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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나/미술관련

겸재의 진경산수 (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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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산수는 조선조 숙종~정조대(조선의 르네상스)까지 성행했던 화풍이다

중국의 화풍에서 벗어나 산천에 실재하는 경관을 그리는 산수화로 실경산수화라고도 한다.

겸재 정선에 의해 시작하여 심사정, 이인상, 강세황, 김홍도, 이인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들이 추구했던 화풍으로 성리학의 기본경전인 "주역"의 음양원리에 입각하여 음양의

원리에 의한 조화(음)와 대비(양)로 화면을 구성해내는 새로운 화풍으로 음은 중국 남방화법의

특징인 묵법으로 수목이 우거진 토산을 표현하고 양은 북방의 화법인  선묘로 암산과 암봉을 

표현하는 화법이다.

겸재는 나이 65세 영조16(1740)년 양천현령(종5품)으로  부임하여 70세까지 근무하는 동안

"경교명승첩" 33폭을 제작하였고, 1742년에는 양천8경첩을 제작한다.

일전에 경교명승첩 일부 그림을 올린적이 있어 오늘은 몇 화폭을 다시 올려 본다.

겸재의 진경산수 중 ( 한양도성을 둘러싼 산과 경강 일부 특히 한강의 하류) 몇 점이다.

 

1. 인곡유거(仁谷幽居)

 

 

인곡유거는 겸재 정선(1676~1759)이 살던 집 이름이다.

겸재는 자신이 52세부터 살기 시작하여 84세로 타계할 때까지 살던 이곳 인왕산

골짜기의 자기 집을 인곡유거, 인곡정사라고 택호를 지어 불렀다.

 

유거라는 것은 마을과 멀리 떨어진 외딴 집이란 의미이고, 정사란 심신을 연마하여

학문을 전수하는 집이란 뜻이다.

 

인곡유거가 있던 자리는 종로구 옥인동 20번지 부근이다.

인곡으로 이름 붙인 까닭은 당시 겸재 댁의 주소가 북부 순화방 창의리 인왕곡으로

인곡은 인왕곡을 줄인 말이다.

현재 옥인동도 1914뇬 옥류동과 인왕곡을 합치면서 만든 말이다.

겸재의 탄생지의 주소는 한도 순화방 창의리 유란동이 었다고 한다.

 

겸재는 어려서부터 스승이었던 삼연 김창흡(1653~1722)의 형제들인 농암 김창현

(1651~1708), 노가재 김창업(1658~1721, )의 문하에 드나들며 성리학과 시문서화 수련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그들의 후원으로 진경 산수화풍을 대성해낼 수 있었다.

 

<인곡유거>는 겸재가 관아재 조영석(1686~1761)와 이웃해 살던 생애 후반의 삶을 그린

자화경이다. 인곡유거는 지금의 신교동과 옥인동을 나누는 세심대 산봉우리를 등지고

남향해 있던 집으로 그 집을 동쪽에서 내려다 보는 시각으로 그린 것이다.

인왕산 주봉을 생략해 보리고 뒷동산인 낮은 봉우리들만 그려 인왕산 밑 동네임을 실감

하기 어렵다. 그러나 담묵으로 우리고 다시 물칠해가면서 담묵의 미점을 성글게 찍어,

수목이 골마다 우거진 궁근 바위 산봉우리를 연상케 하기에 인왕산을 아는 사람은

느낌으로 그곳이 인왕산 자락임을 감지할 수있다.

 

사랑방인 듯한 모서리방에 사방관을 쓰고 도퍼 입은 선비가 서책이 쌓인 서가 곁에서

책을 펴고 앉아 있다. 활짝 열려 방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뒷마루의 지게문 곁에는

띠살문으로 된 평범한 방문이 보이고 그 앞으로는 삿자리 모양으로 엮은 울바자가

보인다. 이엉을 얹은 토담이 둘려쳐져 후원을 만드는데 초가지붕 일각문이 기분좋게

표현되고 그 안에는 큰 버드나무와 오동나무 등 잡수들이 서 있으며 버드나무 위로는

포도인지 머루인지 모를 엉굴이 기품있는 잎새를 달고 있다.

 

2. 독서여가(讀書餘暇)


 

겸재는 영조9년 계축 봄에 58세로 경상도 청하현감(6)이 되어 전년 여름 삼척부사로

나가 있던 사천을 만나 동해변 수경을 함께 읊고 그릴 수있게 되었다.

이는 진경산수를 주도하던 백악사단 동문지우들의 각별한 배려와 이를 적극 후원하던

국왕 영조의 대우였다.

그러나 청하현감으로 지내던 영조11년 을묘 5월 모부인 밀양박씨가 92세로 작고하였기

때문에 복상을 위해 관직을 내려놓고 상경하게 된다.

그런데 겸재 64세 나던 영조 15(1740) 기미에 명목상 정국을 주도해 오던 소론 탕평파들이

사묘이주 사건으로 국왕의 노여움을 사 명목상의 자리에서 조차 물러나 백악사단이 주축을

이우는 노론세력이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그래서 동문지기며 동네 후배인 지수재 유척기가 우상으로 발탁되어 세도를 담당하게된다.

덕분에 겸재는 65세 나던 영조16년 경신 초가을에 양화나루 건너에 있는 양천현의 현령으로

승진 발령된다.

한편 겸재가 양천현령으로 발령받아 떠나게 되자, 겸재없는 동해변 고을살이가 부질없어

겸재 떠난 다음해에 바로 삼척부사 자리를 버리고 상경해 있던 사천은 비록 지척이긴 해도

조석 상봉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떨칠 수 없어 전별의 자리에서 자신이 시 한 수를 지어

보내면 겸재는 그림 한 장 보내자는 시화환상간의 약조를 한다.

<독서여가>는 겸재가 평소 인왕곡 인곡정사에서 생활하던 양상을 그린 자화상으로

생각된다.

인물화를 되도록 피했던 겸재지만 사천의 우정어린 강요에 어쩔 수 없이 그린 것 같다.

바깥 사랑채에서 독서의 여가에 더위를 식히며 한가롭게 시상에 잠겨 화리를 탐구하던

자신을 사생적인 필치로 그려낸 것이다.

 

3. 인왕제색 (仁王霽色)


 

일심동체처럼 살던 사천 이병헌이 영조27년 신미 윤5월에 세상을 떠난다.

사천이 병이 깊어 소생할 가망이 없자, 안타까움과 쾌유를 빌며 그에게 마지막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렸다고도 한다.

육상궁 뒤편 북악산 줄기 산등성이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으로 그의 시계는

발아래 북악산 밑에 있는 사천의 집까지 포괄하고 있다. 이 등성에서 사천과 함께 노닐며

내려다보고 건너다보던 그 광경을 한 화폭에 모두 담아 사천과의 평생의 추억을 함축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니 장동 너른 동네의 무수한 집이 있겠으나 겸재와 사천에게는 백악산 아래 있는

사천댁 취록헌만 있으면 되고 그 건너 인왕산 아애 인곡정사만 있으면 되었다.

그래서 그 사이에 있는 인가들은 모두 안개로 가려 버라고 앞 등성이에 육상궁 뒷담을

표현해 이쪽이 북악산이란 것만 표기하였다.

한덩어리인 듯 솟구친 백색 화강암봉들은 묵색 쇄찰법(붓을 뉘어 쓸어내리는 먹칠법)으로

쓸어내리고, 토산임목은 단조로운 피마준과 굵은 미점 및 원송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사천댁이 있는 북악산 아래 취록헌 주변은 그 이름대로 소나무숲과 잡수림을

울창하게 표현해 놓았다.

수림을 처리할 때 마르는 것을 기다릴 새도 없었던 듯 마르기도 전에 덧칠하여 뭉크러진

곳이 많았지만 도리어 이 것이 비온 뒤끝의 물들은 수목 표현에 적절한 기법이 되었다.

 

4. 송파진(松坡津)

 

 

송파진은 지금 송파대로가 석촌호수를 가르고 지나서 생긴 동쪽 호숫가에 있던 나루터다.

이곳은 서울과 남한산성 및 광나루에서 각각 20리씩 떨어져 있던 교통의 중심지라서

광주(廣州) 읍치(읍소재지)가 남한산성으로 옮겨지는 병자호란(1636) 직후부터 서울과 광주를

잇는 가장 큰 나루로 떠오른 곳이다.

사실 이 송파나루가 있는 지역 일대는 한강 물이 마음대로 흩어질 수 있는 평야지대다.

양수리에서 남*북한강 물이 합쳐져서 큰 강을 이룬 한강은 예봉산*검단산 등 큰 산 사이의

협곡을 따라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한양 부근에 와서 아차산과 암사동 쪽 매봉 자락에 의해

일단 물목이 좁아진다

그런데 위례성이 있던 풍납동 부근에서부터 갑자기 넓은 분지를 만난다.

자연히 이 분지형의 저지대로 남쪽과 북쪽에서 물길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남쪽에서는 수원 용인의 물들이 북류하여 봉은사 동쪽에서 한강으로 흘러드니 이것이 탄천(炭川)이다.

북쪽 매봉 기슭에서는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수되어 한강으로 물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중랑천은 의정부에서부터 천보산 도봉산 수락산 삼각산 등의 물을 모아오고 청계천은 한양의

물을 몽땅 모아온다.

그러니 한강 본류와 탄천 중랑천이 이 낮은 분지에서 물머리를 맞대며 실어 나르는 토사의

양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일대는 수많은 모래 섬이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반복을 되풀이했다.

 

이에 뚝섬 무동도 등은 섬이 아닌데도 섬이라 하고 부래도(浮來島) 잠실은 샛강이 생겨 섬이 되었다.

이것이 1970년 이전의 모습이다.

그런데 1970년 송파나루 앞으로 흐르던 한강 본줄기를 매립하고 성동구 신양동 앞의 샛강을 넓혀

한강 본류를 삼으니 이 일대의 모습은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됨)

같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송파나루의 흔적은 메우다 남긴 석촌 호숫가에서 겨우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림에서 보면 멀리 남한산성이 보이고 그 아래 한강가에 송파진이 베풀어져 있다.

지금 화양동 쪽에서 비행기를 타고 보듯이 시점을 높이 띄워 멀리 내려다본 모습이라 한강의

양쪽 기슭이 모두 그려져 있다.

송파나루에서 서울 쪽으로 건너오는 나룻배에서 내린 인물들이 많고 그들이 잠시 쉬며 목이라도

축일 수 있는 곳인 듯 모래사장에는 차일이 쳐져있다.

남한산성이 보이고 그 아래 한강가에 송파진이 베풀어져 있다.

지금 화양동 쪽에서 비행기를 타고 보듯이 시점을 높이 띄워 멀리 내려다본 모습이라

한강의 양쪽 기슭이 모두 그려져 있다.

송파나루에서 서울 쪽으로 건너오는 나룻배에서 내린 인물들이 많고 그들이 잠시 쉬며 목이라도 축일

수 있는 곳인 듯 모래사장에는 차일이 쳐져있다.

요즘 강변 모래밭 풍경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남한산성 위로 솔숲이 녹색 휘장을 두른 듯 높이 솟아

있는 것도 오늘날과 같다. 이것이 바로 남한산성의 본 모습이며 그다운 아름다움이다.

녹음 짙은 한여름이나 새싹 돋아나는 봄철, 단풍 든 가을, 눈 쌓인 겨울 등 언제 보아도 소나무가

사시장철 푸르기 때문에 남한산성 모습은 늘 이와 같다. 다만 여기 보이는 한강 물줄기는 메워져

고층건물로 뒤덮이고 그 사이로 길이 나서 물길 따라 유유히 떠가는 돛단배 대신 사통팔달의 도로를

따라 차량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5.목멱산(木覓山)


        

                                                         <목멱조돈>

1392년 고려에 이어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결정했다.

수도의 천도는 풍수지리설도 영향이 있지만 구세력의 전통기반인 개경을 떠나 새 완조의 새로운

정치기반을 구축하고져 하는 이성계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새로운 도읍지인 한양은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좋고, 북으로는 백악산(주산)을 좌우로

()으로 낙산(타락산=청룡). ()쪽으로는 인왕산(백호) 그리고 남으로는 남산(목멱산=안산)으로

보국이 잘된 사신사와 조산으로는 삼각산으로 둘러싼 풍수지리상 도읍지가 될 만한 입지를 갖고

있다.

안산이란 혈을 조응하는 사각이니 단정해야 기가 머무른다. 이는 마치 신하가 조회하는 것과

같아야하고 절을 하는 것과 같아야하니 두손을 모아 공손하게 읍하는 것 같으면 길하고 , 소 모양

이나 용 모양이면 길하다고 했다.

남산은 그 형상도 한 일자 모양으로 길게 가로 놓여 단아하고 남북 어디에서건 중간쯤에서 보면

마제잠두의 일자 모양으로 조금도 이그러짐이 없다.

해발 265m의 남산은 현재 중구 남산동, 예장동, 필동, 회현동, 장충동과 용산구 도동, 후암동,

이태원동 한남동 등에 둘러싸여 있으니 옛날에는 남산이지만 지금은 서울의 중앙 산이다.

그런데 남산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조선 초 천도하면서 부터다 이전에는 인경산으로 불리웠다.

소나무 숲이 짙푸르게 뒤덮인 남산은 조운모우기 휘감아 지나가고 흰 안개와 노울이 철따라

지나가는 광경을 늘 접하고 살았을 겸재는 남산은 동네 앞산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장마지는 어느 여름날 비 온 뒤에 흰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 남산을 휘감아 도는 장관을

보고 그 느낌을 일필휘지로 남산을 그렸을 듯 싶다.

산허리를 감도는 흰 구름은 바탕색을 그대로 놓아둔 채수파문(물결무늬)을 변죽 따라 성글게

그려 넣는 단순한 기법으로 표현했는데 영락없는 구름이다.

 

6. 소악루(小岳樓)


 

소악루는 서울 강서구 가양동 성산 동쪽 기슭에 있던 누각이다. 전라도동복(同福) 현감을 지낸

소와 이유(笑窩 李·16751753)가 영조 13(1737)에 자신의 집 뒷동산 남쪽 기슭에 지은 것이다.

한강의 강폭이 넓어져 서호(西湖) 또는 동정호(洞庭湖)로 불리던 드넓은 강물을 동쪽으로 내려다보는

위치에 세워졌으므로 소악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소악루는 소악양루(小岳陽樓)의 준말이니 작은 악양루란 뜻이다.

본디 악양루는 중국 호남(湖南)성 상강(湘江)도 악양(岳陽)현의 현성(縣城) 서문(西門)의 문루 이름이었다.

이곳에 올라서면 동정호가 정면으로 바라보여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성산 동변의 북쪽 끝자락에 해당하는 한강가에 높다랗게 자리잡은 기와집 안채는 한강을 내려다보게

동향으로, 또 한 채의 기와집인 사랑채는 남향으로 각각 지어져 있다.

그리고 그 기와집 아래로는 섭울타리를 둘러 별채의 성격을 분명히 한 초가들이 군데군데 지어져 있다.

딸린 식구들이 사는 협호(夾戶·본채와 떨어져 있어 다른 살림을 하게 된 집)일 것이다.

집 주변은 온통 큰 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집 뒷동산에는 소나무와 잡수림이 우거지고

앞 강가에는 버드나무 숲이 장관이다.

북쪽 산자락이 강가로 밀고 나와 집터를 명당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북산 기슭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

북풍을 막아주게 했다

협호 아래의 낮은 지대에는 연못을 크게 파고 연꽃을 심었는데 못 가운데에 섬이 있고, 섬 위에는

사모정 형태의 초정(草亭)이 지어져 있다. 사모정 둘레로는 버드나무를 비롯한 각종 꽃나무가 심어져 있고,

연못 좌우에도 몇 그루의 키 큰 버드나무가 있어 이 연못의 연륜을 짐작케 한다.

소악루 남쪽으로 초가들이 보이고 그 너머로 홍살문이 높이 솟아있어 그곳이양천현아(陽川縣衙)임을

짐작케 한다.

홍살문 뒤로 기와집 한 채가 우뚝 솟아나 있으니 아마 가장 동쪽 높은 곳에 있다던 객사(客舍)

파릉관(巴陵館) 건물일 듯하다.

연못 아래 강가에는 두 척의 돛단배가 돛을 내린 채 정박해 있고 한 척의 거룻배는 갓 쓰고 도포 입은

선비 넷(게시자 주석-확대해서 보면 선비 셋과 뱃사공)을 태운 채 마을로 들어오고 있다.

아마 풍류를 즐기기 위해 소악루를 찾아오는 일군의 선비들인 모양이다.

이 소악루는 1842년 편찬된 양천현지에 벌써 터만 남아있다 해서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린 지 100년 이내에 허물어진 사실을 알 수 있다.

서울시는 겸재의 진경산수화인 이 소악루소악후월1993년 세상에 알려지자 이 그림들을 토대로

소악루 복원을 계획하여 1994625일 이를 준공했다.

위치는 가양동 성산 상봉 부근으로 옮겨 잡았다.

 

7. 선유봉(仙遊峯)


 

선유도는 지금과 같은 섬이 아니였다. 정선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얕으막한 봉우리였다.

이 선유봉으로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의 사신들도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여의도 비행장의 활주로와 제방을 쌓는데 사용되고

해방 이후에는 강변북로 공사에 이용되어 원형은 사라지고 현재의 모습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이후 서울 서남부권의 식수를 공급하는 정수장으로 사용되다 2002년도 생태공원으로 활용되어

현재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그림은 서울 영등포구 양화동 양화선착장 일대의 260년 전 모습이다.

이 곳에 있었던 선유봉(仙遊峯)은 매혹적인 산으로, 신선이 놀던 산이라는 뜻이다.

관악산과 청계산의 서쪽 물과 광교산 수리산 소래산의 북쪽 물을 몰고 온 안양천이 산자락을

휘감으며 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붓끝처럼 솟아난 산봉우리였다.

선유봉은 그러나 1965년 양화대교가 이 곳을 관통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 산자락 강변에는 서울로 가는 큰 나루와 안양천을 건너 양천으로 가는 작은 나루가 있었는데

모두 양화(楊花)나루라 불렀다. 이 곳의 지명이 당시에도 양천현 남면 양화리였기 때문이다.

  

그림은 안양천 건너 염창리 쪽에서 본 시각으로 그려져 있다. 작은 양화나루 쪽 모습을 그린 것이다.

안양천 하구를 건너는 작은 양화나루에는 나룻배 세 척이 있었던 모양이다. 두 척은 강가에 매여있고,

한 척이 막 길손들을 염창리 쪽에 내려놓은 듯 말탄 선비 일행이 모래사장을 가로지르고 있다.

사공이 긴 삿대를 강변 모래펄에 꽂아 나룻배를 물가에 고정시키고 서있는 것은 아마 이쪽에서

건너갈 길손들을 기다리기 위해서인 듯하다. 한나절이라도 기다릴 태세다.

선유봉 양쪽 아래 나루에는 모두 큰 마을이 들어서 있었던 모양인데 여기 보이는 것은 작은 양화나루

마을이다.

초가집들은 나루터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평민들의 집일 것이나, 큰 기와집은 이 곳에

은거해 살았다는 연봉 이기설(蓮峯 李基卨·15581622)이 살던 집일 듯 하다.

이기설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군량을 조달하는 실무를 담당하다 상관의 부정을 목도하고 벼슬을 버린

뒤에 종로구 삼청동 백련봉 아래에 연봉정(蓮峯亭)을 짓고 은거해 학문 연구에만 몰두한 인물이다.

그는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장차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으로 짐작하고 가족을 이끌고 이 선유봉

아래로 이사해 광해군이 높은 벼슬로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한다.

 

8. 양화진(楊花津)


 

양화진은 마포구 합정동 378-30번지에 있던 나루다.

한양 서울에서 양천이나 김포, 부평, 인천, 강화 등 경기도 서부지역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 나루를

건너야한다. 이곳에서 출발한 나룻배는 맞은편 강기슭인 경기도 양천현 남산면 양화리 선유봉 아래

백사장에 닿았다. 이곳 역시 양화나루였다.

원래 양천 양화리에 있던 나루가 양화나루였기 때문에 양화나루에서 건너가는 한양 잠두봉 아래의

나루도 양화나루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겸재 정선이 남긴 그림 양화환도(양화나루), 금성평야(양화진 일대), 양화답설은 경강(한강)의 탁트인

풍광은 물론 계절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그린 것이다.

굽이쳐 흐르는 모습이 호수처럼 보이는 자점을 동호, 사호 등으로 불렀다.

또한 물이 만들어낸 지형(삼각주)의 변화로 그 곳의 풍경은 일품이었다.

우선, 양화진 주변의 풍광과 나루는 전별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양화진은 지방관으로 가는 동료 관원들과 함께한 전별연이 자주 열렸다.

경강의 하구연인 양화진과 잠두봉은 서호의 절경으로 한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양화진의 광활한 백사장과 호수처럼 너른 강물이 이어지는 장쾌한 풍관을 만끽할 수 있는 예로부터

절경으로 손꼽혀오던 곳이다.

특히 잠두봉은 절벽 위에 평탄한 공간이 있어 경치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그리고 경강(한강)은 전국을 연결하는 뱃길의 중심지로 물류의 중신이면서 국가 조세곡 운송의

종착지로서 도성안의 시장에 미곡, 목재, 어물, 소금을 공급하는 도매시장이 있었고 전국시장과

관련해서는 상품가격을 조절하는 중앙시장의 역할을 했다.

당연히 상업과 생활의 중심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양화진은 김포를 거쳐 강화도로 가는

길목이어서 수군이 주둔해 수군기지가 있었다.. 한강에는 양화진을 포함 6개의 진이 있었다.

검문소가 있었는데 진은 왕성 경비의 외곽 축이었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잠두봉 아래에 커다란 기와집이 무풍정의 별서(별장)라고 본다.

잠두봉 아래 낛시배를 저어나가 홀로 낛싯대를 담근 선비는 겸재 자신이 아닐까.

 

 

 

 

 

 

 

 

 

 

 

 

 

 

 

                                     

 

    (양화환도)

 

 

 

 

 

 

 

 

 

 

 

 

                             

 

       (금성평사)

 

 

9. 낙건정(樂健亭)

  

 

 

 

 

 

 

 

  

  

 

 

 

 

 

 

 

 

 

 

 

 

 

 

 

 

 

 

 

낙건정은 현재 행주대교가 지나가는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덕양산 끝자락 절벽 위에

있던 정자다.

6조판서를 역임한 낙건정 김동필(1678~1737)이 벼슬에서 물러나 건강하게 즐기며 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김동필은 삼연 김창흡의 문인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릴 때도 비록

소론이 됐지만 스승 및 벗들과의 관계 때문에 항상 노론적 성향을 잃지 않았던 인물이다.

낙건정이란 이름은 송나라 때 대학자인 육일거사 구양수(1007~1072)<사영시>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이런 내용은 김동필의 동문친구인 서당 이덕수(1673~1744)가 영조2

에 지은 <낙건정기>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그 내용 일부를 보면 행호물가에 정자 지은 것이 뱃사람들 집의 물가 절벽에 지은 듯

한데 낙건정이 가장 빼어났다. 낙건의 뜻은 빼어남에서 취하지 않고 구양자의 시에서

취했으니 정자의 빼어남은 눈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 볼 수 있어서다.‘

몸이 건강해야 비로소 즐겁게 되니, 늙고 병들어 부축하기를 기다리지 말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도 이들과 동문이다. 더구나 김동필은 김동필의 이종사촌

형이었다.

행오강변에 절벽을 이루어 솟구친 덕양산 줄기 산자락 끝편에 위치한 별채 기와집이 낙건정인

것 같다. 집 뒤로 네모진 담장이 널찍하게 쳐졌고 그 뒤로는 잡목숲과 솔숲이 우거져 있다.

집 앞 절벽 비탈에도 수풀이 우거졌는데 강변으로는 버드나무숲이 장관이다.

멀리 한강 하구인 조강으로 돛단배들이 무수이 떠 있어 바다로 이어지는 느낌이다.

절벽 아래 강가에는 주인 없는 배 한 척이 돛폭을 내린채 정박해 있고 강변에서 낙건정으로

오르는 길만 두 갈래로 훤히 뚫렸다.

낙건정 밑 수직으로 내려치는 절벽 밑으로 잔잔하게 흐르는 서호와 저멀리 서해로 이어지는

염하의 물 위에 떠 있는 돛배들이 있어 참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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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15  한바다

참고서적 : 겸재의 한양진경  최완수 2004   동아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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