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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단원 김홍도 자신의 사대부로서 안빈낙도하는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그림이다.
단원은 표암 강세황(姜世晃)의 도움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스승을 능가하는
경지에 이르며 스승이 병조참의, 한성판윤 등 벼슬길 오르는데 도움이 된다.
중인 출신 화원으로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영조∙정조의 어진을 그리는
데 큰 공을 세워 1784년 정월부터 1786년 2년 반 동안 안기역도찰방(별종
외문관직, 종6품)으로 근무를 하게 되며 명실상부 사대부가 된다.
<승정원 일기>, 표암고의 <단원기>와 군수 성대중의 <청성집> 기록을
보면, 안기찰방은 역리 1019명, 노비 307명이 있었으며, 규모는 관아에
내외삼문에 정자까지 있었다니 그 규모가 대단했다. 더욱이 단원은 지방직
인사인 군수, 현감들과 관찰사와 함께 청량산에서의 詩.書,畵로 풍류를 즐겼다고
하니 안동 김씨의 일인으로 그 자만심은 대단했었다고 본다.
이제 그림을 잠깐 살펴보자.
말년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함인지 화제처럼 布衣(배옷)를 입고 있다
사방관을 쓰고 당비파(줄 네 개, 악기 목이 뒤로 꺽임)를 켜고 있음은
사대부의 멋스롭고 우아한 풍류를 보여준다.
왼쪽의 글씨를 보면
紙窓土璧 종이로 창을 내고 흙으로 벽을 세운 곳에서
終身布衣 한평생 벼슬하지 아니하며 살아도
嘯咏其中 그 속에서 시를 읊으며 살아가리
*
청동제기 옆에 파초잎이 보입니다. 파초는 가난해서 붓글씨 연습할 종이가
없을 때 사용했다고 함(중국 당나라), 파초 옆에 붓과 벼루가 있는 것은
독학으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선비의 발치에 생황과 사인검이 놓여져 있습니다.
국악기 중 생황은 유일하게 화음이 가능한 악기이고, 사인검은 파사현정
(破邪顯正) 삿된 것을 깨부수어 정의로움을 드러내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글씨가 시작되는 부분에 찍혀있는 표주박처럼 생긴
도장에 찍혀있는 글씨, 빙심(氷心)은 맑고 투명한 세상을 향한 불변의 지조
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그림의 주인공은
화제와는 달리 제대로 된 벼슬,정치, 관직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냥 관직을 얻고자 하는 게 아니다.
학문적 가치가 올곧이 구현되는 그런 이상적인 정치를 바라는 것이다.
올바르지 않는 벼슬이나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반어적인 표현이다.
조선의 고유한 문인화 양식의 정착은 과거제도라는 것이 존재했으므로
태동할 수 있었다고 본다. 과거제도가 있으므로써 글을 읽는 사대부 계층이 늘고
그만큼 필기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고 본다. 과거시험을 통해 출제되는
시험에는 반드시 문장을 짓는 시험을 치르게 됨으로 서생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필묵(붓.먹)을 벗삼아야했다.
문인화는 과거제도를 중국으로부터 도입한 고려 문종시대에 그 발원을 두게된다.
시제로 출제되는 기본교양과목은 중국 고전이었던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유교적
불교적 도교젹 문화인 여러 고사에 얽힌 전설적 인물들의 이야기로 산수화 같은
양식으로 정해져 내려왔다고 본다.
그런데 필히 관심을 주어야 하는 점은 중국과 같이 묵화인 조선의 문인화도
먹물이 잘 스며드는 화선지 위 붓과 먹으로 글을 썻으며 그림도 똑같은 필기수단에
의해 그려져 왔다. 다시말하면 우리의 수묵화는 서양화와는 달리 하나의 표현양식
이었다. 즉, 화제(서)와 그림은 서로 뜻을 보충해주는 정신적인 것이 들어있는
결합체이다란 것을 관찰하고 이해하여야 그림 감상이 가능하다.
그런데 사대부 입장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일보다는 만권의 책을 읽고 교양을 쌓는
일이 더 바쁘니 그림그리는 일은 전문장이(화원 등)의 몫이 된다.
오늘은 잠시 조선시대 중기(약 1550~1700년)와 후기(1700~1850년)시대 화가인
이경윤, 심사정 등의 산수화 속에 심긴 은사들의 삶인 은일에 대해 살펴보자
은사들의 삶인 은일(隱逸)이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온전히 즐기는
삶을 영위하는 것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통일신라 말기에 해인사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대학자
고운 최지원(崔致遠,857~?)을 듭니다, 그는 입산 전에 읊은 시처럼 해인사에 들어간
후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視看他日吾蹤迹 뒷날 한번 나의 발자취를 두고 보게나
一人靑山更不還 한번 청산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않으리
조선조 성종의 11자인 이성군 이관의 종증손으로 16세기 후반 조선화단
의 중견 사인화가인 낙파 李慶胤의 작품 월하탄금입니다.
보름달이 떠있습니다. 험악한 절벽처럼 보이는 큰 바위가 있고, 그 뒤편에
아주 연한 먹인, 담묵으로 그려진 산그림자 같은 것이 보입니다.
산의 나무에 그늘이 진 것입니다. 아마 달빛 때문에 그런 효과가 났을 것입니다.
명암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간색이 곁들여진 느낌입니다.
비탈길에 도인풍의 한 선비가 무릎 위에 거문고를 올려놓고 앉았습니다.
그 뒤에서 다동(茶童)이 지금 부지깽이로 장작을 뒤적뒤적하다가 고개를
돌려 자기가 모시는 선비를 바라보는 풍경을 묘사한 것입니다.
앞쪽 바위는 흑백의 대비가 뚜렷한 면으로 이루어져있고 뒤쪽의 바위는 비스듬히
솟아 있으며 전체적으로 공간이 크게 확대되어 있는 점을 볼 때 명나라 때 절강성
지역의 항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직업 화가들의 화풍인 절파계통의 소경산수화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바위의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해 부벽준 기법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의 방점은 ‘현의 없는 거문고’ 즉 무현금 위에 묘사된 부지런한 손놀림에
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동은 기다리던 거문고 소리가 들리지 않아 고개를 돌려
주인을 바라보려 머리를 돌리고 있고 선비는 휘영청 달빛에 취해 열심히 거문고를
타고 있습니다. 무현금입니다.
줄없는 거문고는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그 해답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답니다.
옛 그림에 무현금을 연주하는 사람이 나오면 중국 동진의 시인이며 은일거사로
불렸던 도연명(陶淵明,365~427)과 같은 은사로 보면 된답니다.
그는 평택 현령으로 지내다가 상급자가 별 볼일없는 거문고를 가지고 위세를 부리고
부당한 지시와 요구를 일삼자, 어느 날 <귀거래사>를 부리고 낙향해버립니다.
낙향하여 지내던 어느 중양절(음력 9월9일) 날, 국화주를 마시고 은근한 취흥에
도도해져 거문고를 가져오라 해서 연주를 했는데, 왠걸 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자가 묻습니다.
“주인어른, 거문고에 줄이 없는데 어찌 연주한다고 하십니까?”
도연명이 대답합니다. “거문고는 흥취만 얻으면 그뿐, 거문고 위의 줄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
소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중국 최고의 문장가 소동파((蘇東坡,1036~1101)가 쓴 시 <거문고>에서 들어봅니다.
若言琴上有琴聲 만약 거문고 소리가 있다고 말한다면
放在匣中何佛鳴 갑 속에 두었을 때 어찌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若言聲在指頭上 만약 손가락 끝에 소리가 있다고 말한다면
何不干君指上聽 어찌 그대의 손가락 끝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렇구나, 거문고 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거문고 통 속에도 있지 않고, 사람의 손
끝에도 있지 않다면, 그 것은 어디에 있겠느냐. 거문고와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인데,
거문고와 사람만 있다고 소리가 나느냐, 그것도 아니다.
거문고의 줄이 제대로 잡혀 있고 사람의 손끝에도 오랜 연습과 경험을 그 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하고, 거기에 그 둘을 아우르는 흥과 그것을 들어주는 귀가 있어야
하느니라.“
조금 길어졌지만 달을 보며 연주한다는 것은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달을 보라고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만을 보는 이가
허다합니다. 직지인심(直指人心) 달의 등장은 禪적인 깨달음이고, 두 번째는
달은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풍류의 대상입니다.
달은 차고 이지러지면서 한 달에 한 번만 둥근 보름달이 뜹니다.
이 이치가 고아하고 풍취를 드러내서 풍류에 알맞은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달 그림은 풍류이자 깨달음을 말합니다.
한선국(韓善國)의
본관은 청주, 자는 군필, 도화서 화원 출신, 통정대부로 재수되었다..
중국의 전설적인 성군인 요임금의 태평성대 시절에 허유(許由)는 숨어
살았다 합니다.
그는 고결한 인물로 요임금이 그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사신을 보냈습니다. 그림 왼쪽에 모자를 벗어놓고 옷을 반쯤 벗은 상태에서
자기 손가락을 귀에 갖다 대고 있는 사람이 바로 허유입니다.
장면은 기산,
“임금께서 나라를 당신에게 맡기려합니다. 나와서 정치를 하십시오”
허유는 사신을 쫓아 보내고 나서 영수에 뛰어가 귀를 씻었습니다.
그 때 소에게 물을 먹이려고 나온 사람이 소부(巢父)입니다.
그가 귀를 씻고 있는 허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내가 더러운 이야기를 들어서 흐르는 영수에다 귀를 씻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부는 냅다 소 등 위로 뛰어 올라탑니다.
자기 발조차 강물에 닿는 게 더럽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소도 물을 먹지 못하게 고삐를 바싹 낚아챕니다.
허유와 소부의 고사는 옛 그림의 소재로 좋았던 것 같습니다.
소부가 말합니다.
“허유, 자네는 참된 은사가 아니네. 자네가 제대로 숨었으면
사람이 찾아 왔겠나, 명예가 세상에 알려지기를 은근히 기다린 건 아닌가.”
은사의 진정한 뜻을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가도(賈島,시인 검객)가 지은
<尋隱者不遇>에서 찾아봅니다.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에게 물었더니
스승께서는 지금 약초 캐러 가셨다하네
지금 이 깊은 산중에 계신 건 분명하지만
구름이 깊어 그곳을 알지 못합니다.
이 시의 한 구절을 화제로 써놓고 <송하문동자>를 그린 사람은
정조시대에 유명한 화원인 장득만(1684~1764)입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약초를 캐러 산에 가셨을까요?
완강하게 안만난다는 스승의 뜻을 다 알고 눈치빠른 동자는
주인은 약초 캐러 갖다고 적당히 둘러대는 겁니다.
이것이 옛사람들이 생각한 은거의 참 뜻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시이고 그림입니다.
계속해서, 두 은사가 나온 옛 그림을 봅니다.
본관은 한양, 호는 운계인 조선 말기 화원으로 1864년
헌종어진도사의 동화화사로 초상화에 귀재입니다.
1866년에는 ‘고종명성후가례도감의궤’제작에고 참여했습니다.
대표작은 ‘산외청강도’, ‘강남추의도’, ‘하경산수도’ 등이 있습니다.
산중에 폭설이 왔습니다. 두건을 쓴 선비가 방에 앉아 밖을 내다
보고, 서고 앉은 바위 형체는 뚜렸한데 길은 끊겨 보이지 않다.
마당 너머로 눈꽃 핀, 철을 이기는 소나무가 서있고 그 곁에 나지막
하게 두 그루의 매화나무가 설송을 짝하여 서있는 데 개화를
대비해 차가운 눈속에서 기지개를 켜며 개화를 존비한다.
'인왕산도‘로 잘 알려진 강희언의 본관은 진주, 호는 담졸입니다.
겸재 정선과 이웃하여 그림을 배웠고 강세황, 김홍도와도 교분이 깊었다고 합니다.
담졸은 비점과 부벽준 등을 혼용하여 바위표현, 담갈색의 색감, 솔 숲의 수지법
등에서 정선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담채 처리에서 현대적
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두 그림은 겨울 풍경으로 공통적으로 두건을 쓴 은사가 단칸방에 앉아서 마당을
내려다 보고 있으며, 매화 소나무, 큰 키 대나무가 심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조중묵 그림에는 없는데 강희언의 그림 밑쪽을 보면 다리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은일의 삶은 강호와는 바다로 떨어진 섬의 삶인데 , 다리는 연락선과 같은 역할을
해줘 내가 세상으로 나가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 세상사람들이 나를 찾아오게
만드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은일의 최종 목표는 절연이라고 합니다.
다리는 연으로 누군가가 찾아와도 연이 됩니다.
그렇다면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 버리는 전연의 참된 마음먹기 , 그 결기는
어떤 것일 까요?
대표적인 예로 통일신라 말기에 해인사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대학자
고운 최지원(崔致遠,857~?)을 듭니다, 그는 입산 전에 읊은 시처럼 해인사에
들어간 후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視看他日吾蹤迹 뒷날 한번 나의 발자취를 두고 보게나
一人靑山更不還 한번 청산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않으리.
본관은 용인, 호는 소당 화원으로 감목관을 지냄
본관은 전주, 호는 불염자, 화원으로 1972년 사천현감 지냄
정선 문하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이 있습니다.
위 두 그림은 오수도로, 옛 그림에는 잠자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소당의 오수도를 보면 산줄기에 소나무가 있고 , 학 두 마리가 노닐고,
은사 한 분이 드러두워서 낮잠을 즐기고 있는 데 바위 아래서는 동자가
찻물을 끊이고 있습니다.
다리를 꼬고 수면 중인 이 분은 서책을 등 뒤에 기대고 있고 세로로
비스듬히 거문고가 세워져 있는 반면 가슴이 들어나게 헤처져 있습니다.
몽중득구(夢中得句), 꿈 속에서나마 원하는 시구를 얻기 위해 책을 베고
누운 것이랍니다.
오른 쪽 위에 ‘禽聲上下 午睡初足’ 새소리 오르내림 낮잠이 비로소 달다.
가 적혀있습니다.
중국 송나라 문인인 나대경(羅大經,1196~1242)의 수필집 <학림옥로>가운데
<산거>편에 나오는 시 중에 한구를 따온 것입니다.
은사가 지향하고 누리고 싶은 태곳적 같은 고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김희겸도 역시 같은 ‘山居. 시의 첫 구절에서 화제를 인용했습니다.
山靜似太古 日長如少年 산은 고요하니 태고와 같고
해는 소년처럼 길기도 하네.
余家深山之中 每春夏之交
蒼蘚盈堦 洛花滿徑
門無剝啄 松影參差
禽聲上下 午睡初足
*
두 그림에는 공히 학이 나오는데 문인화에서 학을 그려 넣는 의미는
고결한 선비의 전통적인 상징이다.
학은 동아시아에서 천년을 뛰어넘은 오랜 기간 동안 상서로운 의미를 지닌
영물로, 선비와 같은 고결함의 상징으로 여겨지어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본관은 청송, 호는 현재, 남종화풍을 터득 겸재와 함께 겸현양재로 불림
작품으로 '강상야박도', '파교심사도', '계산고거도' 등이 있습니다.
위 그림을 보면 선비가 거문고 연주를 잠깐 멈추고 쏟아지는 폭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중첩된 산괴에서 오는 입체감과 무게감을 나타내는 산과 절벽,
폭포를 마주보는 바위절벽 밑쪽의 평평한 바위와 소나무의 모습들은 심사정의
초기 화풍에서 볼수있는 중국 남종화의 영향(모방)이라고 합니다
겸제 정선 (謙齋 鄭敾) <高士觀瀑>
밑에 올린 겸제의 ‘고사관폭도’와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일종의 관념산수도(실경이라기 보다 마음속에 남아있는 폭포의 모습과 더불어
작가 자신의 생각을 함께 그려놓은 산수도)이지만 후자는 실경산수도적이지요.
물소리의 역할을 명나라 문인 예윤창(倪允昌)은 “처마 끝의 빗소리는 번뇌를
끊어주고, 산자락의 폭포소리는 俗氣를 씻어준다”라고 읊습니다.
속기란 세상의 속된 기운으로 이 것을 씻어주는 것이 폭포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은사는 악기를 타면서 찾아오는 잡념을 털기 위해 음악을 멈추고
끊임없이 침차게 내리는 폭포를 보면서 자신에게 묻은 속기를 닦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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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 한바다.
참고서: 흥, 손철주의 음악이 있는 옛 그림 강의 2016 김영사
'삶과 나 > 미술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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