자 중 난초는 제약이 없는 점, 선, 면,
형태 등으로 높은 선비의 기질을 갖춘 사람들의 표상이다.
그림에 적힌 제발題跋을 살펴보자
1. 좌측 상단 첫째 발문
不作蘭畵二十年 부작란화이십년 난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偶然寫出性中天 우연사출성중천 우연히 본성의 참모습이 드러났네
閉門覓覓尋尋處 폐문멱멱심심처 문 닫아걸고 찾으며 또 찾은 곳
此是維摩不二禪 차시유마불이선 이것이 유마의 불이선일세
불이선란은 서예를 그린 기법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그림과 서예가 둘이 아니라는
서화일치書畫一致 사상이다. 그리고 그림(畵)의 이치가 선禪과 통한다는 화선일치
畵禪一致의 경지에서 붓을 들었다.
난을 20년간 그리지 않다가 우연히 붓을 들어 묵란을 그렸는데 본성{性理義理의
성(天性)과 이理=형이상학적 만물의 본질}의 참 모습을 얻었다는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로 굳이 사람들이 말로 표현해달라면 비야리성毘耶離城의
유마거사가 침묵으로 불이不二법문(불립문자不立文字)으로 표현한 것처럼 하리라.
재가신도로서 보살행을 수행하던 유마힐이 병이나 거사의 병문안 때 일이다.
이때 유마힐(在家보살, 청정무구한 자)이 여러 보살들에게 말하였다.
“여러 어진 이들이여, 보살이 어떻게 불이법문에 드는지
저마다 생각하는 것을 말하시오.” 모임 중에
문수사리가 대답하기를
“내 생각 같아서는 일체 법에 말도 없고 말할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고 알 것도 없어서, 모든 문답을 여의는 것도 둘 아닌(不二)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문수文殊사리가 유마에게 물었다.
“어찌하면 보살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그러자 유마거사는 잠자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를 보고 문수보살이
“훌륭하시도다! 훌륭하시도다! 글과 말이 없는 경지에 이루셨도다.
이가 실로 불이법문에 드는 것이라.“
-유마경 대정장 14. <제9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
이것이 유마거사의 유명한 경계와 존재를 초월한 ‘불이법문’의 침묵이다.
경계를 중시하던 유교와 달리 불교의 미학은 경계를 허무는 미학이다.
유교가 이理와 기氣(형이하학적 에너지)의 논쟁을 통해 미학적 관점을
세웠다면 불교의 미학은 그 경계를 허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불이법문은 선禪 불교의 핵심 내용을 다루고 있다.
불이법문의 핵심 가치는 바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미학의 기본이 관점이
바뀌기에 어느 하나를 완벽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것을 좀 더 확장하면 범아합일梵我合一의 관점이 그 바탕에 있는 것이다.
즉 침묵은 모든 것을 경계 짓고 분류하는 논리에 따른 표현의 경계를
초월한 개념으로 경계의 바탕을 지운다는 선종의 논리(지극한 경지)에 따른다.
깨달음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不立文字의 예로 염화미소拈花微笑가 있다.
석가모니가 영산靈山에 있을 때 범왕(梵王)이 금색의 바라화波羅花를 바치면서
설법을 청하였다. 그 때 석가모니가 연꽃을 들어 대중拈花示衆에게 보이자
모든 사람이 무슨 뜻인지 몰라 망연하였는데, 마하가섭(大迦葉)만이 미소를 지었다.
이에 석가모니는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이 있으니, 이를
대가섭에게 부촉하노라.”라고 하였다. 이심전심 염화미소다.
그 뒤 이 내용은 중국의 여러 선서禪書에 인용되면서 선종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내용으로 채택되었다.
-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
우리나라 선종의 경우에도 “석가모니가 왜 꽃을 들었으며, 가섭은 왜 미소를 지었는가?”
하는 것이 화두다.
2. 우측 상단 둘째 발문
若有人强要爲口實 약유인강요위구실 만약 누군가 억지요구로 강요한다면
又當以毘耶無言謝之 우당이비야무언사지 당연히 (비야리성에 있던) 유마거사처럼
曼香 만향 말없는 대답으로 사양하겠다.
앞에서 살펴본 ‘유마경’에서 묻고 답하기를 초월하는 경계가 불이의 침묵이라고
한 문수보살의 말을 염두에 둔 것으로 그림을 청하여 묻는 것과 이를 거절하는
문답을 피한다는 뜻.( 又는 再와 달리 과거에 반복되어온 사실을 말함 )
3. 우측 하단 셋째 발문
始爲 達夋 放筆 시위 달준 방필 처음에 달준이를 위하여 放筆로 했다.
只可有一 불可有二 지가유일 불가유이 이런 그림은 한번이나 그릴 일이지
두번 그리려 해서 될 일이 아니다.
仙客老人 선객노인
불이선란은 김정희(1786~1856)가 두 번째 북청유배(철종2년1851.7.~1852.8 )을
마치고 돌아와 과천의 괴지초당에서 생활하다. 1856년 타계하기 전 4년간에 그린
末年 作이다.
이 글을 통하여 당시 김정희는 친구들에게 그의 깊은 마음속의 표현인 묵란 그림을
그려 주고, 그 친구들은 그림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특별한 지기知己 사이에 작화作畵 태도는 북송시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중국 사대부 화가들의 전형적인 이상세계를 상기시켜 준다고 한다.
이 화제는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를 말하고,
하늘의 본성을 사출해 낸 득得(그려냄)이 하나가 있을 뿐이지 둘은 불可가당치않다.
( 只 = 但也 다만 지, 그러나/다만 단 , 有 취하다 )
우연히 일필휘지한 순간에 자연스럽게 나온 자신의 작품이 서화일치의 이상을
넘어 화선일치의 경지를 불현 듯 일궈낸 그 결과의 성취에 스스로 놀라워 한다.
앞의 화제의 내용에 나오는 유마의 불이선과 관련지어 해석할 수도 있다.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본래 추사가 시동侍童이었던 달준達俊에게 주려고
북청유배에서 돌아온 어느 날 화법에 맞게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닌 서법으로 오직
마음을 비우고 무심한 경지에서 붓을 대고 그려낸 그림(작품)이었다.
그런데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될 때 고금도古今島에 동배同配될 정도로
추사의 복심腹心인 小山 오규일吳圭一이 어느 날 우연히 이 그림을 보고
몹시 마음에 들었던지 억지로 달라하고 요구하며 빼앗아 가버린다.
비슷한 예로 귀양지에서 돌아온 후 과천의 한 절에서 학문과 서예, 불교의 禪理에
몰두하며 지낼 때 어느 평민의 집에 초대받아, 보고 느낀 화목한 가정을 묘사한 글로
'대팽고회大烹高會' (1855 , 간송미술관 소장)란 예서체 협서가 있는데 , 신분도 알
수 없는 고농이란 사람에게 써준 글이라 한다.
그 후 이 그림은 애제자였던 소당 김석준을 거쳐서 장택상 그리고 문화재 수집가인
사업가 손세기씨 장남 손창근씨가 대를 이어 소장하다 2018년 중앙국립박물관에
기증하기에 이른다.
4. 우측 중간 난초 잎 사이 넷째 발문
以艸隸奇字之法 爲之 이초예기자지법 위지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세인나득지 나득호지야
漚竟 又題 구경 우제
草書,隷書의 奇字의 법(서법)으로 이 작품을 했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를 알까? 어찌 좋아 할 수 있겠나?
漚竟이 또 題한다.
김정희 자신이 그의 화란법畵蘭法에서 늘 주장해 온 것처럼
예서와 초서로 난을 그렸다고 밝힌 것이다.
서예의 글씨를 쓰듯 난초를 쳤고 난잎을 초서와 예서를 쓸 때 터득한
필획의 방법으로 묘사함을 밝히고 있어, 난초라는 대상을 묘사했다기 보다는
그림을 그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서예書藝는 자신의 정신적 이념미를 형상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초서, 예서 그리고 흔히 쓰이지 이상한 글자를 쓰는 법으로 난을 그렸으니
보통 사람들이 그 뜻을 어찌 알고 좋아하며 즐길 수 있겠는가를 묻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하는 듯하다.
以艸예奇字之法 爲之 이 연을 들여다 보자
중국의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유난히 깊었던 추사는 수많은 청나라의 예술가 중에서
판교 정섭鄭燮(1693~1765)을 몹시 좋아했다고 한다. 청나라 중엽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양주로 화가들이 몰렸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양주팔괴’(건륭년간에 장쑤성
양저우에서 활동한 화가 8명) 중 一人으로 모두가 범상치 않아 ‘괴’怪라 불리웠는데
그 가운데 정섭은 유난히 고집스러운 지성인이었다고 한다.
추사는 정섭이 사상과 예술을 알게(코드가 맞음)되면서 그의 문집을 모두 구해 받을
정도로 정섭에게 매료되었고 특히 정섭의 난 그림을 좋아했었다 다고 한다.
정섭은 관직에 있는 동안의 선행이 부패한 고관들과 부호들의 미음을 사는 빌미가 되어
결국은 12년간의 관직을 벗고 귀향하게 된다. 그는 글씨뿐만 아니라 문인화로도 유명하다.
서예는 항시 전통과 법을 중요시한다. 정섭은 이런 전통성과 법을 지키면서도 전통의 틀을
과감히 벗어나 자신만의 새로운 예술세계를 펼친 대표적인 서예가다.
추사 김정희의 독특한 글씨와 문인화가 나오게 된 배경이 판교 정섭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중국인들은 원래 자신들의 깊은 속내와 생각을 남에게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또한 전통적으로 유가의 중용을 중시해 이런 기준에서 벋어난 것은 광狂 또는 기奇한 것으로
여기고 이단시하고 배척하였다. 그리고 글씨의 경우 단아한 왕희지 글씨를 으뜸으로 삼고
따라 배웠다
판교 또한 초기에는 왕희지, 소동파 등의 전통 서법을 배우고 연구했으나 나중에는 서예에
담긴 예술의 핵심이 되는 정신만 취하고 형태와 필법에서 자신의 개성과 창의를 발휘했다.
스스로 만들어 쓰기 시작한 새로운 스타일의 서체를 육분반서六分半書라 불렀다.
다시 말해 전통의 서체들을 혼합하여 격조 높고 특이한 글씨를 만들어 쓴 것이다.
즉 오체(기존의 전, 예, 행, 해, 초서체)의 필법과 사군자의 화법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마치 난초를 그리듯 글자를 썼고, 글자를 쓰듯이 난초를 그렸다고 한다.
5. 좌측 글씨와 蘭의 꽃대 사이에 작은 발문
小山見而豪奪可笑 소산견이호탈 가소
소산小山 吳圭一이 보고 억지로 빼았으니 우습다.
‘불이선란도’의 첫 소장자는, 세 번째 발제에 적힌 대로 달준이었다.
여기에 제삼자가 개입한다. 이 그림이 걸작임을 알아본 소산 오규일이었다.
소산은 추사에게 이 그림을 자신에게 달라고 간청한다. 추사는 난처해졌다.
결국 그림을 빼앗아 갖게 된 소산은 추사에게 그림에 별개의 제발을 부탁한다.
추사는 마지못해 세 번째 제발題跋 옆에 작은 글씨로 이렇게 썼다.
小山見而豪奪可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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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정 김주용님의 난초치기 기본 해설>
‘불이선란도’ 묵란 감상
우선 서화평론가 도헌 도병훈씨의 감상인 그림의 구성과 특성을 따라가 보자
불이선란의 난잎은 전체 10엽이지만 단연 1엽(기수선)의 비중이 크다.
기수선의 형세는 잎 폭에서 큰 변화 없이 왼쪽 위를 향해 그려지다 크게 꺾이는
전절轉折에서 화면 오른쪽 위를 향해 대각선으로 뻗은 기세를 보여준다.
그래서 필세, 즉 붓의 흐름과 생동하는 맛, 힘의 패턴, 역동적 긴장감이 특히
두드러진다. 반면 봉안선은 둥근 곡선형에다 기교적인 선을 구사하여 굵고 가는
비수肥瘦의 변화가 크며 농담의 변화도 나타난다.
이 때문에 1엽(기수선)의 단순한 기세가 돋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1엽의 존재감은 희미하게 마른 붓질을 한 5옆, 6엽과 대비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뿐만 아니라 ‘ㄷ자 형으로 그린 파봉안선인 3, 7엽도 기수선을 살려준다.
또한 난 잎이나 꽃대의 전절이 보여주는 경사성은 방향성 긴장감을 자아내며,
이로 인해 잎 사이의 간격 뿐 만 아니라 화면이 생동감 있는 공간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난의 아래 어두 부분은 매우 빽빽한 반면, 윗부분은 상대적으로 잎 사이의
간격을 넓게 그려 공간으로 확산되는 듯한 데, 이는 4엽과 7엽, 그리고 8엽의
상단 끝 부분을 매우 희미한 갈필( 마른 듯한 상태의 붓)로 그려 더욱 그러하다.
이 그림은 얼핏 보면 단조로운 듯하지만 이른바 ‘삼전지묘三轉之妙’를 살려
난 잎을 쳐야한다는 자신의 ‘난화론’을 입증하듯, 잎새의 변화가 무궁하다.
꽃대는 맨 좌측에서 꺾여 뻗어 올라가는 형세인데 상단 부분은 비백(바람에
나부끼듯 생동하는 필세)까지 보일 정도로 속도감 있는 필치를 구사하다 다시
한 번 90도 가까이 꺾어 꽃을 그린 후 화심(꽃술)만 농묵濃墨으로 찍었다.
4개의 꽃잎(3개의 주변과 혀)도 아랫부분은 그 간격을 좁게, 윗부분은 넓게 하고,
2개의 화심도 위는 크게 아래는 작게 찍어 막 피어나는 듯한 참신함을 느끼게 한다.
'추사를 넘어서'(책)를 집필하신 김종헌님의 감상평을 들어보자
추사의 '불이선란도'에서 보이는 난초의 잎은 거의 오른쪽 한 방향으로 쏠려
있다. 그는 이런 쏠림을 절묘한 위치에 절묘한 방향으로 꽃대를 놓음으로써
균형을 잡고 있다.
왼쪽 여백에 불쑥 꿈틀대며 힘차게 솟아 있는 꽃대에 활짝 꽃을 피운 것이다.
강인한 꽃대와 꽃을 반대의 방향으로 돌아 앉힘으로써 바른 쪽으로만 쏠린
잎들과 균형을 맞춘 것이다.
그리고도 남는 부분에는 특이하게 세번째와 네번째의 발문을 더 써 넣음으로써
좌우의 안정을 꾀하고 대비시키는 장법을 썼다.
난초 그림은 잎과 잎이 적당한 곳에서 서로 만나고 어우러져 두 잎이 만나는 곳
아래에 봉의 눈과 같이 생긴 이 기다란 형태의 공간(봉안)을 또 다른 잎(파봉안)이
쳐지면서 다시 공간을 적당히 나눈다.
난초 그림은 이 때 그려지는 잎들 사이의 소밀疎密, 성금과 밀접함에 따라
또 다시 기묘한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린 잎들은 바람이 몹시 날리어 바른쪽으로만 쏠리는 바람에 파봉안을
여러 차례에 걸치어 만들고 있어 기운 잎들과 그 잎들이 사이사이에 만들어 내는
공간이 기묘한 모양을 띠게 되었다. 이런 기상천외의 기법의 난초 그림은 추사가
자연 속에 핀 난초를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담고 있던
난초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난초의 잎과 꽃잎과 꽃대는 모두 은근한 흐린 담묵淡墨으로 그렸다.
단지 화심花心만 진한 농묵濃墨으로 굵게 처리하여 담묵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강인한 악센트를 주고 있다.
추사 자신을 윤기가 흐르는 매끈한 난초가 아니라 들의 잡풀과 같이 거친,
그러나 질긴 생명력을 지닌 난초로 표현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 거친 난초도 품위 하나만은 잃고 있지 않으며, 또한 꽃을 피우는
일도 잊지 않았다. 또한 고상하고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
사실 전통적인 그린 묵란에서는 난잎의 행필이 굽고 상하로 휘는 변화가 반복되는
전절과 난잎의 폭이 풍성하고 수척해지는 반복되는 비수肥瘦의 리듬감을 중시한다.
그런데 ‘불이선란도’의 난잎은 바싹마른 붓질로 강풍에 밀린 듯 강팍하게 꺽이거나
마구 흔들리는 잎세의 끝 부분(서미)들은 힘없이 그려져 시들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다만 꽃대는 부러진 듯 한두 번 구부러진 획의 강인성이 두드러져 보이고 농익은
한 송이 꽃으로 부터는 막 피어나 강한 향기를 내뿜는 것 같다.
자신의 굴곡진 삶의 표현인지 추사의 평생 갈고 닦은 예술세계가 농축된 그림으로
‘난을 치는데 반드시 붓을 세 번 굴린다’는 ‘삼전법三轉法’에 충실하며 꺾일 대로
꺾인 난은 왼쪽으로 뻗은 꽃대와 함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이 문인화는 감상을 기록한 제발題跋과 무수한 낙관이 난을 감싸고 있는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다.
감상을 기록한 난을 감싸고 있는 제발(題跋)과 낙관으로 흔히 말하는
‘여백의 미’는 찾아볼 수 없다 것이 아쉽다.
서예와 문화에서 중요시하는 미적 요소들 가운데 여백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여백이라는 것은 단지 "비어있는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붓으로 쓰고 그려내는 공간만이 서예가의 힘과 기운이 흐르는 공간이 아니라
먹물이 묻지 않은 흰 공간에도 보이지 않는 힘과 기운이 존재하여 연결이 된
것이다. 공간이 없게 되면 화면의 전체를 통해 흐르는 기맥이 막히기 때문이다.
대신 스스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난처럼, 제발과 낙관이 적절한 배치로 구성돼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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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21대 영조임금의 사위(딸 화순옹주) 김한신의 증손자인 김정희가
보인 어린시절 천재성은 8세에 남인 영수인 번안 채제공에 눈에 띄고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초정 박제가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24세에 생부 동지부사 김노경을 따라 순조9년(1809년) 연경에 가게된다.
연경 6개월간 머무는 동안 당대 최고의 석학 담계 옹방강과 운대 완원 등과
교우 사제지간의 연을 맺으며 청조의 고증학과 글로벌한 신문학에 눈을 뜬다.
스승 완원에게 아호 완당阮堂을 얻고 또 평생의 동반자 된 차茶 중 명차
용단승설龍團勝雪 (훗날 아호 승설도인 )달여줌도 받는다.
귀국 후에도 연경 문인들과 계속 학예교류를 하여 엄청난 양의 책과 탁본
서화가 오갔고, 신분 덕에 최고급 청나라 제품(문방사우)도 사용하게 된다.
조선의 르네상스기(영 정조대)가 끝나는 조선말기도 겉으로는 국태민안의
모습인 사대부, 관리들이 정복차림으로 근무시간 중에 요산요수를 찾아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古畵에 많이 접할 수 있지만 ,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사법행정의 틀(양반)을 만든 삼봉 정도전의 소명과 달리,
속으로 정치의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세력과 기존의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인척세력 간 암투는 조선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覈實在書 핵실재서 책에 쓰여 있는 것의 실상을 조사하여
窮理在心 궁리재심 마음속 답답함에 이치를 세우고자 하나
攷古證今 고고증금 옛것을 상고하여 오늘의 증거로 삼고자 하여도
山海崇心 산해숭심 산같이 높은 위업을 바다같이 깊은 물이 막아서네
추사가 스승인 옹방강이 보내온 편지 ‘담계적독 覃溪赤牘’ 전면에
쓴 자신의 찬문이다.
이 찬문에서 금석학자이며 개혁가이기도한 추사가 고증학에 몰두한
이유가 드러나는 대목이라 한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는
옛 경서의 뜻을 헤아려 마음속 답답함을 풀어내고 오늘의 문제(작금 사대부
들이 운용하는 조선 정치이념인 성리학의 폐해와 허구성)을 바로잡기 위한
증거로 쓰기 위함이란다. 기존 세력에 대한 도전장과 별 다름이 없다.
태생에서 보듯 추사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조선 명문가 중에서도
최고 명문가 출신으로. 부귀는 물론이요, 유력자들과의 인맥에서도
결코 아쉬워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평생 굽힘없이 개혁을 추구했던 뼛속까지 개화된 사대부
였다. 그러나 그가 좋아했던 정섭의 좌우명 처럼 ' 난독호도難得糊塗'란
삶의 지혜 실천에는 생태적 어려움을 넘지못한다.
추사의 생에 엄동한설이 닥쳐온다, 1856년 타계하기까지 인생 후반기에.
첫 번째, 제주유배(8년3개월) 55세 현종6년 1840.10~ 1848.12
“네 죄를 알렸다. 추사는 영문도 모르고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
이미 죽은 김노경의 추조다. 아비가 죗값을 치르지 못하면 아들이 대신
감당해야지!" 효명세자(순조30년 1830년) 윤상도의 옥사 관여 죄목으로
사실, 친구 우의정 조인영의 “살려주시오”상소가 없었다면 죽은 목숨이었다.
두 번째, 북청유배(1년2개월) 철종2년 1851.7~ 1852.8
안동김씨 가문 헌종의 외척 풍양조씨 강화도령 원범(철종)에 대한
예송에 휘말려 권돈인의 배후로 안동김씨 세력에 지목을 받아.
사실 김정희는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지만,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불교학자이기도 하였다. 평생 친구 다성茶聖 草衣선사(1786∼1866)를 비롯해
해붕海鵬, 우담優曇 등 당대 고승들과도 깊은 교류를 맺었다 한다.
말년의 김정희는 유마거사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높이 평가하여 귀의하며
계를 지키고 있었기에 초의에게 글을 보내면서 스스로를 유마거사와 같은
재가 불제자라고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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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서적
추사를 넘어 김종헌 2007. 도서출판푸른역사
주역 오행연구 윤태현 2002 식물추장
그림문학에 취하다. 고영희 2011 영신사
2023. 10.14. 한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