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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성배경
1405년(태종5년)에 경복궁의 이궁으로 세웠는데 북악산 응봉의 산자락에 자리 잡은
창덕궁은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 불렀습니다.
창덕궁 동편에 위치한 창경궁은 원래 수강궁 자리로 성종 14년에 창경궁으로 영건.
창덕궁 후원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창경궁의 후원이기도 하며,
1623년 인조 때 개수 중축되어 현재의 모습 이른다고 한다.
후원은 창덕궁 뒤의 4개 골짜기에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옥류천 정원으로 펼쳐진다.
조성 목적은 복합기능으로 시와 학문을 논하고 사색에 잠기는 곳, 연회지 및 활쏘기 등
왕이 참관한 군사훈련지, 왕과 왕비가 몸소 백성의 생업인 농사도 짓고 누에를 쳐 보며
국시인 ‘농자천하지대본’을 실천하고 농사 결과로 민심의 향방도 점쳐보던 곳.
2. 경과
1404년(태종4년) 창덕궁 공사~ 1405년 완공(외전 74칸, 내전118칸)
1406년(태종6년) 후원 동쪽에 해온정을 짓고 그 앞에 못을 팠으며 후원 북쪽 인소전 건립
1450년(세조5년) 창덕궁으로 이어함과 동시 후원에 새로운 못을 파고 열무정 건립
1462년(세조8년) 동쪽 민가 74가구를 철거, 북쪽 민가 58가구 철거 후원 확장
동쪽 담을 100척 뒤로 물러 담쌓기(이 때 후원 둘레가 4,000척이 됨)
1497년(연산군) 1503년 서쪽 담 밑 민가 모두 헐고, 1504년 후원 인접 성균관 옮김.
1592년 임진난 후 후원 20년간 폐허
1636년(인조14년) 옥류천 주변에 소요정, 창의정, 태극정 건설
1907년 순종이 이어와 함께 다시 황궁의 후원으로 제국과 운명을 함께 했다.
1997년 유네스코 창덕궁 세계문화유산 등재
3. 창덕궁 후원
면적 10만 3000여 평, 사적 제122호로 지정된 창덕궁 안에 있는 조선시대 정원
조선왕조 전 시기를 통해 다른 궁궐보다 특히 왕실의 사랑을 받은 것은 넓고 아름다운
후원 때문이다. 창덕궁 후원과 그 동쪽에 있는 창경궁 후원은 본래 담장 앖이 서로 통해
따로 구별하지 않았다.
창덕궁 후원은 북쪽의 북한산과 응봉에서 뻗어내린 자연스런 구릉지대로 넓이 약 9만영평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 중에서 가장 넓고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이곳은 임금의 휴식 공간으로 일찍부터 사랑받았고, 초기부터 백여 개 이상의 누각과
정자들의 휴식처로사 계속 세워졌다.
창덕 후원의 정자들은 규모가 매우 적은데 이는 자연의 경관을 위압하지 않으면서 자연
속에 포근하게 안기려는 소박한 마음이 담긴 것이다.
그리고 이 후원은 단순한 휴식 공간만은 아니었고, 이 곳에서 임금과 완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학문을 연마했다.
문신과 무신의 과거시험이 치러졌고, 임금이 직접 농사를 체험하고 완비가 양잠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이용되었디.
그리고 역대 임금들은 이곳의 아름다움을 시나 산문으로 남겨 궁준문화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3-1. 부용지와 주합루
* 부용지
산자락의 동쪽을 향해 ㄷ자 모양 연못 조성
둘레가 네모꼴로 전형적인네모꼴 방지 형태로 조성하고 연못 가운데 둥근 원형의 섬을
만듬, 그 곳에 장대석을 쌓고 둥근섬을 만들고 소나무를 심음.
천원지방 사상 –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연못 동쪽에 두 개의 석물이 있어 연못의 물이 빠져나갈 때 생기는 소음을 줄임
* 부용정
창덕궁 후원에 있는 정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짐
아(亞)자 모양을 기본으로 기둥 2개를 물 속에 잠긴 모습을 하는 정자로
숙종 때 지은 택수재라는 정자가 이 곳에 있었는데 정조가 다시 짓고 부용정이라
했다고 함.
연꽃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평면 구성을 열 십(十)모양을 하고 있다.
연꽃이 활짝 펼쳐진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 부용정이다.
지붕도 동서남북으로 터진 구성이며 겹처마로 화려한 예술미를 보여준다.
* 주합루
정조는 1776년(즉위 원년) 개혁정치의 산실인 규장각을 창덕궁 후원에 설치하게 함.
규장각은 처음 왕실 도서관으로 출발했으나 정조는 이후 규장각을 학술과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변화시켜 많은 도서를 수짐하여 학문연구의 중심기관으로 삼음.
후원의 규장각은 2층으로 지어 1층은 규장각, 2층을 주합루라 불렀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츨 건물 기둥은 모두 상하층 통주로 사용
내부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 됨, 처마는 부연을 둔 겹처마, 팔작 지붕이다.
마루는 용마루와 내림마루 양성바름으로 마감, 용마루 끝에는 취두, 내람마루에는
용두를,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얹어 권위를 자랑하는 건물임.
고종 5년(1868)에 규장각을 지금의 인정전 사쪽 궐내각사 영역으로 옮김.
특이점은 경사진 높은 지형에 배치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한 점이 돋보임.
* 영화당
부용정 동쪽에 위치하는 전각으로 현판글씨는 영조의 어필이다.
광해군 때 처음 지었으나 숙종18년 재건함. 3단의 높다란 석축 기단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이익공* 팔작지붕 건물
왕이 신하들과 군사훈련을 참관하거나 활쏘기를 하고 연회를 베플던 곳으로 정조 때
부터는 과거시험장으로 쓰이면서 왕이 참석한 가운데 시관이 시제를 내리고, 춘당대에서
초시에 함격한 응시자들이 영화당에서 마지막 시험을 치름.
춘향전에는 이몽룡이 장원 급제할 때 시제가 영화당과 관련이 있는 “춘당춘색고금동”
(춘당대의 봄빛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이었다는 문학적 사연을 품고 있다.
원래는 앞쪽에 춘당대라는 넓은 마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창경궁 담으로 막히고, 춘당지
라는 연못으로 바뀜.
* 이익공(기둥에 덧붙이는 쇠): 외부로 뻗어나간 초익공과 이익공은 쇠서형으로 조각하였으며,
내부로 뻗어나간 초익공은 연꽃 봉우리를 조각하였고, 이익공은 보아지로 대들보를 받고 있다.
3-2. 연경당(보물 제1770호 궁궐 내 조선 후기 상류 주택)
궁궐의 후원 안에 지어졌으면서도 사랑채, 안채·안행랑채, 바깥행랑채·반빗간(찬간)·서재,
후원 ·정자 및 연못을 완벽하게 갖춘 주택건축이다.
이른바 99칸 집이라 불리고 있으나 현재 건물의 실제규모는 109칸 반이다.
연경당은 사랑채의 당호(堂號)이자 집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연경당은 후원의 첫째 구역인 주합루(宙合樓)·영화당(暎花堂) 일곽을 지나 애련정과
애련지 및 의두합(같은 건물의 동쪽 누는 영춘루, 남쪽 마루는 기오헌이다)·운경거 등이
조성되어 있는 곳 안쪽 아늑한 골짜기에 있다.
건축의 향은 정남향으로 하고, 북·동·서 삼면이 산으로 둘러막힌 곳에 북서쪽에서
흘러나온 물이 남쪽, 즉 집 앞을 거쳐 동쪽으로 빠져나가도록 물길을 내어 풍수적으로
명당을 형성한 다음, 방위에 맞추어 직각으로 건물군을 배치하였다
지금까지 연구에서는 창덕궁 연경당은 1828년(순조 28)에 창건되었으며, 사대부의 생활을
알기위하여 세자(1830년에 죽은 뒤 익종으로 높임)가 왕께 요청한 것이 건립동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국여지비고』·『궁궐지』·『순조실록』·「동궐도」 등을 종합하여 해석하여 보면,
연경당은 1827년에 진장각 옛터에 창건되었으며, 짓게 된 동기는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경축의식을 맞아서 이를 거행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함이며, ‘연경(演慶)’이라는 이름도
경사스러운 행사를 연행(演行)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연경당은 속칭 궁궐 안의 99칸 집으로 유명하지만 순종 대에 간행한 『궁궐지』에 따르면
실제로는 연경당(사랑채) 14칸, 내당( 안채) 10칸 반, 선향재 14칸, 농수정 1칸,
북행각14칸 반, 서행각 20칸, 남행각 21칸, 외행각 25칸으로 모두 120칸이었다.
3-3. 애련지와 이두합(1827년) 일대
* 이두합
이두합(기오헌)은 창덕궁 애련지의 전각으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기와지붕 건물이며
대청 2칸에 우측에는 온돌방이, 좌측에는 내루(안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의두합은 단청을 하지않아 단출하고 소박하며 또한 효명세자(18세 요절)의 독서와 사색을
위해지은 궁궐 내 유일한 북향 건물이다.
* 애런지 애련정
‘연꽃이 피는 연못’이란 뜻인 애련지는 의두합으로 들어기는 불로문 오른쪽에 위치해 있고
애련지 북쪽에 있는 정자가 애련정(숙종대 건립)이다.
3-4. 애런지 북쪽 후원 (존덕정 일대)
존덕정, 펌우사, 청심정, 괴석단, 관람정, 승재정
영화당 앞 마당에서 북쪽을 향해 나아가면 왼편으로 애련정이 있고, 여기서 다시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면
깊은 수림 속에 연못과 다양한 모습의 정자들이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진 후원을 만나게 된다.
존덕정는 육우정이라고도 하는데, 처움에는 육면정으로도 불렸다. 지붕처마가 2층이면서 육각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선조 때 지어졌으나 외란으로 없어진 것을 인조22년 다시 세웠다.
정자 북쪽에는 반월형 연못과 네모난 연못이 나라히 있는데 이는 천원지방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존덕정에서 남쪽길을 따라 내려오면 표주박 혹은 한반도 모습을 떠올리는 연못이 나오고, 연못 동편에
관람정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연못 서편 언덕에는 네모난 송재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관람지는 후원의 연못 중에서 세번째 골짜기의 물을 모아 만든 연못이다. 관람지란
"뱃놀이하며 구경하는 연못"이라는 의미로 한가함이 아니라 여흥을 즐기려는 뜻이다.
* 펌우사
존덕정 서편에 위치한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본래는 초익공계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부속 건물이 남향으로 붙어있는 ㄱ자 형태였으나 1908년 그려진 동궐도형에서는
ㅡ자형으로 그러져 있어 도중에 변형이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이 일대의 건물 중에서는 온돌방까지 갖춰있어 겨울에도 사용이 가능한 곳이었다.
액호인 폄우는 '어리석은 자에게 돌침을 놓는다'는 뜻으로, 임금이 자신을 되돌아 보고
어리석움을 깨우쳐 덕을 높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존덕정과 존덕지
관람지에 속해 있는 정자로 동시대의 정자들과 달리 이중지붕 구조의 육각지붕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어서 육우정(六隅亭) 또는 육면정(六面亭)이라고도 불렸다.
정자의 마루도 안쪽과 바깥쪽으로 구분되어 2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4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천정은 우물정자로 구성되고 보개 천정과 같이 화려한 장식으로 구성되었으며 가운데에는
황룡과 청룡이 장식되어 있다.
1644년(인조 22)에 세워졌다. 정자 내에는 정조가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쓴 글귀가
남아있으며 이에는 모든 하천에 달이 뜨지만 하늘에 떠있는 달은 하나고 그 달이 나니까
왕권은 지엄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 승재정
관람지 옆에 위치한 정자로 정, 측면 1칸으로 익공계 사모 지붕을 하고 있다.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20년대 그려진 동궐도에 지금의 자리에 초정이란 전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아 그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 관람정
관람지에 속해 있는 정자로 한반도 모양의 연못인 관람지에 놓여져 있으며 부채꼴 선형
기와지붕을 한 굴도리집을 하고 있다. 건립 연대는 미상이지만 1820년대에 그린 동궐도에
관람정에 모습이 없고 1908년에 제작된 동궐도형에 그 모습이 그려져 있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부수적인 요소로 현판의 모양이 풀잎마냥 상당히 독특하다
3-5. 옥류천 일대 ( 소요정, 정의정, 테극정, 농산정, 취한정, 취규정 )
옥류천은 창덕궁 후원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임금의 개인 공간으로 사용되어
비원(매우 은말한 정원)으로 불리기도 하는 여러 정자가 자리잡은 공간이다.
존덕정 북쪽에 해당된다.
우선 옥류천은 인공으로 만든 곳이 아니라 자연의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약간의 인공을
가미하여 조성한 정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정원의 특색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기도하다.
옥류천에 최초의 인공을 가미한 임금은 인조다.
인조는 옥류천의 널다란 큰 바위에 어필로 '옥류천'이라 한자로 새겨넣었다.
그리고 인조14년 가을,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한 달 전쯤, 옥류천의 바닥돌을 조금씩 깍아 계곡의
물이 흘러 들어오게 만들고, 물이 암반을 둥글게 휘돌아 흘러서 소요정 앞에서 폭포가 되어
떨어지게 했다.
* 취규정
옥류천 산마루 언덕 위에 위치한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사방이 트인 초익공
홑처마 팔작지붕 형태다.
1640년(인조 18)에 세워졌으며 학자들이 모인다는 뜻을 가진 취규정이란 액호로 보아
휴식과 독서를 위한 정자로 보인다.
* 취한정
옥류천 어귀에 자리잡은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팔작지붕을 올리고
납도리로 엮은 민도리집 형태를 하고 있다.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취한정에 대한 숙종과 정조의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1720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임금이 옥류천의 어정(御井)에서 약수를 마시고 돌아갈 때 잠시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정자다
* 소요정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에 위치한 정자로 정, 측면 1칸의 익공계 사모지붕 형식을
하고 있다.
1636년(인조 14)에 탄서정(歎逝亭)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가 후에 오늘날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숙종, 정조, 순조 등의 임금들이 이곳에서 보이는 경치에 대한 시를 남겼고
청의정, 태극정과 함께 삼림삼정(三林三亭)이라 불렸다.
* 청의정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에 위치한 정자이며 정, 측면 1칸으로 궁궐에서 유일하게
팔각의 초가 지붕을 하고 있다. 익공계 사모 형식을 하고 있으며 1636년(인조 14)에
세워졌다.
정자 앞으로 논을 만들어 벼를 심고, 수확 후에는 볏짚으로 정자의 지붕 이엉을 잇게
하였는데 이는 농사의 소중함을 백성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문화재청과 농촌진흥청에서 가을마다 벼베기 행사를 진행해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 태극정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에 의치한 정자로 굴다리를 엮은 정,
측면 1칸의 겹처마 사각 지붕 형식을 하고 있으며 내부에 마루를 깔고 퇴를 달아
평난간을 둘렀다.
천정은 우물천정이고, 지붕 꼭대기는 절병통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운영정(雲影亭)이란 명칭으로 세워졌으나 후에 오늘날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소요정, 청의정과 함께 삼림삼정이라고 불렸다.
* 소요암.
소요암은 1636년 거대한 바위 일부를 깍아 내고 그 위에 곡선형으로 수로를 만들어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주연을 베푼 장소로 곡선형 수로 끝에 작은 폭포를
만들어 운치를 더한다.
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물이 바깥으로 패어진 곡선형 수로를 따라 흐르게 한 뒤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은 353년 동진의 명필 왕희지를 비롯한 당대 명사 41인이 난정(절강성 소음현
에 위치) 밑 물길을 만든 후 술잔을 띄워 자기 앞에 술잔이 도착하면 술잔을 들고 시를 지어
발표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곳 어정(御井)을 비롯한 그 주위의 소요암이나, 옥류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소요정
등은 왕과 비빈들이 물놀이를 즐기던 곳이다.
또한 옥류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에는 숙종이 지은 시가 새겨져 있어 당시 이곳에서
많은 여가를 보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숙종이 이곳에 새겨 넣은 시는 다음과 같다.
이루며 떨어지는 물길이 3백자요
저 높은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구나.
이를 보노라니 흰 무지개가 일어나고
온 골짜기에는 천둥번개가 치네.
위의 시를 감상하면 옥류천의 맑은 물이 마치 폭포수가 된 것 같이 힘차게 떨어져 내려
물방울을 주위에 튀기고 있는 상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 20201.3.11. 코비드19 대응 백신(아스트라제네카)접종 후 일요일
피접종 심신(아팠던 부위 재발)을 위해 후원에 피톤치드를 마시려 방문한 본인
2021. 6. 15. 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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