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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자신의 한쪽 찾는 인간
그 시공간 헤매는 행위가 사랑
보고 듣고 만지는 건 진실의 껍질
그걸 느끼는 순간이 바로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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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져 있는 순간마다 고문이고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내가 있어야 할 것 같은 괴로움.
이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야
내 삶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곳에서,
그 사람과 함께 있어야만 인생의 무의미와 무기력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은 감정.
독일어 ‘Sehnsucht’, 포르투갈어 ‘Saudade’,
그리고 한국어로 ‘그리움’이라 불리는 이 묘한 느낌.
인간은 왜 그리움을 느끼는 걸까?
그리움이 도대체 뭐길래 얼마 전까지 멀쩡했던 사람을
그토록 괴롭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일까?
왜 우리는 로렌스 알마-타데마의 그림에서 같이
언제나 지금 이곳과 이 사람이 아닌,
먼 다른 곳과 다른 사람을 그리워할까?
플라톤은 심포지엄 (Symposium, 향연)에서 흥미로운 답을 제안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심포지엄은 학회나 콘퍼런스가 아니었다.
‘Sympinein’, 그러니까 ‘함께 술 마시기’라는
단어에서 나온 이 행사는 말 그대로 집에서
친한 지인들과 술과 대화를 나누는 홈파티였다.
그것도 소파에 누워서 말이다!
역시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생을 즐길 줄 알았던 걸까?
작품에서 플라톤의 ‘아바타’ 역할을 하던 소크라테스,
당시 아테네 최고의 극작가였던 아리스토파네스,
그리고 정치인 알키비아데스를 포함한 심포지엄의 손님들은
토론하기 시작한다. 에로스, 그러니까 사랑의 기원은 무엇이냐고.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을 빌려 플라톤은 주장한다
오래전 인간은 머리 둘, 팔다리 4개씩 가진 거인이었다고.
오만에 빠져 신에게 도전한 인간에게 내려진 벌은 잔인했다.
몸을 두 조각낸 제우스 신은
반쪽 인간들을 거대한 우주의 공간과 시간에 뒤섞어 놓았으니 말이다.
남자-여자, 남자-남자, 여자-여자 모습의 두 머리를 가지고 있던 인간들은
그 후 영원히 잃어버린 자신의 다른 한 조각을 찾아다녔고,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찾아 시간과 공간을 헤매는 인간의 행위를
우리는 이제 ‘사랑’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란 새로운 무엇이 아닌, 과거 나 자신의 부분이었던 것을
되찾으려는 노력이기에,
사랑(에로스)은 언제나 에로스의 아들 ‘포토스’(pothos),
그러니까 ‘그리움’을 만들어낸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플라톤다운 주장이겠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은 완벽하고 원천적인 ‘이데아’ 세상의
왜곡된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믿었던 플라톤.
이미 완벽한 것에서 타락한 것이 지금의 세상이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희망은 잃은 것을 언젠가 되찾는 것이겠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과학과 지식은 잊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고,
모든 사랑은 잃었던 영혼을 되찾는 것이다.
잊힌 기억과 잃어버린 또 하나의 ‘나’ 없이 우리는 영원히 나 자신에게 부족하기에,
영혼의 완벽을 위해 또 다른 ‘나’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포토스는 사랑의 조건만은 아니다. ‘파이드로스’(phaidros)에서 플라톤은
이데아 세상에 대한 그리움 덕분에 인간은 진실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매일 아침 일어나 씻고, 아침 먹고 학교에 가거나 출근하는 우리.
온종일 바쁘지만, 퇴근길에 질문하기도 한다.
“오늘 나는 무엇을 한 걸까? 왜 인생은 이토록 무의미하고 외로운 걸까?”
플라톤은 대답한다. “매일 나가는 직장도, 온종일 두들긴 키보드도,
그리고 저녁에 돌아온 집도 결국 진짜가 아닌,
이데아 세상의 참된 집과 참된 키보드와 참된 직장의 그림자일 뿐이기 때문이라고.
”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듣고, 내 손으로 만지는 것들이 진실의 ‘껍질이자 포장’으로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을 우리는 포토스, 그리움이라 부른다.
그리움을 느끼며 우리 스스로 당부하는 것이다.
현실에 적응해서는 안 된다고. 그리움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영원히 거짓과 무의미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고
하지만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던졌던 질문을 우리도 할 수 있겠다.
이데아 세상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걸까? 있기는 있는 걸까?
플라톤의 상상력은 매우 풍부하지만 사실 객관적 증거는 없다.
더구나 그리움은 정말 언제나 과거에 알고 소유하던 것으로 되돌아가려는 느낌인 걸까?
독일어 단어 ‘Fernweh’가 의미하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무지의 세상에 대한 그리움
역시 인간은 느끼지 않을까? 가장 잘 알고, 가장 익숙한 사람이 아닌,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 누군가를 보고 싶은 고통 역시 우리는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고대 그리스인들만 그리움을 느꼈던 건 아니다.
라스코나 쇼베 동굴에 그려진 수만 년 전 석기시대 인류의 벽화들.
그들의 정확한 의도와 생각은 알 수 없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동굴 벽에 그려진 풍만한 자연과 사냥감들은 배부름과 성공적 사냥에 대한 희망을 나타내고.
죽은 부모와 아이들의 무덤에 함께 묻은 음식과 옷은 죽은 이들에 대한
그들의 그리움을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
결국 희망하는 미래와 기억하고 싶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야말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기본 조건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리움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경험하게 해주는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소파에 편하게 누워 아프리카와 남극을 체험할 수 있는 미래에도 여전히 가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그리움, ‘Fernweh’를 느낄 수 있을까?
지구 반대편에 살더라도 언제든지 서로 볼 수 있고 같은 연속극을 보며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오늘날.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은 이제 무슨 의미일까?
그뿐만이 아니다. 블랙미러(Black Mirror)와 같은 공상과학 드라마에선
더는 만날 수 없는 이들을 인터넷 데이터를 기반으로 재현해주는 미래기술을 보여준다.
만약 죽은 부모님이 보낸 문자와 e메일을 받고, 죽은 연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수십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와 술 한잔하고, 어머니와 따듯한 밥 한 그릇 나눌 수 있다면?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면서 그리워하던 아이의 손을 다시 잡아볼 수 있다면?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지만, 점점 잊혀 가던 아이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언제든지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미래 세상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밤을 새울 수 있을까?
미국화가 앤드류 와이어스의 그림에서의 크리스티나. 그녀의 세상은 그리움의 세상이었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먼 곳의 무언가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당장 뛰어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크리스티나와 같이, 호모 사피엔스에게 그리움은
쉽게 설명하기도, 쉽게 실현하기도 불가능했기에 존재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미래 인류가 느낄 가장 큰 그리움은
우리가 더는 느낄 수 없는 진정한 그리움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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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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