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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昌德宮)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창덕궁’을 세운다.
북악산 응봉의 산자락에 자리잡은 창덕궁은 경복궁의 동쪽애 위하여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 불립니다. 경복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종아 궁궐을 또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태종은 경복궁의 형세가 좋지않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실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 같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과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그 피의 현장인 경복궁에서 기거하는 것이 꺼려졌을 것입니다.
조선의 왕들은 경복궁 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선호했습니다. 경복궁이
정도전 등 신하들이 설계하여 왕이 일하기에 편리하게 하였지만, 창덕궁은 왕의 의도에
따라 설계하여 쉴 수 있는 후원을 아주 넓게 만들었습니다.
조선에서 왕권이 가장 강했던 세조는 후원을 2배도 넘게 확장했습니다.
창덕궁이 세워짐으로써 조선의 정궁(법궁)과 이궁의 양궐 체제가 됩니다. 정궁은 왕이
주로 거쳐하면서 나랏일을 보는 궁궐이고 이궁은 정궁에 불 또는 변고가 일어났을 때,
혹은 왕의 의지에 따라 옮기고 싶을 때 사용하던 궁궐입니다.
그 후 임진왜란이 한양의 궁궐이 모두 불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정궁인 경복궁을 먼저 재건되는 것이 맞지만,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되지 않았고,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에 다시 지어서 정궁이 됩니다.
이렇게 복원된 창덕궁은 인조반정(1623년)때 대부분 전각이 불타버리고 20년이 지난 뒤
또 복원됩니다. 이렇게 창덕궁은 여러 차례 화재와 재건을 반복하면서 270년간 정궁이
역할을 하게 되고 조선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임금들이 거처하는 궁월이 됩니다.
그리고 경복궁이 270년 만에 고종이 초년(1867년)에 중건되자 창덕궁의 지위가 변동되고
경복궁이 다시 정궁이 되고 창덕궁은 이궁으로 쓰이게 됩니다.
마지막 황제인 순종 때는 1910년 8월에 창덕궁에서 마지막 어전회의를 여셨고, 1926년 승하
하시면서 왕과 함께 창덕궁의 역사는 마감을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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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년 태종5년 경복궁의 이궁으로 음력 10월19일 건립
1592년 임진외란으로 전소 , 1608년 광해군 즉위 원년에 대대적 중건
1623년 인조반정 3월12일 인정전 제외 전소
1803년 순조 인정전 화재 1833년 내전 화재
1873년 고종의 진정은 창덕궁에서 시작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도 창덕궁에서
1907년 고종폐위, 손종은 창덕궁으로 이어
1909년 창덕궁은 일본 통감부 간부들의 연회장으로 씀
동물,식물원 들어섬, 창경원으로 격화됨
1917년 내전 화재 희정당, 대조전 재건
1926년 순종 서거 , 궁궝 기능 상실
1963년 사적 제122호 지정, 영천왕 이은과 영친왕비 환국 낙선재 기거
1989년 덕혜공주, 이방자(영친왕비)여사 별세
1991년 대대적으로 복원에 들어감
# 창덕궁 외전(外殿)
*돈화문(敦化門 보물 383호)
창덕궁의 정문으로 태종12년(1412)에 처움 지어졌는데 이도 임진왜란 때 불타, 지금
의 돈화문은 1609(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돈화는 중용의 대덕돈화에서 가져운 것으로‘ 큰 덕을 베풀어
백성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답게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다른 궁궐문은 3칸인데 비해 돈화문은 5칸짜리 문이며 멀리서 우러러보도록 이층으로
, 정면 5칸 측면 2칸. 크고 높게 지었습니다.
정문 3개중 가운데는 왕만, 좌우 두 문은 당상관 이상만 통행이 가능했다.
이층 문루에 종과 쇠북이 있어 입직한 병조 당상관 책임 하에 시각을 알려주었다
궁성문의 개페는 하루에 파루(오전4시)에 33번, 인정(오후10시)에 28번 치거나 두드려
시행하였는데 이는 새벽에는 재석 33천에 저녁에는 28수에게 고하는 행사이다.
-회화나무
돈화문 안마당에 있는 8그루의 회화나무는 모두가 천년기념물이다.
나이는 약 3~4백년 되었으며 임진왜란 후 다시 지을 떼 심은 것으로 추측된다.
돈화문 주변은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공간으로 이곳에 회화나무를
심는 것은 “궁궐 정문 안쪽에 괴목을 심고 그 아래에서 삼공이 나랏일을 논했다.”는 중국
고사에 의한 것이며, 궁궐이외에도 학식 높은 선비가 사는 마을에 흔히 심어서 학자나무라고
한다.
* 금호문
금천교 서쪽에 위치하며, 평상시 궐내각사에 근무히는 신하들이 출입했다.
* 인정전 서편 궐내각사(2005년 복원)
인정전 서편에 여러 건물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궐내각사라고 한다.
궐내각사란 왕을 가까이 모셔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관원들이 궁 안에 들어와 근무하는
곳으로 완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어진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돈화문과 인정전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왕이 계시는 곳 가까이
궐내각사를 둠으로써, 일을 할 때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 규장각(奎章閣)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 궁중에 설치한 것으로, 역대 국왕의 사문.친필,서화 등을
관리보관하던 왕립도서관과 같은 곳이다. 학문을 연구하고 정사를 토론케하여 왕의 정치를
보좌하는 한편, 외척과 환관세력을 눌러 왕권을 강화하고 문예 풍속을 진흘시키기 위한
역할도 수행하였다. 처움 규장각은 창덕궁 후원에 만들어졌다.
후원의 규장각은 2층으로 되어있는데 1층은 규장각, 2층은 주합루라 불렀다.
규장각은 학문기관이자 자문기관인 동시에 정조임금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주합루는 열람실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규장각은 정조임금 사후 왕실 도서관 기능만 남게
되었으며 고종 5년(1868)에 지금의 인정전 서쪽 궐내각사로 옮기게 되었다.
지금은 창더궁 후원의 건물 전체를 주합루라 부른다.
일제강점기 이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규장각의 도서가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다가
1946년 서울대학교 개교와 더불어 서울대학으로 이관되었다.
그 때의 도서 일부가 서울대학교 내부 전시관‘쥬장각’에 남아있다.
규장각 뒤에는 책을 보관하던 책고가 여럿 지어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규장각에는 관원 6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각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각신은 아침 저년으로 임금님께 문안을 드리고 임금님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는 사관으로
서의 역황을 했으며 또한 임금님과 정사를 토론하고 책을 편찬하는 등의 역할을 맡았다.
규장각 마당에는 구리로 만든 측우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여러 관청 가운데 가장 크고
넓은 것이었다. 또 임금님이 하사한 토호, 거문고, 은잔, 큰 벼루, 옥등잔 등이 규장각 대청
들보에 걸려 있었다 한다.
* 검서청(撿書廳)
규장각 옆쪽으로 검서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검서청은 독립된 관청이 아니고 규장각의 검서들ㄹ이 입직(당직)하단 규장각의 부속건물이다.
규장각을 처음 만들고 검서관 4명을 두었는데 검서들은 돌아가며 임금의 갑작스런 질문에
대비하여 밤새 입직했다.
겸서는 정직이아니고 잡직이지만 뛰어난 자질을 갖춘 서얼이 주로 임용되었습니다.
임명 절차는 가문과 자질을 고려하여 후보자를 올리고, 왕으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였는데
임명절차가 까다로운 것은 잡직이기는 하나 정조가 이 직책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초대 무관 7품 검서관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이 임용되었다.
* 억서루(憶昔褸)
2층 건물로 억석이란 '옛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지만, 농업의 신인 신농씨를 기리는 의미도
도 내포, 2005년 새로 복원한 건물, 정면 5칸, 측면 1칸의 박공지붕 형태의 2층행각이다.
* 양지당(養志堂)
예를 올리기 위해 임금이 옷을 가라입고, 마음을 가다듬던 전각.
* 선원전(璿源殿)
선원전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궁월 밖으로는
종묘를 두었고 궁안에는 선원전을 두었습니다. 원래 춘휘전이었던 건물을 숙종 21년(1695)
에 선원전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곳에는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초상을
모시고 있었는데 1950년 한국전 당시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좌측에는 제물을 만들던 진설청, 우측에는 내찰당이 있고, 제기를 보관하던 의풍각과 왕이
선원전에 갈 때 머물던 양지당 건물이 있습니다.
창덕궁에는 신산원전이라는 선원전이 하나 더 있는데 검소함을 강조했던 조선시대에 왜 선원전
을 하나 더 지었을까요? 신선원전은 1917년 창덕궁에 대화재가 났을 때 일제에 의해 인정전
에서 멀리 떨어진 창덕궁 북서쪽에 지어졌습니다.
일제는 조선의 임금들이 선원전을 찾아가 선대왕들로부터 위로받는 것을 달갑지않게 여겼고,
선원전이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멀리 외딴 곳에 지었던 것입니다.
선원전에서의 의례는 검소하고 간단하게 하도록 했는데, 이는 조상을 모시는 일이 행여 후대에
부담이 될까 염려한 숙종임금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영조임금도 선원전이 점점 크게되어 후세에 폐단이 될 것을 경계하여 비용을 낭비하는 일을
삼가라고 후대 임금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보물 제817호, 조선 중기 건축양식, 1695년부터 춘휘전에서 변경됨
영조 무렵에는 선왕의 탄생일과 매달 초하루, 볼,ㅁ에 왕이 친히 제사를 올렸다.
* 약방(藥房)
조선시대 궁중의 의약을 맡은 관청으로, 1443년(세종 25)에 내의원이라 칭하였는데, 내의원은
궁궐 내부의 병원으로 이해될 수 있고, 이러한 내의원에는 내의녀라 하여 내국여의(內局女醫)
지금으로 말하면 여의사도 포함되어있다.
약방의 책임자는 도제조와 제조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5일 마다 의관을 데리고 왕을 문안하고
진찰하기를 청했다. 내의원에서는 악은 물론 차를 달여서 올렸는데, 꼭 한강 가운데서 물을
길여다 은으로 만든 탕관에 달여서 왕께 바쳤다.
순종 때는 창덕궁이 개조되면서 약방이 혈려 성정각으로 옮겨졌습니다. 지금도 성정각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옥당(玉堂)
옥당은 조선시대 삼사의 하나인 홍문관으로써 조선시대에 궁중의 경서, 사적의 관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홍문관의 일은 본래 정종 때 설치한 집현전에서 맡아하였는 데 , 집현전 학자 가운데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여 단종복위를 꾀한 사육신이 있어 세조는 집현전을 혁파하고 예문관에서
그 기능을 맡게하였는데, 이 후 1463년(세조 9) 양성지의 건의에 따라 장서각을 홍문관이라
하였으나 이 때의 홍문관은 장서기관의 역할만 하였고 학술.언론기관의 기능은 여전이 예문관
에 속하였으나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다가 1478년(성종9) 옛 집현전의 직제를 예문관에서 분리
홍문관에 이양함으로 비로소 학술. 언론기관의 위상을 갖추게되었다.
왕의 자문에 응하는 업무 때문에 자주 왕에게 조정이 옳고 그름을 논하거나 간언하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계에도 완이 그 간언을 듣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홍문관을
합하여 3사 함께로 간언하였다고 한다.
* 금천교(錦川橋)
금천교는 1411년(태종11년)에 축조된 돌다리로 길이 12.6m 너비 12.1m 정방형 교각
홍예구조로 난간 한 쪽 6개씩 12개 동자석주로 석주 꼭대기는 연꽃 봉우리다.
조선의 궁궐에는 공통적으로 초입부에 배산임수의 풍수지리상 길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궁월 안과밖을 구분하기 위해 돌다리를 놓았다. 참고로 경복궁은 연제교, 창경궁은 옥천교
로 명명되어 있다.
홍예 밑에는 벽사로 남쪽의 해태상, 북쪽에 거북상을 배치하여 궁궐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았다. 다리 중간에는 잡귀를 쫒아내는 귀면이 조각되어 있고 돌출부에는 천록(天鹿)이
들어오는 사람의 마음을 착하게 만든다고 한다.
* 진선문(進善門)
건립은 창덕궁 건축 시기와 같은 시기로 추정되며 1908년 인정전 개수공사 시 헐었던
것을 1996년 복원 착수하여 1999년 완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돈화문에서 북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꺽어서 금천교와 진선문을 지나 다시 북쪽으로
꺽여 인정 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진선문에는 태종대와 영조대에 북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이 와서 치면
왕이 직접 해경해 준다는 신문고 혹은 등문고가 있었다고 전항다.
인정전 일곽
* 인정문(仁政門)
인정문은 인정전의 정문으로 1406년 다른 전각과 더불어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서
없어지고 광해군 즉위년에 재건하였으나 1744년(영조 대)에 불에 타고 이듬해 복구해서
1803년(순조 대) 12월에 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2년 일재가 인정전을 전시장으로 만들면서 일본식으로 변형되었다가 1988년 다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인정이란 어진정치를 의미하며 즉위식, 혼례식, 세자책봉식, 문무백관하례는 이곳에서
행해졌으며 매월 5,11,21,25일에 조회를 가졌다.
* 인정문 주변의 궐내각사
왕을 가까이서 모실 필요 때문에 궁궐 안에 들어와서 활동하는 관원들의 관서를 통틀어
궐내각사라고 한다.
진선문 좌우의 행랑과 남쪽행랑은 병조에서 궁궐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분신이라 할
‘내병조’와 완의 의복과 궁궐에서 쓰는 보물과 인장 등을 관리하는 ‘상의원’, 왕이 참여
하는 큰 행사에 장막을 치는 일을 담당하는 ‘전설사’ 등이 행랑에 들어와 있었다.
그 중 진선문과 숙정문은 일제에 의해 사라졌었으나 1996년 복원공사를 해 지금은 재건
되었다. 진선문을 들어서서 만나는 네모난 넓은 마당은 즉위식이나 각종 큰 잔치 혹은
중대한 재판을 진행하던 곳으로, 곧 궁월 안 광장이었다.
- 정청(政廳)
정청은 인사업무를 주로 담당하던 곳으로 문관의 인사는 이조가 맡고, 무관의 인사는
병조가 맡았으나 담당관원들이 궁궐에 들어와 인사를 처리하였다.
- 호위청(扈衛廳)
시중들기 위해 따른다는 ‘호’의 의미이다. 호위청은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들이 국왕
호위를 명목으로 창설한 부대로 자신들의 군사세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호위청에는 대장 1명, 별장 3명이 근무했으며 군관 350명을 거느렸다고 합니다.
호위청에서 사람을 선발할 때는 특별히 함경도 사람을 더 선호하였다.
왜냐면 함경도는 산새가 험하고 겨울이 매우 추은 지리적 여건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
그 곳 출신 은 평상시에도 강하게 연단되었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 상서원(尙瑞院)
왕의 명령은 ‘교지’ 또는 ‘교서’라는 서류를 통해 나가는데 왕의 도장이 찍혀있어야 한다.
이러한 옥새와 각종 서류를 관장하는 곳이 상서원이다.
또한 왕의 명령을 상정하는 여러 물건을 관리하던 관청이다.
절월(임금을 상징하는 도끼), 병부(군대를 동원하는 표지로 쓰던 나무패), 순패( 궁궐이나
도성 안팎을 순찰할 때 차고 다니는 패), 마패(馬牌) 등을 관리하였다.
* 내병조(內兵曹)
대궐 안에 위치한 병조이다. 조선시대 각 궁궐 내에 설치하였던 병조에 딸린 관청입니다.
궁궐 내 시위, 의장 등 군사업무를 보기 위한 병조관리들의 출장소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이 외에 대궐 안의 시위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인정전 = 正殿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이다. 조선시대 궁월은 정전까지 3문을 통과해야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인정전은 조회와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던 전각이다. 그럼 국가의 큰 행사는 어떤
것이 있을까? 왕의 즉위식, 외국사신 접견, 세자책봉식, 문무빅관하례 등이 있다.
인정전의 널은 마당을 조정이라고 하고, 가운데 3개로 난 길은 가운데가 어도, 오른쪽 문관,
왼쪽 무관이 길이다. 양쪽으로 품계석이 늘어서 있는데 문무백관이 자신의 지위에 따라 설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여기서 조선의 관직에 대해 알 수 있다.
품께는 정1품부터 종9품까지로 문무양반제로 18품계입니다. 품계석을 보면 정-종-정-종-
정-종 나오다 정4품부터는 정만 있는데 그럼 종4품은 어디로 섰을 까요? 그냥 정 옆에 서면
됩니다. 정3품 이상을 당상관 , 이하를 당하관이라고 했고 당상관 이상이 어전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 참고로 과거에 장원 급제하면 종6픔에서 관직을 시작합니다.
전각을 보면 용마루에 다른 궁궐의 정전 용마루와 다르게 오얏꽃 문양이 붙어있는데 순종 때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더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에는 오얏문양이 없는데 일제
강점기에 생긴 것으로 보아 2가지로 해석이 된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왕조를 그냥 이씨가 세운 하나의 가문 정도로 여기도록 조선왕조를
비하하기 위해 이씨를 뜻하는 오얏꽃을 붙였다는 것과, 순종 때 국새의 인장으로 쓴 것으로
봐서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문양이라고 보는 것 두 가지입니다.
국보 제225호 , 2단 월대(2층 담으로 된 석대) 위 2층 다포계 팔작지붕
공포는 안과 밖 각각 3개 처마는 겹치마, 각 마루는 양성하여 취두, 용두, 잡상 기와로 장식.
인정전 내부를 보면 임금님이 자리인 용상과 임금을 상징하는 일월오악도가 있습니다.
일월오악도는 언제나 임금의 뒤를 따라서 다니는 그림으로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
폭포, 파도, 소나무가 그려진 그림으로 해와 달은 왕과 왕비를 5개의 산봉우리는 조선의
국토를 폭포, 파도, 소나무는 영원히 변치않는 생명을 의미하고 임금의 권위를 나타냄과
동시에 조선왕조가 영원토록 지속되기를 바라는 의미의 그림이다.
천정에는 봉황이 날고 있는데 이 봉황은 태평성대에만 나타난다는 상상 속의 새로 덕이
있는 임금이 다스리면서 태평성대가 오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바다은 원래 흙으로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렸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마루로 바뀌었고,
실내 장식도 당시 개화기 때의 영향으로 1908년 전등을 설치했고, 문도 황실을 상징하는
노란색 입니다. 인정전은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안을 보시면 하나로 뚫린 구조로 이를
층층구조라 합니다.
일반적인 궁궐배치는 정전 뒤에 편전과 내전이 존재해야 하는데 창덕궁은 지형상 인정전
뒤편이 동산으로 되어있어서 화계와 담장으로 꾸몄습니다.
* 용마루 무늬: 청동오얏꽃으로 고종 18년(1897년)에 대한제국 선포하고, 1908년 왕실의 궁내부
내잔원을 설립, 한성미술제작소에 문장 의례, 순종황제가 인정전 수리 시 문장을 장식함.
* 잡상: 서유기에 등장하는 등장인물 형상으로 대당사부(삼장법사), 손행자(손오공), 저팔계, 사화상
(사오정), 마화상, 삼살보살, 이구룔, 천산갑, 이귀박, 나도두이다
근거는 조선중기 유몽인(어부야담), 장서각 보관(상와도)이다.
* 월대: 삼도 끝 2층 담으로 된 석대로 왕의 위엄의 상징이다, 공연무대로도 사용되었다.
* 판석: 월대로 오르는 중간 계단의 중앙에 자리한다. 봉황이 부조되었다. 신하는 양쪽 계단 이용.
* 드므: 청동숱으로 목조건 화재 방재용도로 물이 담겨있음.
국보 제225호인 인정전 전각은 2단 월대 위 2층 팔작지붕으로 다포계로 공포는 안과밖 각각 3개
치마는 겹치마 처음 신축 시(1405년) 정면 3칸이었으나 태종 18년(1418)에 5칸으로 개조되었다.
* 선정전 – 편전
편전이란 임금이 평소에 신하들과 국가의 일을 논의하던 곳입니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조선후기 임금들께서는 편잔인 선정전 보다는 내전인 희정당에서
업무를 더 많이 봤다고 한다. 선정전은 임진왜란 이후 다시 지어진 옛 모습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전각이다.
선정전은 지형상 정전인 인정전의 뒤에 있지 않고 바로 옆에 있으며 정문인 선정문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다른 것은 청기와를 올린 것이다. 일반기와와 달리 청기와로 지붕을 이는데는 많은
비용이 듭니다. 그런데도 광해군은 인정전과 선정전에 청기와를 이도록 지시하자, 사긴원
이 사치한 궁궐을 조성하는 조치라고 비판한 내용이 실록에 나온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양성하지 않고 기와로 마감하면서 다른 전걱과 달리 잡상이 없다.
전각 내부는 우물마루, 우물 천장으로 마감하였다.
빈청
빈청으로 불리고 있는 건물은 너무나 아쉽게 까페로 이용되고 있다.
빈청은 3정승을 비롯하여 비변사 당상관 이상의 고위 관료들이 정기적으로 회의를 하거나,
긴급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 관계자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단 곳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이후 황실에서 어차고로 사용되다가 2007년 전시되어 있던 자동차 등이 고궁박물관으로
옮겨지면서 빈 공간으로 남게 되었다.
# 창덕궁의 내전
* 희정당
원래 왕의 연구실인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 대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비좁은
선정전이 종종 국장에 사용되면서 희정당이 또 디른 편전으로 활용되었고, 왕의 침실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를 복구하면서 경복궁의 강령전을 이건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과 완전히 다릅니다. 정면에 자동차 승하차를 위한 현관이 마련되고,
내부는 유리창과 전등, 근대적 화장실을 설치하고 바로크풍의 가구를 갖추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 순조33년 소실 그리고 1917년 소실, 현재 모습으로 1920년 재건
내부는 현대식으로 배르사이유, 루브르 같은 궁전 건축물로 바뀌었다.
대조전 일곽
* 대조전
임금과 왕비가 잠자는 방이 있는 집이 대조전입니다.
이곳은 왕 이외에는 어떤 남자도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다. 창덕궁의 대조전의 ‘대조’란
큰 공 또는 큰 것을 만들어 냄 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지혜롭고 현명한 왕자를
생산해야 한다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지금 있는 대조전 건물은 일제 강점기인 1917년 화재가 나서 타버린 것을 다시 지은 건물
입니다. 그런데 당시는 일제 강점기로 대조전의 복구공사를 일본인들이 주도하게 됩니다.
그때에 기본적인 구조는 화재 이전과 같게 했지만 실내 장식, 채광, 통풍, 배수방법을 맘대로
서양식으로 바꾸었으며 또 공사 중에 부족한 목재를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 사용하였다.
1920년에 내부 구조가 달라짐, 대청을 좌우로 큰방 하나씩 만듬.
동쪽 온돌방은 완의 침실, 서쪽 온돌방은 왕비의 침실, 대청 동서 벽에는 '봉황도', '군학도'
* 홍복헌
대조전 옆에 있는 건물이 홍복헌입니다.
우리역사 속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긴 건물입니다. 우리의 국권이 빼앗긴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1910년 8월22일 조선왕조의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려던 곳이기도 합니다.
일본 군관이 총칼을 들고 서있는 가운데 형식적으로 회이가 열렸습니다.
건물 이름은 ‘복이 흥하다’는 뜻이 ‘홍복원’이지만 여기서 조선이란 나라가 없어진
안타까운 장소입니다.
* 수라간
왕의 식사를 “수라”라고 하여 수라를 만드는 부엌을 수라간이라고 합니다.
다른 궁궐의 수라간은 일제 강점기 때 모두 사라졌으며 창덕궁에 남은 것이 현재
유일하게 남은 수라간입니다.
일본인들은 수라간을 없애 조선의 궁궐을 단순한 구경거리로 만들려고 했답니다.
이곳은 1917년의 화재 이후로 신식으로 개조되어 수도와 전기시설을 성치했으며
오븐까지 갖춘 근대식 수라간입니다.
* 궁궐의 꽃 궁녀
궁녀들의 공식 명칭은 궁중여관으로 궁중에서 근무하는 여성이라는 뜨입니다.
궁녀를 크게 나누면 내명부의 품계를 받은 여관과 품계를 받지 못하는 천비로 구분
됨니다. 여관에는 나인과 상궁이 있고, 천비에는 비자, 방자, 무수리 등이 있습니다.
흔히 궁녀라고 하면 여관 즉 나인과 상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대부분 궁궐에 들어온지 15년이 지나면 나인이되고, 나인이 된지 15년이 되면 상궁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이 항시 지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궁녀의 선발은 왕이나, 왕비
또는 대비나 후궁들의 처소에서 필요한 경우에 했습니다.
입궁시기는 빠르면 4~5살에서 늦어도 12살 정도에 입궁하였습니다.
궁녀의 조직은 모두 7개의 부서로 이루어졌는데, 각 부서는 기능과 역할에 충실하도록
짜여있습니다. 7개부서는 바로 지밀, 침방, 수방, 세수간, 생과방, 소주방, 세답방입니다.
이 7개의 부서 외에 복이처와 퇴선간이 있습니다. 복이처는 아궁이를 담당하는 곳으로
침실에 불을 때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퇴선간은 일종의 중간부엌으로 소주방과 대전이 멀기 때문에 음식이 식지 않도록 데우는
장소이며, 또 먹은 수라상을 설거지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 정훈각
창덕궁 대조전 뒤쪽에 있는 건물로, 대조전과는 복도로 영결되어 있습니다.
세조 7년(1461)에 전각 명칭을 바꿀 때 2층을 징광루, 1층을 광세전이라 했다는 기록을
보아 그 이전부터 1층 건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동궐도를 보면 2층 정광루는
청기와로 덮어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후에 1층은 경훈각으로 이름을 바꾸었
습니다. 1917년 화재 이후 재건하면서 정면 9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이 되었습니다.
성정각(誠正閣) 일곽
* 성정각
ㄱ자형의 단층건물에 2층의 누마루가 붙어 있는 독특한 구조입니다. 헌종 대에 편찬된
궁궐지에 “춘저(왕세자)가 서영하던 곳이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세자의 공부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의와 바른 마음으로 학문을 익히라는 뜻입니다.
(성=성의: 뜻을 순수하게 집중한다. 정=정심: 마음을 바르게 한다.)
성정이란 본 마음을 다해 공부에 전념하다는 뜻으로 하루 3차례 유교 경전으로 공부함.
왕실에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세자로 책봉되면 서연이라는 교육을 통해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체계적인 교육을 받습니다.
세자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을 세자시강원이라고 합니다. 두세 살 때에는 신분에 맞는 말과
행동을 배우고 다섯 살이 넘으면 읽기와 쓰기를 배우는데 사도세자는 세 살 때부터
조기교욱을 받았다고 합니다. 왕이 될 세자에게는 보통 20명 정도의 스승을 두었는데
그 외의 아들들은 한꺼번에 한명이 가르쳤습니다.
내의원은 원래 지금의 천녀기념물 향나무가 있는 인정전 서쪽 궐내각사에 속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내전 일원과 가까운 성정각을 내의원으로 사용하면서 본래 내의원에 걸려
있던 현판과 돌절구 등이 옮겨졌습니다.
- 迎賢門 : 성정각의 남문. 어진 이를 맞이한다는 의미로 세자가 공부하는 장소이므로
어진이를 맞아드려 공부에 힘쓰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 調和御藥 保護聖躳
임금의 약을 제조하여 임금의 몸을 보호한다. 허준은 선조대왕 시절과 광해군 시절 때
즉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후까지 인물이다. 허준이 일을 했던 곳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경복궁과 상덕궁 내의원이었을 것이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불에 탄 궁궐을 새로 짓기 전
까지는 정동행궁 즉 지금의 경운궁에서 어의로 일을 하셨을 것이다.
1917년 창덕궁이 화재로 순종황제께서는 후원 영역에 있는 연경당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일제가 임의로 이곳 성정각을 내의원으로 사용하게 했다.
- 報春亭
성정각의 동쪽 누각에 남향하여 붙은 현판이다.
‘봄의 옴을 알린다’는 의미이며 봄은 동쪽을 상징하고 동쪽은 태양이 뜨는 방향이므로
왕세자가 공부하는 곳에 지어진 이름이다.
-喜憂樓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정조 1년 매우 가물었는데 이 누각을 증건하기 시작하자
마침 비가 내렸고 또 몇 개월 동안 가물다가 이 누각이 완성되어 임금이 행차하자
다시 비가 내려 희우라는 이름을 지어 기년했다는 내용이 있다.
-觀物軒
輯喜-<시경>에 나오는 말로 임금의 빛나는 덕을 계속해서 잇는다는 의미입니다.
순조 13년에 세자 익종(효명세자)의 서연의 처소로 사용했던 곳이며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태어났고 고종의 아버지 흥성대원군이 입궐할 때 머문 곳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이곳은 저지대가 높은 곳이라 1884년 김옥균 박영호 등이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을 일으켰을 때 방어에 유리하여 핵심본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 중희당 (창덕궁 단일 건물 중 가장 컷던 건물)
중희당은 정조 6년 문효세자를 위해 건설했다. 정조는 효의왕후 김씨와의 사이에 아들의
없어 후궁인 의빈 성씨로부터 문효세자를 얻어 8년에 중희당에서 세자책봉을 했다.
세자는 이곳에서 가례까지 치렸으나 정조 10년 안타깝게도 요정하고 말았습니다.
정조는 중희당을 세자궁으로만 쓴 것이 아니고 자신의 편전으로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정조 14년 수빈 박씨 사이에서 원자를 얻어 11세가 되던 24년 만에 창덕궁 집복헌에서
책봉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자로 책봉된지 구 달 만에 정조가 별세ㅘ여 순조는 중희당에서
지내보지 못한 채 임금이 되었습니다.
중희당은 고종 28년 기록에서 사라집니다.
부속건물인 승화루(소주함루)와 삼삼의 건물군은 일제 강점기 때 창덕궁 경찰서로
사용되었습니다. 넓은 마당에는 풍기, 해시계, 소강의, 측우기 같은 각종 천문기구가 배치
되어 청조의 지식 사랑과 교육열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낙선재((樂善齋) 일곽
왕실 가족들이 가장 최근까지 생활하던 곳이 바로 낙선재입니다.
낙선재는 헌종임금이 1847년 사랑하는 후궁 경빈 김씨를 맞이하여 중희당 동쪽에 특별히
지었다. 후계를 이을 왕자를 보기위해 헌종은 주로 낙선재에 머물렀고 대왕대비 순원왕후도
낙선대 권역에 머물렀다. 그런데 낙선재를 짓고 불과 2년 후인 1849년 헌종이 승하하면서
후궁도 떠나면서 경빈 김씨가 낙선제를 나오면서 빈 건물이 된다.
낙선재는 고종이 1884년 갑신정변 후 이곳을 집무실로 사용하면서 사람사는 온기가 머문다.
낙선재는 '선을 즐긴다'는 뜻이다. 낙선재는 하나ㅇ의 건물이 아니고 석복헌, 수강재는 뭏론
상량정, 한정당, 취은정과 각종 화초, 석물, 굴뚝으로 자연 경계를 이룬 화계도 낙선재 권역이다.
* 장락문
장락문은 길이길이 즐거움을 누리라는 뜻입니다.
장락문은 할머니 신선이 서왕모가 사는 월궁의 이름으로 문 안쪽의 신선의 세계처럼
근심 걱정없는 즐거운 곳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편액의 시원시원한 글씨체는 흥선대원군이 쓴 것이다.
* 낙선재
낙선재라는 이름은 영조 때 등장하지만 지금의 낙선재는 1847년 헌종(13년)이 후궁인
경빈 김씨를 맞이하면서 왕실의 사생활 공간으로 쓰기위해 지은 것이다.
헌종은 많이 아꼈던 경빈 짐씨 옆에 오래 머물기를 바랐지만 김씨를 맞이하고 2년 후
돌아가셨다. 그 후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가족의 아픈 역사와 함께 한 곳이고 가장 가까운
시간까지 황실가족이 머물던 곳이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순종황제와 부인 순종효황후께서
마지막까지 머무셨던 곳으로 특히 순정효황후께서는 광복과 한국전쟁 속에서 이곳 낙선재를
꿋꿋하게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강제로 보내져 일본사람과 결혼까지 한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여사 그리고 역시 일본에 강제로 보내진 막내 딸인
덕혜옹주께서 돌아와 1989년 타계하실 때까지 이곳 낙선재에서 생활하셨다.
* 석복헌
헌종 14년(1848년) 후공인 순화궁 경빈 김씨의 처소로 만들어져 낙선재 동쪽에 위치하여
안사랑채 역할을 하였다. 본래 세자궁이었지만 낙선재를 지을 때 개조하여 대왕대비인
순조비 군원왕후의 처소로 활용하였다. 단종이 이곳에 머물다가 영월로 떠났으며 세조가
승하한 곳이다. 그 후 궁이 없어졌다가 정조가 문효세자의 글 읽는 장소로 삼고져 다시 지었다.
석복헌은 여러 문의 창살에서 여성의 공간임을 알 수 있다. 또 안방에서 사랑채로 내려가면서
놀이도 낮아지는 데 이는 그 방주인의 신분을 나타낸 것이다. 또 쪽마루에 난간이 특징이다.
* 수강재
수강재는 이름에서 ‘목숨 수’와 ‘편안할 강’자기 들어간 것으로 보아 왕실의 여인들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살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원래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머물던 수강궁이 있던 곳이다.
1848년 헌종의 할머니 순원왕후의 육순을 맞아 대왕대비 거차로 지은 곳으로 매화 담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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